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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지난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열렸다. 시민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혈서지원'을 증명하는 일본어신문인 <만주신문(滿洲新聞)> 기사가 실린 '친일인명사전'의 한 부분을 읽고 있다.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지난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열렸다. 시민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혈서지원'을 증명하는 일본어신문인 <만주신문(滿洲新聞)> 기사가 실린 '친일인명사전'의 한 부분을 읽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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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전 부통령, 장지연 경남일보 주필 등 독립운동 유공자 20명이 지난 8일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되면서 서훈 취소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당장 주무부처인 국가보훈처는 "정확한 내용을 보지 못했다"며 "친일인명사전을 검토한 뒤 공식 입장을 밝히겠다"고 난색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행정안전부는 9일 "해당부처에서 사실관계를 확인 후 훈·포장 취소를 요청하면 취소될 수도 있다"고 밝혀 지난 1996년 이후 사상 두 번째로 서훈이 취소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1996년 2.8 독립운동 등의 공적으로 독립장을 추서 받았지만 이후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친일 행적이 드러난 서춘을 비롯한 5명에 대해 서훈을 취소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국가보훈처는 지난 2005년 3월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전력이 드러날 경우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서 보장하는 모든 혜택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번에 사전에 게재된 독립운동 유공자는 김성수 전 부통령, 윤치영 초대 내무부 장관, 이종욱 조계종 총무원장 등 모두 20명으로 해방 후 유력인사로 활동한 이들이 많다.

특히 항일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 경남일보 주필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1920년대까지 항일 행적을 보이다 중일전쟁이 격화되던 1930년대 후반부터 '변절'해 지속적인 친일 행적을 보인 점이 공통으로 확인됐다.

윤치영 초대 내무부 장관, 해방 직전까지 조선총독 자문위원으로 활동

우선 1951년 6월 대한민국 부통령으로 선출됐고 일제 시대에 <동아일보>를 창간했던 김성수 전 부통령(대통령장)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시국강연 등에 참가하는 등 확연한 친일 행적을 보였다.

특히 조선에서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자 1943년 8월 5일 <매일신보>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내용의 장병격려문을 기고해 "징병제 실시로 비로소 조선인이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이 됐다"고 주장했다. 또 같은 해 11월 6일에는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는 글을 실어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1982년 미주방면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건국포장을 받은 윤치영 초대 내무부 장관은 을사조약 이후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1912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으로 체포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후 1924년 4월 독립사상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며 결성된 동민회에 가입하고 1937년 '황군위문금'과 '국방헌금'을 내는 등 '변절'하고 말았다.

특히 그는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내선인은 동일운명-거선의 항해에 임하야'라는 글을 발표하고 같은 달 23일 조선신궁에서 국가안태와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를 지내기 위한 '기원제거행준비회의' 발기인 및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 1941년 5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고문에 임명돼 해방 직전까지 매년 3천 원의 수당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독립운동 끝에 투옥됐지만 출옥 후 친일단체에 투신한 독립운동 유공자들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지난 8일 오후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김병상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사진 왼쪽부터)이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친일인명사전'을 헌정하고 있다.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지난 8일 오후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김병상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사진 왼쪽부터)이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친일인명사전'을 헌정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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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가 변절한 인물들도 있다. 1911년 1월 황해도 지역에서 독립자금을 모금했던 '안악사건(안명근 사건)'으로 독립 훈장을 받은 김홍량은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황해도 도회의원(안악)을 두 번 지내는 등 친일파로 돌아섰다. 그는 이후 1942년 1월 황해도 양곡배급조합 대표로 '대동아 전쟁' 2주년을 기념하여 조선군애국부에 전투기 헌납기금 10만 원을 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독립신문> 발간 공로로 독립 훈장을 추서받은 윤익선 역시 옥고를 치른 뒤 간도로 이주하였다가 1929년 후반 귀국하여 친일 행위를 지속적으로 했다. 그는 특히 1940년 대동일진회 제1회 정기대회에서 임시의장을 맡고 그달 13일 대동일진회의 산하기관인 동학원의 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대동일진회는 1938년 "내선일체와 충량한 황국신민화"를 기치로 내걸고 조직된 친일단체다.

이 외 1919년 황해 해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옥고를 치렀으나 1942년부터 사상범들이 출옥 뒤 다시 항일운동에 나서지 못하도록 전향시키는 '촉탁 보호사'로 활동한 박성행(애국장), 역시 사상자 전향 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각각 이사와 검사장으로 참여한 이동락(애국장), 이항발(애국장)도 사전에 이름이 게재됐다.

산하 사찰에 일본군을 위한 모금함 설치 등 종교인의 '변절'도

종교인으로는 임시정부 참여로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된 이종욱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그는 해방 이후 조계종 총무원장 및 동국대 이사장을 맡고 2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영화를 누렸지만 일제강점기 때 전시채권을 팔고 전쟁기금을 모아 일제에 헌납하는 등 친일행위를 일삼았다.

특히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3년 3월 자신이 주지로 있던 월정사 관하 각 사찰에 일본군을 위한 모금함을 설치하고 그 수입금을 내는가 하면 같은 해 4월 조계종 종무총장으로서 각 본사 주지에게 '조선불교 근로보국대편성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사찰별로 근로보국대를 편성하도록 독려했다.

대흥사 주지 박영희, 범어사 주지 차상명, 해은사 주지 허영호도 그와 같은 행적으로 사전에 이름을 올렸고 3.1운동에 참여했던 최지화 목사나 김우현 목사 등은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에 소속돼 일제의 전쟁을 지원하도록 조선인들을 독려했다. 역시 3.1운동 등의 공적으로 애족장이 추서된 최준모도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 이사로 활동하며 일제의 전쟁에 협력했다.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1932년 결성된 비밀결사 '십자가당'의 당수였던 남천우 목사(애족장)도 일제의 조선기독교 통·폐합 및 일본기독교로 편입 방침에 따라 통합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충남교구장을 맡는 등 변절해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태그:#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독립운동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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