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름 휴가의 대미를 바닷가에서 장식을 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건 딸아이였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바다를 보고 싶었다. 동해안의 하고 많은 해수욕장이라고 이름 붙인 그 중 오직 하나 삼척의 맹방해수욕장이 보고 싶었던 건 영화 '봄날은 간다' 때문이었다.

해수욕을 하고 싶은 딸아이의 바람을 충족시키고 나 역시 좋아하는 영화를 떠올려 보며 해변을 걷는 것으로 여름 휴가의 끝자락을 마무리 하고 싶어 맹방해수욕장을 향했다.

구불구불한 강원도 산자락을 수없이 돌아서 삼척에 막 진입했을 무렵, '천은사'라는 표지를 발견했다. 맹방해수욕장과 더불에 영화 '봄날은 간다'의 배경이었던 절은 '신흥사' 였건만 어째서 그 당시 내 기억으로 '천은사'가 떠올랐을까.

비가 부슬거리는 가운데 차에서 내려 우산도 없이 절집으로 들어섰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의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계곡이 절집 앞을 흐르고 있었는데 주변의 바위들에 푸른 이끼가 돋아 있었다. 아마도 습한 곳인 듯싶었다. 마침 보슬비도 내리고 계곡 주변의 푸른 이끼가 끼어 주변이 온통 뿌연 초록세상으로 보였다. 게다가 절집으로 들어가는 양편에 우람한 느티나무는 25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보호수'라는 이름을 단 천은사 느티나무는 절집의 또 다른 일주문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서 있는 길을 따라가도 될 것이고 푸른 이끼가 낀 계곡길을 따라가도 절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엇비슷해 보였다. 계곡쪽으로 올라 간 누군가가 이끼 낀 계곡가 바위 위에 돌탑을 쌓아놓은 게 보인다. 바위며 계곡 주변이 온통 푸른 이끼로 덮여서 미끄러운 그곳에 놓인 돌탑에서 깊은 믿음의 기운이 읽혀진다고 생각하며 느티나무 쪽을 향해 절집으로 들어섰다.

푸른 이끼가 낀 천은사 계곡에선 깊은 신심마저 느껴지고
▲ 계곡 푸른 이끼가 낀 천은사 계곡에선 깊은 신심마저 느껴지고
ⓒ 김선호

관련사진보기


스님 한 분이 대웅전을 가로질러 가고 절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석탑 아래를 두 마리의 개가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 주변이 온통 고요 속에 들어 앉아 있었다. 계곡쪽으로 한 무리의 등산객이 절집을 향해 올라오며 절집의 고요를 잠시 깨뜨려 놓았을 뿐.

이내 등산객들은 절집 뒤로 나 있는 산(쉰음산) 속으로 사라졌고 보슬비 속에 절집은 다시 고요함으로 평온해 졌다. 개 두 마리는 두 눈을 껌뻑 거리며 한번 쳐다볼 뿐 이내 별일 아니다, 라는 듯이 탑 아래 다리를 뻗고 눕는다. 규모가 작은 절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이 절집에서 고려의 학자인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썼다고 한다. 월정사의 말사라고 적혀져 있어 오대산을 떠올려 본다. 대웅전이 건물이 작고 아담하다. 대웅전 오른쪽으로 돌아서 건물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니 왼편에 약사전 건물이다. 대웅전에서 약사전으로 가려다 문득 눈길을 끄는 것이 있어 발길을 멈춘다.

수국꽃나무다. 아름드리 꽃이 한가득 피었다. 그것도 수국꽃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색깔을 다 품은 채로. 본래 연두색으로 피어나는 수국은 보라색으로 바뀌다가 연한 보라색이 마침내 하얗게 되어 색이 바랜다.

모든 꽃빛을 다 모아 여기 천은사 수국꽃이 피다
▲ 수국꽃 모든 꽃빛을 다 모아 여기 천은사 수국꽃이 피다
ⓒ 김선호

관련사진보기


수국꽃에 있어서 절정은 주관적이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수국은 절정이 다를 것이라고 천은사 수국꽃 앞에서 나는 생각해 본다. 내게 있어 수국의 절정은 모든 꽃빛이 총 망라 되어 있는 바로 이 수국이 절정이다. 연두빛이며 연하고 조금 짙은 보라색이며 연노랑빛에서 하얀꽃빛까지 모두 한 나무에 매달린 저 수국이야말로 절정인 것이다.

수국꽃 앞에서의 감동이 강해서 '모두의 건강을 비는' 약사전에서의 합장은 상대적으로 시들해진다. 약사전 건물은 앙증맞을 정도로 작았는데 소나무 창살문이 인상적이다. 소박한 단청으로 표현한 소나무는 울퉁불퉁하게 올라간 노송이다. 창살이 이쁜 약사전 건물 앞에는 말끔하게 닦인 항아리가 이열종대로 서 있는 장독대가 놓여있다. 절집에 있는 장독대는 특별히 더 반갑다. 여염집 앞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다.

장독대에 앉아 보니 약사전 뒤에 대숲이 보인다. 대숲을 보니 다시 영화 생각이 난다.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이 처음으로 사랑이 싹틔운 장소가 대숲이었다. 물론 여기 천은사는 아니지만. 더군다나 보슬비 오는 늦여름의 대숲은 무료할 만큼 고요하기만 하다. 쏴아, 하고 소나기 내리는 소리 같은 대숲의 바람 소리는 들을 수 없는 날이다.

