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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먹질 한 번 해본적 없는 내가 권투 글러브를 끼고 링에 올랐다.
 주먹질 한 번 해본적 없는 내가 권투 글러브를 끼고 링에 올랐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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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서 옷 갈아입으면 되고요, 신발은 가지고 왔어요?"
"옷도, 신발도 없는데요…."
"땀이 많이 날 텐데, 괜찮겠어요?"

헉, 분위기가 심상찮다. "복싱 한 번 해볼래? 간단하게 취재만 하면 돼"라는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터라, 갈아입을 운동복은커녕 신발 한 켤레 준비하지 않고 반바지에 티셔츠 달랑 걸치고 간 길이었다.

학창시절 체력장 5급, 복싱이나 제대로 하겠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3일, 홍수환 전 챔피언이 운영하는 S복싱체육관(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들어서자 그 내공이 살벌해서 나는 하마터면 발도 들이밀기 전에 튕겨 나올 뻔했다. 주먹이 허공을 '쉭쉭' 가르며 지나가고(절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호랑이도 잡아먹을 것 같은 심각한 표정의 남자들이 '떼거지'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줄넘기 소리가 '탁탁탁' 이어지는 좁은 공간을 나는 바짝 졸아든 장조림처럼 비슬비슬 통과했다.

 복싱 체육관. 진정 수컷들의 세상이다. 들어서자마자 분위기에 압도 당했다.
 복싱 체육관. 진정 수컷들의 세상이다. 들어서자마자 분위기에 압도 당했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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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유하. 진짜 솔직히 말하면, 운동에는 완전 '젬병'이다. 학창시절 체력장에서 5급 이상을 받아 본 적이 없고, 달리기는 만날 꼴찌. 몸으로 하는 모든 운동은 관심도 없고 잘하지도 못한다. 자전거도 못 탄다고 하면 할 말 다 한 걸까?

그런 나였으니 링 위에 오른 지 단 1분 만에 "내가 지금 복싱을 배우러 왔단 말야? 이건 좀 무린데?"라는 마음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신발도 빌려 신고, 팔에 붕대도 둘둘 감아봤지만 솟구쳐 오르는 두려움을 없애버리기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덜덜덜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있는데 1일 코치로 자처하고 나선 아마 복싱경력 10년차 이충섭 시민기자가 매섭게 나를 몰아세웠다.

"링 위로 올라와 봐요. 웃지 말고!"

아고, 웃지 말고, 라는 이 주문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더냐. 원래 잘 웃기도 하지만 굉장히 쑥스러울 때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3년 훈련해야 올라갈 수 있는 링, 난 하루 만에 올라갔다!

 붕대 감기부터 차근차근. 이때까지만 해도 마냥 즐거웠다. 왼쪽은 1일 코치 선생님 이충섭 시민기자.
 붕대 감기부터 차근차근. 이때까지만 해도 마냥 즐거웠다. 왼쪽은 1일 코치 선생님 이충섭 시민기자.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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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앗! 진짜 때리시려고요?"
 "앗! 진짜 때리시려고요?"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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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링에 오르려는데, 일단 링에 오르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멋들어지게 잘도 올라가던데, 나는 어느 틈으로 몸을 끼워 넣어야 될지 고민스러웠다. 엉덩이부터 슬쩍 끼워 넣었더니 참 폼도 안 났다.

이충섭 기자는 링에 올라오기까지 3년이 걸렸다며, 여긴 아무나 올라올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살펴보았지만 링 위에서 연습하는 사람은 없었고 전부 다 링 주위를 둘러싸고 줄넘기나 섀도우 복싱(허공에 주먹을 마구 휘두르는)을 하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걸 생각하니까 더 긴장이 되는지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나도 하면 한다고! 뭔가 알 수 없는 오기가 발동하여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배워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일단 기본자세는 이랬다. 다리를 어깨 너비만큼 벌리고 45도로 몸을 비틀어 선다. 몸은 그대로 두고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면서 손은 주먹을 쥐어서 얼굴 가까이에 댄다. 이때 주먹을 쥔 손의 손바닥이 앞을 보게 만들어야 한다.

말로 표현하면 쉬운데, 막상 해보면 팔이 자꾸 들리고, 어깨는 축축 처지고 자세를 고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기본자세를 하고 5분 정도 뛰다 보니 심장이 반응을 하기 시작했고, 동지섣달에 팥죽 먹은 귀신처럼 땀을 뻘뻘 흘려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힘든 복싱. 10분 만에 녹초가 돼버렸다.
 생각보다 힘든 복싱. 10분 만에 녹초가 돼버렸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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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변태야? 힘들긴 한데, 몸이 가뿐해지는 것 같아!

게다가 손을 신경 쓰면 발 스텝이 꼬여, 발을 신경 쓰면 '잽잽'이 안 돼, 저질 몸뚱이는 멀티플레이가 잘 안 됐다. 기본자세까지는 따라하겠는데, 글러브를 끼자 안 그래도 허약한 내 팔목은 물에 푹 절은 솜 주머니처럼 무거워졌다.

