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기도 안산시의 일방적인 통합추진에 시흥시 주민들이 반발하고 있다. 안산과 시흥을 잇는 도로를 따라가보면 주변 마을 곳곳에 안산-시흥 통합을 반대한다는 현수막들이 나부끼고 있다.

 

그렇게 안산시와 시흥시의 골이 깊어 가는 가운데 자리한, 산현동 마을에서 시흥시 향토유적 제16호인 윤민헌선생묘를 찾을 수 있다. 윤민헌 선생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 자는 익세, 호는 태비이다.

 

아버지는 이조좌랑 윤엄이며,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의 문인이다. 선조21년(1588) 사마시에 합격하여 선공감역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광해군1년(1609)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형조정랑-전라도도사 등을 거쳤고 광해군 때 붕단간의 대립으로 정국이 어지럽자, 1619년 대동찰방을 마지막으로 안산군(현재 시흥시)에 물러나 살았다 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군자감정에 임명되고, 그 후 평안도 절도사를 역임했으며 인조2년(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정3품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여 안산으로 돌아와 타계했다.

 

그는 자성이 순정하고, 일을 당하면 스스로 지킬 줄 알았으며, 경사에 밝고 시문에 능했다 한다. 특히 조맹부를 시숙으로 하여 해서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묘소는 인조6년(1628)에 조성되었으며 부인 연안 김씨와의 합장묘이다.

 

 

 

묘갈은 숙종35년(1709)에 세운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방부개석 양식이며 시흥시에서 가장 크며 보존상태가 좋다. 기단석 위에 갈색의 대리석 비신을 세웠고, 글씨는 선생의 손자인 평안도 관찰사 윤자인이 썼고, 전자는 윤덕준이 썼다. 묘갈은 무덤 앞에 세우는,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를 말한다.

 

옛붕당들처럼 정치판이 혼탁한 지금, '명리를 탐하지 말라'는 성혼의 가르침을 따라 살다간 윤민헌 선생의 묘를 카메라에 담아 전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윤민헌선생묘, #시흥시, #안산시, #묘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