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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등 예술계열 대학생들이 6월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이명박 정부가 국민들의 말할 권리를 막아 나선데 이어 문화예술에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문화예술을 정권의 도구화하려 하고 있다"며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등 예술계열 대학생들이 6월 10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이명박 정부가 국민들의 말할 권리를 막아 나선데 이어 문화예술에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문화예술을 정권의 도구화하려 하고 있다"며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 이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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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초중고교를 통틀어 반장, 하다못해 미화부장이나 줄반장이라도 한번쯤은 하게 마련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당시엔 선거로 반장을 뽑은 적이 거의 없었다. 우선 선생님이 유복한 집안에, 말 잘 들을만한 학생 하나를 호명해 세운다. 그리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아이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한다. "○○가 반장하면 어떨까?" 아이들은 별 말이 없다. 무응답은 곧 긍정의 표시. 곧이어 선생님은 아이들의 여론을 '반영'해 지목한 학생의 이름을 또박또박 칠판에 적어 내려간다.

'반장 ○○○'

이런 방식의 반장 선출은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반복되었다. 반장은 담임의 기대에 부응해 충실히 직무를 수행했고, 담임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떠든 아이 스무 명의 이름을 쪽지에 적어 내는 식으로 귀여움을 샀다. 학급 총원이 서른 명이었는데 말이다.

제6대 총장후보선출선거 개표 현황을 참관하다

지난 13일(월)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화부)의 표적 감사와 전임 황지우 총장의 사퇴로 치르게 된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제6대 총장후보선출선거 투표일이었다. 나는 한예종 학생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 일행과 함께 당일 저녁 8시부터 진행되는 개표 현황을 참관하기로 했다.

'한예종 총장후보 추천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배진환 미술원 교수, 이하 선관위)'의 서슬퍼런 규제와 감시 속에 학생들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것이 바로 개표 참관뿐이었기 때문이다.

한예종은 카이스트, 경찰대, 육사처럼 행정부처인 문화부에 직속된 특수전문학교로, 전임교원 이상 교수들의 직선으로 2인의 후보를 선출해 추천하고, 문화부 장관이 그 중 1인을 제청해 대통령이 총장을 임명하도록 되어 있다.

선거인이 교수들로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향후 한예종 구성원 전체를 대표하고 총괄할 총장 후보를 뽑는 절차임에도 불구하고, 선관위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선거과정 및 후보 4인에 대한 교수, 학생, 학부모, 동문, 교직원의 발언 일체를 엄격히 제한했고, 심지어 4인 후보들의 소견 발표회 참관조차 불허했었다.

그러나 개표 참관마저 여의치 않았다. 한예종 석관동 캠퍼스는 오후 8시를 기해 모든 출입문이 자동으로 잠기는 보안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출입증을 겸한 학생증을 소지해야만 출입이 가능하다. 개표가 진행된 도서관동 5층 영화전용관까지 통과해야 했던 문만 줄잡아 5개. 관우의 오관돌파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짓이람?

1차 투표 결과는 1위 박종원 후보, 2위 김남윤 후보

개표장 안에 들어서니 역시나, 각 후보 선거캠프에서 나온 듯 보이는 사람들만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선거관리 위원은 본 투표가 얼마나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되는지를 누누이 역설했고, 부재자 투표 또한 누가 어떤 후보를 찍었는지 결코 알 수 없도록 처리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이윽고 서너 개의 투표함을 개봉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투표용지를 테이블 위에 쏟아 부었다. 한 명의 개표위원이 표를 펼쳐 각 후보가 지명한 참관인들의 면전을 초속 30cm의 속도로 스쳐 보여주며 확인시킨 뒤 "○○○ 후보입니다"라고 외치는 식이다.

화이트보드에 正자의 한 획을 긋는 동안, 또다른 개표위원은 확인이 끝난 투표용지를 빨간 바구니에 담았다. '저렇게 해서 언제 끝내나?' 싶었지만 약 30여분 만에 개표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하긴, 선거인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140여명에 불과하니까.

개표위원이 주섬주섬 마지막 표를 펼쳤다. 결과는 총 투표 대상자 135명 중 유효투표 128표(기권 5표, 무효 2표), 1위 박종원 후보(64표), 2위 김남윤 후보(55표), 3위 허영일 후보(6표), 4위 임웅균 후보(3표). 선거관리위원들이 참관인들에게 선언했다.

"4인의 입후보자 모두가 과반수인 66표를 획득하는데 실패했으므로, 관련 규정에 의해 일주일 후인 7월 20일(월)에 2차 투표를 실시합니다."

