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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생가에 들렀습니다. 생가는 지리산 자락인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태어나신 실제 생가는 사라지고 없고, 대원사(大源寺)로 출가하기 전 25년 동안 살았던 생가터에 한옥양식으로 복원된 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철스님 생가터에 세워진 겁외사는 앞 공간은 사찰이고 뒤는 스님의 생가 복원공간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겁외사(劫外寺)는 '세속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진리를 함께 하고 있는 절'로 풀이됩니다. 성철스님의 생애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합니다.

 

겁외사는 일반적인 가람배치와 많이 다릅니다. 일주문이 따로 없고 누각을 통해 바로 사찰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법당도 사찰 중앙에 있지 않습니다. 겁외사는 성철스님의 생가를 중심으로 창건되었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지리선 겁외사' 현판이 붙은 누각 뒤편에 '벽해루'란 현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벽해루는 성철스님이 평소 즐겨 말씀하시던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아침 붉은 해가 푸른바다를 뚫고 솟아오른다)'에서 따왔다고 안내책에 설명이 나왔습니다.

 

겁외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누각은 일주문 역할을 함과 더불어 참선법회나 전시회 등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사용됩니다. 탐방 당일(10월10일)에도 누각 바로 앞 야외에는 행사준비를 위한 야외무대를 설치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대웅전에는 부처님 모습과 성철스님 진영이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겁외사 대웅전에는 금단청과 더불어 성철 스님의 일대기가 담긴 벽화가 있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었습니다. 깨달음의 자리인 금당(金堂)의 의미를 두드러지게 하고자 금단청을 했다하지만,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신 성철스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처님 일대기를 담은 벽화는 없으면서 스님의 벽화만 내건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겁외사 대웅전 뒤편으로 성철 스님의 생가가 있습니다. 스님이 대원사(大源寺)로 출가하기 전 25년 동안 살았던 곳에 전통 한옥양식으로 복원된 집은 사랑채, 안채 그리고 유품전시관이 있습니다.

 

실제 생가는 복원되질 못하고 당시 부농의 전통양식을 따라 복원한 옛집 모양은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합니다.

 

생가 이름은 '율은고거(栗隱古居)'라고 붙였으며 성철스님 부친의 호를 딴 것이라 합니다. 부친은 부농이었고 성리학과 한의학 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부할 만큼 꼿꼿한 성품을 지닌 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가 안채에는 성철스님이 30여년 생활하던 해인사 백련암의 방 모습도 재현했습니다. 새벽예불을 하면서 바라보던 석굴암 부처님 사진과 잠시 흰구름을 벗삼아 사용하던 등받이 의자 그리고 평생 사용한 낡은 책상도 보였습니다. 

 

성철스님 전시관에는 40년동안 스님이 입은 누더기 두루마기와 고무신, 지팡이 등 스님의 소탈한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유품이 생전의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스님의 수행정신과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알고픈 마음에서 지리산 자락까지 오겠지요?  '영원한 해탈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조금씩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개인블로그 '별빛촌이야기'(http://blog.daum.net/staryc)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겁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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