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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이는 나라를 위해 요긴히 쓰일 기술자이니 석방하도록 하시오."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은 악명 높았던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이었다. 1949년 친일 경찰들은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사주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 백민태가 변심, 자수함으로써 그들의 음모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반민특위 특경대는 노덕술을 체포·구금했다. 그러자 다음 날 이승만이 반민특위 임원들을 경무대로 불러 노골적으로 석방을 요구한 것이다.

"그는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의 경험밖에 없는데 그런 경험과 기술이 신생 대한민국에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의 항변에 이승만의 두 볼은 경련으로 씰룩거렸다고 한다. 노기를 띤 이승만은 말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노덕술 석방을 요구한 이승만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8일 오후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김병상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사진 왼쪽부터)이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친일인명사전'을 헌정하고 있다.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8일 오후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김병상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사진 왼쪽부터)이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친일인명사전'을 헌정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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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울 중구 을지로 입구에 있던 반민특위 사무실에는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무장 경관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반민특위 특경대 청년들을 개 잡듯이 다루고 20명을 체포· 구금했다. 그리고 특위위원들은 무장경관의 총부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며칠 후 국회에서는 반민특위를 주도했던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체포되었다. 김상덕, 신성균, 오택관, 이문원 등 12명이 헌병대에 끌려가 공산당 프락치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반민특위는 힘을 잃기 시작했고 반민특위 위원장은 압력과 탄압에 시달리다가 사퇴하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취급한 682건의 사건 중 실형 판결이 내려진 것은 12건에 불과했다. 그 중 5건은 집행유예가 선고되었고 그나마 복역 중이던 사람들도 한국전쟁을 틈타 모두 석방되었다.

'역사청산'이라는 민족적 화두와 염원을 가지고 출발한 반민특위는 이렇게 허무히도 와해되고 말았다. 이것은 백범 김구가 암살당한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어처구니없게도 반민특위가 친일파를 청산 했다기보다는 되레 친일파에 의해 반민특위가 청산됐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것은 친일파들과 이승만 정권의 합작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1948년 반민특위가 결성되었을 때 이승만과 친일파들은 여러 가지 반대 논리를 동원했다. 그들은 이른바 '국론분열론', '정치적음해론', '건국공헌론' 등을 내세우며 친일청산에 반대했다. 이승만의 수하 대한독립촉성회 같은 단체에서는 친일청산론자들을 아예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에 걸쳐 친일청산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그가 주로 내세운 논리는 '시기상조론'과 '국민화합론'이었다.

"친일문제는 국민화합 차원에서 공과를 균형 있게 봐야 한다."

이것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말이 아니다. 17대 대통령 이명박이 종단 대표들과의 만남(2008. 4.29)에서 한 말이다. 당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명단 1차 발표가 있었던 때였다. 우리는 이 발언에서 친일문제에 관한 한 그 반대 논리가 60년 동안 단 한치도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갑자기 격렬해진 조중동의 공격

친일인명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압박이 심상치 않다. 창업사주가 명단에 오른 <조선>과 <동아>는 물론이고, 10일에는 <중앙>까지 가세하여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고 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민족문제연구소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다. 위력적인 조중동의 연합공격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60년 전의 반민특위 짝이 나지 말란 법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과거사 청산을 제기한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도 이제는 세상에 없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은 2002년 8월 13일 서울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 학술단체협의회 주최 정책토론회에서 친일파 청산론에 대해 비판적, 부정적 주장을 펼치는 친일청산 반대논리를 10가지로 정리해 발표한 바가 있다.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열렸다. 시민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혈서지원'을 증명하는 일본어신문인 <만주신문(滿洲新聞)> 기사가 실린 '친일인명사전'의 한 부분을 읽고 있다.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열렸다. 시민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혈서지원'을 증명하는 일본어신문인 <만주신문(滿洲新聞)> 기사가 실린 '친일인명사전'의 한 부분을 읽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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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색깔론(친일청산론자를 반역자 또는 빨갱이로 모는 주장)
2. 공과론(功過論, 비록 한때 친일을 했더라도 민족에게 끼친 공로가 많으니, 한때의 친일로 인간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
3. 공범론(그때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주장) 
4. 망각론(과거는 흘러갔다는 논리. 50년이 지난 이 시점 당사자들도 다 죽었는데 친일파 청산은 궤변이라는 주장)
5. 범부피해론(권력의 강제에 의해 친일을 했기 때문에 연약한 범부가 이를 감당하기엔 무리였다는 주장)
6. 직분충실론(박정희는 군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다녔다.(조갑제) 민족언론(또는 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했다(동아, 조선 사주와 김활란 등)'는 주장)
7. 순교자론(민족의 선각자로서 겪어야 했던 수난이었으므로 그들은 역사의 희생자라는 주장.)
8. 연좌제의 부활(이제 와서 친일파 명단을 거론하는 것은 죄 없는 후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라는 주장)
9. 국론분열론(친일청산은 양육강식의 세계화 시대에 민족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소모하는 불필요한 담론이라는 주장)
10. 정치적 음해론(정치적 반대파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주장)

