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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던 선생님의 말씀 하나.

"야, 지금이 네 인생 최고의 고비야. 여기만 넘으면 끝나. 지금이 네 인생을 결정한다. 놀고 싶으면 대학가서 실컷 놀아."

어리고 순진하던 난 그 말을 철석 같이 믿었다. '그래, 지금 이 언덕이 마지막이야. 앞으론 그저 내리막길을 편히 걸어가기만 하면 돼'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가면서 말이다.

그 결과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의 그럭저럭 괜찮은 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합격 통지를 받는 날, 난 진심으로 기뻤다.

대학생활 환상, 일주일 만에 다 깨졌다

연세대학교 총학생회는 5일 오후 2시 신촌캠퍼스 중앙도서관 앞에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연세대학교 총학생회는 5일 오후 2시 신촌캠퍼스 중앙도서관 앞에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 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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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나는 정해진 학교 공부의 틀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있을, 생기 넘치는 대학생의 모습을 기대했다. 사회 문제에도 적극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런 당당한 대학생활을 꿈꿨다. 어느 고등학생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대학생활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다.

"초중고 12년을 여기서 보상 받는구나! 이젠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과 공부를 하며 미래를 그려가기만 하면 돼!"

이렇게 외치며 당당하게 대학교 정문을 통과한 지 일주일도 안 돼 내 꿈과 환상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대학 내부의 풍경은 바깥에서 본 것과 무척 달랐다.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학점의 노예가 되어버린 대학생, 종로에 쇼핑 하러 가면서 차 막힌다고 촛불 시민을 욕하는 대학생, 사회문제엔 전혀 관심 없고 자기 주변으로만 시야가 좁혀져버린 이기적인 대학생, 관용·이해·예의 등 사회인이 갖추어야 할 요소를 하나도 갖추지 못한 채 몸만 커진 고등학생 같은 대학생.

그렇다. 지금은 대학생 위기의 시대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사회에 위기가 찾아올 때면 으레 등장하는 게 있다.

"시국선언? 우리 같은 1학년도 할 수 있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시국선언문을 작성했다. 우린 모두 올해 대학에 들어간 새내기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시국선언문을 작성했다. 우린 모두 올해 대학에 들어간 새내기다.
ⓒ 차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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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우리도 시국선언 해볼래?"

23일, 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만난 친구 2명 앞에서 불쑥 말을 꺼냈다.

"뭐, 뭘 해? 시국선언?"
"그게 뭔데?"
"간단히 말해서 우리사회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대책을 촉구하는 거야."
"우와, 어쩐지 엄청 귀찮을 거 같은데?"
"뉴스에서 얼핏 들은 거 같긴 한데 그거 교수님들만 하는 거 아냐? 우리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도 할 수 있어?"

의아해하며 친구가 물었다. 요 며칠 사이 뉴스에서 학생들도 시국선언을 한다고 들었다. 게다가 아줌마·아저씨에 고등학생까지 동참했다고 하니 우리라고 못 할까?

"아냐. 우리는 그냥 우리 나름대로 느낀 걸 사람들에게 말하면 되는 거야. 학생들은 물론 아줌마·아저씨들도 다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트렌드'나 '대세'라고 생각하면 되지. 우리도 동참해보자. 뭔가 요즘 대학교 가서 느끼는 문제없어?"

말을 꺼내자마자 한 녀석이 바로 대답한다.

"당연히 있어. 난 대학생들에게 불만을 느껴."
"구체적으로?"
"다들 취업도 힘들고 등록금 내기도 '빡세니까' 자기 취업이나 학점에만 관심이 있지 사회문제 등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단 말이지. 또 너무 과잉보호를 받으면서 자라서 그런지 대학생으로서의 의식 같은 것도 없는 것 같아."
"그래, 그걸 글로 풀어쓰면 그게 시국선언문이야. 어때, 해볼래?"

한참을 팔짱을 끼고 끙끙대더니 마침내 한 녀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번 해볼까?"
"그럴까?"

