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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시를 쓰면서 난 온갖 오만에 사로 잡혀 살았다. 매일 저녁 전투하듯 시를 썼고, 선후배들과 술을 마시면서 어설픈 인생을 논했다. 시인 김수영이 "詩여! 침을 뱉어라"라고 외칠 때, 나도 기회주의자로 살려고 하는 이들의 얼굴에 매일 침을 뱉었다.

 

35세에 그림을 시작하여 55세로 막을 내린 짧다면 짧은 예술가의 길을 걸었던 인상파 화가 '폴 고갱 (Paul Gauguin)'의 이야기를 책으로 읽으면서 나는 그의 외침을 듣는다. "美術이여! 침을 뱉어라"

                    

어쩌면 너무나 오만한 작가 '폴 고갱'을 다룬 책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재원출판사>은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미술평론가 박덕흠 선생의 고민에서 출발하는 저작으로 야만의 세계에서 문명인인 고갱이 본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화두에서 시작한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페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고갱은 사춘기 프랑스로 돌아와 학창시절과 선원, 군대, 증권맨으로 살다가 어느 날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그는 원시의 자연과 야생에 대한 동경으로 폴리네시아의 타히티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의 그림을 완성하게 된다.

 

외가의 도움으로 풍요로운 유년 시절을 남미의 페루에서 보낸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17살의 나이에 항해사 조수로 상선의 선원이 되어 보내다 수병으로 징집이 되어 군복무를 마치게 된다. 제대한 직후 모친의 지인인 실업가 귀스타보 아로자의 도움으로 주식 중개회사의 중개인으로 취업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후 결혼도 하고 10년 정도는 증권인으로 행복하게 보내던 그에게 귀스타보 아로자와 그의 딸은 그림 공부를 권유하였고, 그림을 배우기 위해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하고 주식거래인인 그의 직업도 불안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때 고갱은 전업 화가가 되기 위해 피사로와 의논하였다. 피사로의 소개로 세잔, 기요맹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히게 된다.

 

이듬해인 1883년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생활비가 저렴한 루앵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주식거래인 시절에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재능으로 화가로서 성공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화가로 살아가면서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었고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으며 이후 한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파리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내던 고갱은 1886년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였고 토속적인 토기류 도자기 제작에도 관심을 가졌다.

 

토기에서 비롯된 그의 원시적인 관심은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으로 향하게 된다. 퐁타방에서 알게된 젊은 화가 샤를 라발과 함께 파나마를 거쳐 마르티니크섬에 도착하지만 곧 향수병에 시달리게 되고 이듬해 파리로 돌아왔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이때 제작된 작품은 원시주의 미술로 파리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파리에서는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의 우정이 돈독했으며 고흐의 동생 테오의 추천으로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 공동으로 화실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예술적 견해로 종종 대립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고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결별한다.

 

그 후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고, 조각, 판화, 도기제작에 전념하였다. 이때부터 고갱은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것에 관심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고갱은 점차 파리 아방가르드 화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889년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많은 작품들을 보게 된다. 그는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풍물에 열광하였고 열대지방의 원시적인 생활을 동경하였다.

 

마침내 1891년 자신의 작품을 처분하여 원시세계로의 여행자금을 마련하였다. 코펜하겐에 들러 그의 가족들을 만나고 그해 4월초 마르세이유를 출항하여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떠났다. 

 

그가 이상세계를 꿈꾸며 타히티에 도착했지만, 타히티는 이상과는 달리 척박한 곳이었다. 고갱은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파페에떼는 식민지 지배자들과 술주정뱅이 백인들이 득실거리는 실망스러운 곳이었다. 고갱은 그해 9월에 마타이에아 섬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고갱은 안정을 되찾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하지만 점차 가난과 빈곤, 고독에 시달려 가기 시작했다. 고갱은 파리로 돌아가 가족들과 재회하기를 갈망했다. 1893년 그는 타히티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어 세인의 관심을 끌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였다. 프랑스로 돌아온 1년 동안 깊은 좌절감만 쌓여갔다. 코펜하겐의 그의 가족들도 그에게 냉담했다.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가는 것을 결심하였고 1895년 6월 말 프랑스를 떠나 다시 남태평양으로 향했다.

 

고갱은 타히티에 도착한 직후부터 병마에 시달렸고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그의 건강은 더욱 나빠져 있었다.

 

이곳에서 정착하여 '쾌락의 집'을 짓고 '부채를 든 여인' '해변의 말 탄 사람들'등의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이내 건강이 악화되어 1903년 5월 8일 심장마비로 생애를 마쳤다.

 

어쩌면 고갱의 육신은 땅 속에 묻혔지만, 그의 영혼은 아직도 골고다로 향하는 예수에게 저주를 보내다 오히려 신의 저주를 받아 평생을 방황과 방랑으로 살게 되는 방황의 신 에헤즐스인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안식처도 없이 객지에서 생을 마감한 에헤즐스의 영혼이 고갱에게 씌워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미술계에서도 외면 받았고, 평생을 방황했고, 가족과도 떨어져 살았고, 사랑하던 몇 명의 여인들에게도 버림을 받았다.  

 

방황하는 슬픈 영혼이여! 오늘, 그를 위해 술을 한잔 기울어야 할 것 같다. 美術에 침을 뱉은 에헤즐스를 위해….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의 저자 박덕흠 선생은 1957년 경북 예천군 감천면 출생으로 79년 '흑맥문학' 추천으로 시인이 되었다. 현재는 미술평론가로 출판기획자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는<에곤 실레>가 있다.


태그:#폴 고갱, #미술전문출판사 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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