놀랍게도 <조선>과 <동아>의 사설과 <중앙>의 시론에는 이 10가지 반대논리가 빠짐없이 들어 있다. 그 내용을 보자

'묘소입구 길바닥엔 '박정희는 친일잔당' '다카키마사오(박정희) 일본 육군 소좌를 국립현충원서 추방하라' 같은 붉은색 구호들이 쓰여 있었다. '대통령선거 다시 하자' '미디어 악법' 피켓도 눈에 띄었다. 국민의례는 애국가 제창이나 태극기에 대한 경례 없이 '민중의례'에 따라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만으로 끝냈다. 한반도가 그려진 배지를 단 사람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광복 직후 친일파 청산 의지가 치열했던 반민특위가 가려낸 친일인사가 688명, 항일독립운동 원로들의 모임인 광복회가 2002년 내놓은 친일인사 명단이 692명이었다. 그런데 조국 광복 운동에 손가락 하나 담근 적이 없는 정체불명의 인사들이 그때보다 6배나 많은 사람을 친일 인사로 사전에 실어놓은 것이다.'
    - 11.9자 <조선> 사설 '대한민국 정통성 다시 갉아먹는 친일사전 발간대회'

사주 방응모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조선>은 색깔론과 함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거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친일인명사전을 낸 민족문제연구소는 친북좌파이거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역자라는 것이다. 색깔론이야 <조선>에서 너무 자주 보아 이제 식상할 정도라서 부언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조선>이 내세우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란 게 도대체 뭔지를 묻고 싶다. <조선>은 이승만과 박정희 두 사람을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혼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설을 통해 친일인명사전 공격하는 <조선> <동아>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주최로 '친일인명사전 발간 보고대회'가 열릴 예정인 가운데 8일 정오 서울 용산구 숙명여자대학교 정문에서 '박정희 바로 알리기 국민모임'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민족문제연구소의 정략적 목적에 의한 친일조작, 역사왜곡 중단과 민족문제연구소 해체 등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주최로 '친일인명사전 발간 보고대회'가 열릴 예정인 가운데 8일 정오 서울 용산구 숙명여자대학교 정문에서 '박정희 바로 알리기 국민모임'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민족문제연구소의 정략적 목적에 의한 친일조작, 역사왜곡 중단과 민족문제연구소 해체 등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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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라는 조직이 만든 이른바 '친일인명사전'이 어제 공개됐다. 이 조직이 친일인사였다고 주장하는 4389명의 명단과 함께 일방적으로 짜깁기한 '친일 행적'이 실려 있다. 우리 사회 내부에서 친일 논란의 불씨를 다시 지피려는 저의와 이 조직의 정체가 궁금하다.

