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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택지개발을 벌이고 있는 시흥시의 군자동 산22번지에 조선 중기의 문신인 박동량 선생의 묘가 있다. 박동량 선생은 1509년(선조 23)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조와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해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곁에 있게 하여 대중외교에 이바지하여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한다. 이듬해 도승지를 거쳐 1596년 이조참판이 되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정유재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호위해 황해도 수안에 진주, 민폐를 제거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살피기도 했다.

 

이어 경기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 전란 뒤의 민생회복에 힘을 기울였고,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2등으로 금계군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임명된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수릉관으로 3년간 수묘하고, 1611년(광해군 3)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선조 때 한응인-유영경-서성-신흠-허성 등과 함께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유교 7신'의 한 사람으로 광해군 때와 인조반정의 정치적 혼란기를 맞아 유배와 복관을 반복했다. 저서로는 <기재사초>, <기재잡기>, <방일유고> 등이 있고, 그림으로는 <계산초정도> <농가풍경도>가 있다.

 

주산 아래 묘역에는 아들 금양위 박미의 묘가 있고 신도비는 묘역으로부터 동부쪽으로 약 250m 떨어진 지점에 박미의 신도비와 함께 있다. 비문은 이조판서 김상헌이 짓고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썼고, 형조판서 민유증이 전자하였다 한다.

 

그런데 박동량 선생의 묘와 신도비 사이에는 어김없이 공장이 들어서 있고 도로건너 산처럼 치솟은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한마디로 좌청룡 우백호가 아니라, 좌공장 우파트라 할만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박동량, #시흥시, #택지개발,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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