올라 올때 힐끗 쳐다보았던 계곡길로 내려선다. 대웅전 지나  석탑을 지나 절집을 지켜주듯 서 있는 석등을 지나쳐 누각을 빠져 나오니 오른편에 아담한 종탑이 서 있다. 문화재라는 안내문이 없는 걸로 보아 그냥 평범한 범종인 모양인데 크기는 그리 크지 않으나 꽤 잘생긴 이 종은 사람들이 한번쯤 쳐보곤 했나 보다. 종을 치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칠 생각이 없었는데 경고문을 보니 종을 한번 두드려보고 싶은 심보는 무엇인지. 그 마음을 들켰을까,

이곳에서 목백일홍을 만나게 될 줄이야
▲ 목백일홍 이곳에서 목백일홍을 만나게 될 줄이야
ⓒ 김선호

관련사진보기


절집을 벗어나는 곳에 유난히 예쁘게 핀 목백일홍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환청처럼 종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깊은 울림이 있는 두 번의 종소리. 뒤를 돌아서 본 범종은 침묵으로 서 있을 뿐이다. 

그나저나 목백일홍에 대한 내 상식이 여기서 혼돈을 일으킨다. 백일 동안 꽃이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여 '목백일홍'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꽃은 중부이남지방에 피는 꽃나무가 아니던가.

남도지방의 절집에 가게 되면 반드시 저 나무가 세월을 묵어 아름드리 서 있는 기억이 선명하다. 기후온난화가 목백일홍의 서식처를 추운 지방까지 확대시켰을까. 천은사의 목백일홍은 결코 적지 않은 세월을 건너온 아름드리 나무로 서 있으니 이 나무에 대한 내 상식이 아마도 잘못된 모양이었으나 어쨌든 반갑기 그지없다. 여기서 이 진홍의 꽃을 만나게 될 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 속에서 상우와 은수가 하룻밤을 묵어가던 절집 마당과 누마루가 천은사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밤 소리 없이 눈이 내렸다. 눈 내리는 소리를 따야 하는 상우는 그 깊은 밤을 기다려 눈이 내리는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절 마당으로 내려선다. 밤새 잠 못자고 뒤척이던 은수 또한 상우를 따라 절 마당에 내려서서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눈이 내리는 소리는 들을 수 없을 것이지만 영상으로는 그게 가능했다. 내가 '봄날은 간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것들 때문이다.

깊은 밤, 절 마당으로 내리는 눈은 내가 다녀온 천은사든, 영화의 진짜 배경이었던 '신흥사'든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영화 속 배경을 혼돈한 나를 위안하며 맹방해수욕장으로 향한다.

여름이면 동해안 어디든 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 동해안 여름이면 동해안 어디든 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 김선호

관련사진보기


동해안은 끝없이 해안선이 펼쳐져 사실은 어디를 가도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가졌다. 여름이면 동해안의 거의 전부가 해수욕장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은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은수와의 사랑에 빠진 상우는 맹방해수욕장의 모래밭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은수를 향해 노래를 불러준다. 소리를 채집하던 채집기는 마이크가 되어 상우 손에 들려 있다.

'이 생명 다 바쳐서 그토록 사랑했고
순정을 다 바쳐서 믿고 또 믿었건만
영원히 그 사람은 사랑해선 안될 사람...'

해수욕하는 사람보다 안전요원이 더 많았던 
저온현상의 맹방해수욕장
▲ 맹방해수욕장 해수욕하는 사람보다 안전요원이 더 많았던 저온현상의 맹방해수욕장
ⓒ 김선호

관련사진보기


사랑의 끝을 알 리가 없는 사랑에 빠진 상우는 이 노래가 자신의 경우가 될 줄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가 이 바다에서 노래를 하는 대목은 '말없이 가는 길에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후렴구가 나오기 전까지만이다. 나중에 홀로 남은 상우는 노래 책자를 사서 이 노래를 연습하고 끝까지 불러보지만 그때는 할머니 말씀대로 '떠나는 여자와 버스는 붙잡는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아 버린 후다.

'봄날처럼 사랑은 간다'고 감독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은수와 상우의 경우처럼 사랑은 오고 또 가는 것이라고. 맹방해수욕장에서 '이 생명 다바쳐서 사랑'하고 싶었던 여자에게 노래를 부르던 상우였던 유지태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은수였던 이영애를 떠올려본다.

순간, 동해안의 한 바닷가 '맹방해수욕장'은 또 다른 이름을 얻는다. 바다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모래 언덕엔 노란 갯채송화가 피어있고 그 너머엔 맹방해수욕장의 또 다른 상징이 된 채송화라 빨간 열매를 매달고 빠꼼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풍경도 예사롭지 않다.

태풍 모라꼿의 영향인지 푄 현상 때문인지 저온현상을 보인 동해안 맹방해수욕장엔 해수욕하는 사람들보다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며 바삐 뛰어다니는 안전요원들이 훨씬 더 많았다. 저 들의 수고가 참 많아서 안쓰럽기까지 하다. 영화 속에서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주었던 이 바닷가가 사람들로 북적였으면 좋겠다.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덧붙이는 글 | 8월 10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봄날은 간다, #천은사, #수국꽃, #맹방해수욕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