이렇게 어정쩡하게 시작된 시국선언문 쓰기. 사실 처음엔 나도 별로 자신이 없었다. 내가 제안해놓긴 했지만 막상 쓰려고 보니 너무나도 막막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던가. 셋이서 머리를 모 끙끙대니 어쩐지 끙끙대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술술 풀리는 듯했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만화. 이명박 대통령이 '요정'으로 등장한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만화. 이명박 대통령이 '요정'으로 등장한다.
ⓒ 인터넷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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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대학에 가서 느낀 점들을 털어놓다 보니 서로 대학은 다 달라도 피부에 와 닿는 문제는 결국 다 비슷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역시 취업난, 등록금 문제 등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대한민국 대학생의 문제인 것이다.

한 친구가 선언문 쓰는데 도움이 될 거라며 보여준 만화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청소년들의 정치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요정'으로 등장한다. "대학생들이 자기 앞가림에 급급해 사회 참여를 못하게 하기 위해 대통령이 일부러 경제를 어렵게 만든다"는 심상치 않은(?) 문구까지 나온다. 우리 셋의 입에선 "아하~ 어쩐지…"란 말이 절로 나왔다.

한 시간을 끙끙거리고 나니 뭔가 시국선언문 비슷한 것이 나오기는 했다. 비록 교수님들이 쓴 선언문처럼 완벽하진 못하다.

하지만 우리 나름의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다 보니 어쩐지 그 동안 어렴풋하게만 느껴지던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와 닿았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것이 한 번에 확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대학생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 사회에 있어 대학생이 가지는 역할 등에 다시 한 번 되살펴 볼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교수님들, 우리도 시국선언 했습니다. 잘했죠?"

'만년 고교생'이 만들어갈 미래, 끔찍하지 않은가?
- 대학 새내기의 시국선언문
대학은 과연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대학은 사회인이 되는 첫 관문이요, 지식의 상아탑이다. 마땅히 대학생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냄으로서 사회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어야 한다. 또 고등학교 시절까지 반강제로 유예당해야만 했던, '하고 싶은 공부'에 온 열정을 쏟음으로서 쓸모 있는 지식을 학습하고 그 지식을 사용해 인류번영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학은 대학생이 큰 걸음을 내딛는데 있어 적극적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또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은 무엇인가. 요즘의 대학광고 문구는 '대기업 취업률 90%', '취업에 유리한 문어발 동문' 따위가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도 취업을 위한 학점, 토익, 자격증에만 목을 맨다. 더 이상 우리의 선배들이 이룩해놓았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 건전한 대학문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학과 대학생만을 손가락질 할 것인가? 대학과 대학생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누구인가. 바로 사회이다. 지금의 사회는 어떤가?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등의 유행어가 떠돌고 88만원 세대, 청년 비정규직 등이 이미 낯설지 않게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게다가 졸업 이전에도 1년에 1000만 원을 넘는 살인적인 등록금을 내기 위해 아르바이트, 과외를 전전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한 학생은 등록금 때문에 한강 다리에서 투신해 자살했고, 등록금에 보태기 위해 사채 300만 원을 쓴 부녀가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경제적 걱정 없이 순수하게 학문에만 집중하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 의식 있는 일부 대학생들이 촛불시위에라도 참여할라치면 당장 경찰들이 몰려와서 잡아가고 대학에선 제적을 당한다. 어느 누가 감히 겁 없이 시위에 나가겠는가? 결국 우리는 대학에 진학했으나 대학생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전부 사회에 의해 저지당하고 있다. 자칫하다간 우린 건전한 사회인이나 미래사회의 주역은커녕 '만년 고등학생'으로 졸업하게 생겼다. 이런 자들이 만들어갈 대한민국, 끔찍하지 않은가?

이에 나는 감히 요구한다. 정부는 당장 대학교육을 정상화하라. 그리고 대학생들이 안심하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청년들에게 살길을 열어 달라.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실현해나갈 건전한 민주사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달라. 그것만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덮고 있는 암울한 검은 구름을 걷어주고 밝은 빛을 비춰줄 제대로 된 대학생들을 길러내는 길이다.

2009년 6월 23일 
대학 새내기 차제현, 김대현, 박준영

새내기 시국선언을 하며 대학생활을 돌아볼 수 있었다.
 새내기 시국선언을 하며 대학생활을 돌아볼 수 있었다.
ⓒ 차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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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시국선언, #대학생, #새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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