그러나 힘든 것과 반대로 몸은 조금씩 가뿐해지는 것 같은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 심장이 너무 뛴다 싶더니, 땀이 좀 나자 상쾌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운동의 쾌감? 더군다나 코치님이 들고 있는 주걱 미트에 주먹이 맞아서 몇 번 '팡팡'하고 경쾌한 소리가 나자 스트레스가 훨훨 날아가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스파링 앞두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모습. 어쩐지 스파링 할 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스파링 앞두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모습. 어쩐지 스파링 할 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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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하면 되었겠지 하고 괜히 혼자 만족해서 '어물쩡'거리고 있는데, 링에서 내려오라는 말 대신 코치님은 내 얼굴에 살포시 보호대를 끼워주셨다. 그걸 끼니까 얼굴이 꽉 조이는 게, 땀이 눈을 타고 흘러서 시야가 흐릿흐릿해졌다.

흐릿한 시선 사이로 누군가가 보였다. 두둥! 전 복싱챔피언이 링 위에 올라온 것이다. 2006년 슈퍼페더급 한국챔피언 백승원(25세, 17전 12승 5패) 코치였다. 말로만 듣던 '스파링'!

챔피언의 매서운 눈빛, 나 이러다 죽는 거 아냐?

▲ 체력장 5급 이유하 vs 전 한국 챔피언 백승원 복싱 경력 30분의 이유하와 한국 챔피언까지 올랐던 백승원 코치의 한 판 승부.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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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한국 챔피언 백승원 코치, 저 눈빛이 날 잡아먹을 듯 했다.
 전 한국 챔피언 백승원 코치, 저 눈빛이 날 잡아먹을 듯 했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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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그 눈빛에 나는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매서운 눈빛. 표정 없는 얼굴, 완벽한 자세. 그저 저쪽은 가만히 있을 테니 마음껏 때려보라고 했지만 나는 도대체 어디를 때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몇 대 때리려고 하니까 내 팔이 더 아프고 힘들었다.

헐렁이는 팔로 자꾸 헛방만 치다 보니까 내 자신이 무기력해지고, 링 밖으로 내려가고만 싶었다. 그래서 싸움에는 기선제압이 중요하구나. 그 상황에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빛이 번뜩하면서 그쪽이 공격을 시작했다. 공격이라 해봤자 어린아이 귀엽다고 머리 쓰다듬어 주는 수준이었지만 나는 또 당황했다. 도대체 어디를 막아야 하는 것일까. 전 방위로 파고드는 주먹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맞고 나자 이상하게도 다시 힘이 솟구쳤다. 그 야생의 하이에나 같은 눈빛을 일순 무시하고 나도 몇 대 때렸다. 아, 역시 때리니까 뭔가 시원했다. 사람의 본능이란 어쩔 수 없는 걸까?

30분 같은 3분 1라운드의 대결이 지나서야(그렇게 힘들었는데 고작! 고작! 3분이었다니!) 나의 '특훈(?)'은 끝이 났다. 몇 시간은 운동한 것 같았는데 시간을 보니 30~4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여자들은 '수다폭탄', 남자들은 '주먹 한 방'?

땀으로 범벅돼 산발이 다된 머리, 지워진 화장. 냄새 풀풀 나는 티셔츠를 그대로 껴입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복싱이 은근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단 다이어트 효과는 '직빵'일 것 같았다. 이렇게 땀이 많이 나는 전신 운동인데 지가 안 빠지고 배겨?

때리는 즐거움도 쏠쏠했다. 그래서 꼭 보면 옥탑방 사는 남자들의 '로망'이 옥상에 샌드백 걸어놓기인 걸까? 나는 워낙 운동을 싫어하지만, 무엇이든 몸으로 풀려는 단순한(?) 남자들의 세계를 조금 이해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만날 천날 요가 따위를 해봤자 진정한 수컷들의 세계를 체험할 수가 없다는 거다. 요런데 와 줘야 자세를 교정 받으면서 은근슬쩍 눈빛교환도 좀 해 주고, 옆구리도 한 번 찔러주고. 콩이든 팥이든 좀 볶아 먹을 텐데, 쩝.

아무튼 수컷들은 무서운 존재다.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풀다니. 여자들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수다폭탄'을 날릴 때, 남자들은 '주먹 한 방'을 날리는 걸까? 무엇이든 몸으로 부딪혀서 풀면 된단 말이지? 하긴 뭐 난 이제 복싱 배운 여자니까. 잘못 건드리면 '잽잽 원투' 들어간다! 각오하라고!

 '저질 체력'인 나를 혹독하게 훈련시키신 이충섭 코치님(좌)과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의 주인공 홍수환 관장님(우).
 '저질 체력'인 나를 혹독하게 훈련시키신 이충섭 코치님(좌)과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의 주인공 홍수환 관장님(우).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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