엄혹했던 식민지 지배가 끝나고 60여 년이 흐른 지금, 복합적 삶의 단편적 내용만 골라 친일의 낙인을 찍는 것은 결정적 오류를 범할 수 있고 후손에게 심대한 상처를 입힐 수 있다....사회 각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방적 명단 발표를 강행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됐던 전력이 있다. 남민전은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로 확정판결을 받은 공산주의 지하조직이었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대한민국이 친일 청산을 못해 정통성이 북에 비해 부족하다는 좌파사관의 확산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에 단호한 대처로 맞서지 않을 수 없다.'
-11.9자 <동아> 사설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노린 좌파사관 친일사전' 

창업사주 김성수와 방계 교육기관 고려대학교의 총장들이 등재된 <동아>는 <조선>보다 한층 격렬한 논조를 보이고 있다. <조선>의 방응모는 친일파로 익히 알려졌던 인물이라서 충격이 적었겠지만 <동아>의 김성수는 자기들이 민족 지도자 또는 독립운동가로 내세우던 인물이었으니 그들의 당혹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동아>는 친일인명사전이 '논란의 불씨를 되살린다'는 국론분열론에 '60년이나 지났다'는 망각론 그리고 '후손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연좌제론까지 다양하게 펼치고 있다. 또한 임헌영 소장을 친북으로 모는 색깔론에다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이라는 반역자론까지 곁들이고 있다. 나아가 <동아>는 민족문제연구소에 '단호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말함으로써 마치 60년 전 친일청산론자 처단을 주장한 대한독립촉성회를 방불케 한다.

'왜 아니겠나. 백범 같은 위인이라면 모를까 광기 서린 일제의 총칼 아래서 민족 지조를 지키며 살 수 있었던 조선인들이 얼마나 됐겠나 말이다. 한두 해도 아니고 40년 가까이 방치된 세계사의 그늘 속에서 하루 살기를 걱정하는 범부로서 언감생심 광복의 꿈을 품을 수 있었을까 말이다.

이런 중심 잃은 선정으로 누가 무엇을 얻는지 모르겠다. 식민지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후배 기자에게 떠넘기지 않고 주필로서 스스로 짐을 진 사람들을 을사오적과 같은 부류로 만들어 대한민국 국민 중 누가 득을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사전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11.10자 <중앙> 이훈범 논설위원의 시론    

<중앙>은 <조선>과 <동아>에 비해 친일문제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뒤늦게 친일인명사전 비판에 가담했다. 대신 <중앙>은 자기 회사 주관 행사인 '미당문학상'이 서정주의 사전 등재로 주가가 떨어질 것을 걱정해서인지 '서정주 특집'을 꾸려 내보냈다. 그랬다가 우군 <조선>과 <동아>가 격렬하게 보도하자 이에 부응하여 이훈범 논설위원을 통해 친일인명사전을 흠집 내는 시론을 게재한 것이다. <중앙>의 시론에는 무시무시한(?) 색깔론이나 반역자론은 없지만 전형적인 공범, 범부론과 망각론 등이 담겨 있다.

언론의 소명 저버린 신문...'사문난적'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친일파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첫째 을사늑약 당시부터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매국노의 무리, 둘째 세속적인 출세와 야망을 위해 제국주의 체제에 투신한 개인, 셋째 처음에는 민족지도자 또는 선각자인척 하다가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훼절한 배반자 등이 그들이다. 조중동이 문제 삼는 박정희는 둘째, 김성수나 장지연은 셋째에 해당한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은 친일파 중에서도 배반자를 가장 나쁘다고 보았다.

우리에게 친일파 청산의 실패는 뼈아픈 역사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과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강고해진 반공주의로 인해 친일 논의는 이념논쟁으로 변질되면서 우리 역사를 왜곡시켰다. 이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은 지배 기간이 40년의 장기간이었다는 점, 당시 조선인구가 2000만이었다는 점 그리고 공식적인 독립운동가의 숫자가 1만 명을 넘는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최소한의 숫자라고 보아야 한다.

반민특위는 7000명을 조사대상자로 삼았고 프랑스는 8만 명을 사법처리했다. 우리는 지금 처벌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연좌제로 후손을 엮자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단지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자는 것이다. 이토록 지극히 느슨한 수준의 청산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이다지도 큰 저항과 공격을 받는 것은 역설적으로 친일청산의 필요성을 말해준다.

언론이라면 마땅히 '역사의 기록'이라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조중동이 친일인명사전을 공격하는 것은 언론 본연의 자세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지금과 같은 보도 태도를 혁파하지 않는다면 조중동은 훗날 혹세무민을 일삼은 '사문난적' 으로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른다.   


태그:#친일인명사전, #반민특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청산반대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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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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