"지지해준 외부인들에게는 죄송스러운 일"

한예종 교수협의회와 황지우 전 총장은 6월 2일 오전 한예종 석관동 캠퍼스 영상원에서 '황지우 총장 사퇴 수리 및 교수직 박탈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예종 교수협의회와 황지우 전 총장은 6월 2일 오전 한예종 석관동 캠퍼스 영상원에서 '황지우 총장 사퇴 수리 및 교수직 박탈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 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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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관인들 사이에선 안도감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탄성이 새어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낮게 깔린 구름 탓인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고인 빗물에 발을 적시며 걷고 있는데 일행 중 한 명이 말했다.

"지금까지 학교 외부에서 사태 해결을 위해 힘써주신 분들께 죄송스럽다. 한예종은 이제 공식적으로 쪽팔리게 된 셈"이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 냉정하고 침착한 척 하느라 애써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따위 얘기나 지껄였다.

강의동의 잠긴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담배를 피웠다. 교수들은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본격적인 반동, 퇴행의 시기가 도래한 것일까? 다른 이도 아니고, 우리 학교를 못잡아 먹어 안달하는 바로 그 세력에 동참했던 사람이 차기 총장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앞섰다.

내가 특정 후보의 총장 임명에 반대하는 것은 그의 이념적 경향성 때문이 아니다. (사)문화미래포럼이라는 문화계 뉴라이트 세력이 모교의 해체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때나마 뉴라이트에 몸담았던 당사자를 논리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도저히 총장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언뜻, 널찍한 판 하나가 뒷면을 드러낸 채 땅에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총장이 된다면", 비대위에서 밤새워 만든 게시물이다. 비 맞아도 번지지 말라고 시트까지 붙여놓았건만,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에 격리되어 있다. 학생들의 소박한 바람을 담은 이런 게시물 하나조차 선관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돌이켜 보면, 교수 협의회와 학생 비대위, 학부모 모임, 동문회, 교직원 노조로 구성된 '한예종 감사 사태 해결을 위한 연석회의'가 기자회견에서 선거에 관해 언급만 해도 선거 규정 위반이라며 몰아 세울 때도, 문화부의 이론과정 축소·폐지 방침에 맞서 황지우 전임 총장의 '명작 읽기' 등 한예종이 쌓아 온 인문학적 성과들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기획한 '자유예술대학'의 연기를 요청할 때도, 학내 제 구성원들의 총장 후보자 소견 발표회 참관 요청을 거부할 때도, 선관위는 공정한 선거 분위기 조성을 저해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었다.

덧붙여, 한예종의 교직원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문화부로부터 직접 파견된 공무원들과 기성회직으로 뽑힌 교직원들. 현재의 사태가 이론과 확대 부적정, 협동과정 서사창작과와 통섭교육 폐지, 소위 좌파 교수의 축출 등을 골자로 하는 부당한 감사로부터 촉발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주로 과장급에 포진해 있는 파견 공무원들이 문화부의 속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는 점은 자명하다.

더구나 신재민 문화부 차관이 서초동 교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파 정권 하에서는 우파 총장이 나와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점으로 미루어, 총무과장이 선관위 간사를 맡고 있는 현 선거관리 체계는 두고 두고 공평성 시비를 불러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무릇 모든 선거는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되어야 하며,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초적 형식 요건임은 두말 할 나위 없다. 그러나 선거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선거결과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학생들의 발언과 참여를 제한하고 봉쇄하는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원리에 비추어도 용납키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번 한예종 총장후보 추천 선거 과정에서 선관위와 학교본부가 드러낸 비민주적 행태와 몰상식한 대응은, 문화부의 감사로 촉발된 소위 '한예종 사태'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0일 2차 투표엔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투표함이 제대로 봉인되어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누구나 개표현황을 참관할 수 있다고 떠들면 뭐하나? 떠든 사람 이름 적어 담임에게 고발하는 게 총장의 책무가 아닐진대, 초등학교 반장 뽑듯 총장이 '임명'되어서야 될 말인가? 총장이 학내 제반 구성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렇게 취합된 총의를 기반으로 업무를 추진해 나갈 때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건 상식이다.

그런 총장만이 학내 구성원 모두의 힘을 모아 한예종이 현재 처한 위기 상황을 원만하게 타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처럼 명목뿐인 '공명선거'를 통해 국립예술대학인 한예종의 미래와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전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총장이 선출되게 된다는 점에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선거 결과에서 드러난대로 더이상 교수들의 이성적 상황인식 능력을 신뢰할 수 없게 된 현 시점에서, 이제 한예종 재학생들은 감사 사태의 해결 외에, 향후 실질적 학내민주화 쟁취라는 무거운 책무까지 홀로 도맡게 된 셈이다. 어느 종교라도 좋으니, 부디 신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 하길.


태그:#한예종, #문화체육관광부, #한예종사태, #표적감사, #한국예술종합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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