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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촌놈이다. 농촌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지금은 도시라는 언저리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2주에 한 번은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을 찾는다. 가서 텃밭의 땅을 파기도 하고 어머니와 상추를 뜯기도 한다. 요즘처럼 한창 모내기철이면 모판을 나르고 모판에 물을 주기도 한다. 예전처럼 논에 못자리를 하지 않은 덕에 거머리 뜯기며 모를 찌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모심기 도우미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랜만에 고향 냄새 진하게 마셨다. 예순을 넘긴 시인인 김용택의 산문집 <오래된 마을>을 통해서다. 김용택의 고향은 섬진강이 흐르는 임실의 진메 마을이다. 그곳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선생을 하였다. 시인이 돼서도, 선생이 돼서도 그는 줄곧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진메를 떠나지 않았다. 대부분 도시에서 선생 노릇하려고 하는데도 그는 한 번도 도시에서 선생을 하지 않고 고향을 지켰다. 삼진강을 지켰고 함께 늙어왔다. 그를 섬진강의 시인이라 부르는 이유가 섬진강 연작시를 쓰고 <섬진강>이란 시집을 낸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섬진강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섬진강 시인이란 호칭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고 보는 게 나을 성 싶다.

 

섬진강 하면 푸르고 맑은 강물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가로운 정경이 그려진다. 그러나 실상도 그럴까. 먼 곳에서 바라보면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가까이 깊게 바라보면 아픔이 실려있다. 시인의 고향 진메 마을도 마찬가지이다.

 

"삼실칠면의 장정들과 삼십 칠 명의 아낙들이 삼십칠 채의 지붕 아래 식구들을 거느리고 오백년을 살았던 마을에 다섯 명의 노인 내외와 홀로 사는 어머니들의 밤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멀고 얼마나 캄캄한가. 때로 적막이 마을을 덮는다. 버림받은 빈 집터, 허물어진 빈집의 부러진 서까래들, 묵어 산이 된 논과 밭 사이로 해와 달이 머물다 간다."

 

한때 37여 가구나 되었던 동네는 이제 12가구 정도 겨우 남았다. 젊은 친구들은 없고 노인들만이 동네를 지킨다. 그런데 이것이 진메 마을만의 일이겠는가. 요즘 귀농인구가 늘었다 하나 농촌의 젊다고 하는 일꾼들의 나이는 60이 넘은 사람들이다. 75세가 넘어도 삽 한 자루 들 힘만 있으면 논으로 밭으로 나간다. 그렇게라도 해야 살기 때문이다. 이게 농촌의 모습이다.

 

내가 살던 동네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동네 앞에 동진강 줄기가 흐르지만 강이라기 보단 냇가에 해당한다. 보이는 건 논뿐이다. 밭도 많지가 않다. 한때 100가구 정도 살았던 마을인데 이젠 50여 가구가 남았다. 대부분 노인들뿐이다. 며칠 전 모판 작업을 도와주러 갔는데 기병이 아제는 "우리 동네도 5년 지나면 고샅에서 사람 마주치기가 쉽지 않을 거여." 한다. 5년이 지나면 모두 땅속에 들어가거나 집밖에 나와 걸어 다닐 사람이 거의 없다는 소리이다.

 

"곡식을 다듬는 일이 금방 끝나면 할머니들은 또 정자에 앉아 가만히 산과 물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할머니들의 심심한 손을 나는 바라봅니다. 평생 땅을 파온, 성한 곳 없는 저 험한 손, 낫에 베이고, 호미에 찍히고, 불에 데이고, 가시에 찔리고, 돌멩이에 긁히고, 벌레에 물리고, 이렇게 아리고, 저렇게 곪아 터져 손톱이 빠지기를 몇 번 이었던가."

 

손은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한다. 긁히고 찍히고 베인 할머니들의 손은 내 어머니의 손이기도 하고 할머니의 손이기도 했다. 언젠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마사지를 해준 적이 있다. 마디마디가 굵었다. 검은 손가죽은 딱딱했고 축축 늘어졌다. 평생을 흙을 만지며 살아온 손은 그렇게 세월과 함께 늙어간 것이다.

 

김용택의 <오래된 마을>엔 오래된 사람들과 집들, 그리고 나무와 인정들이 시인의 섬세한 언어와 맛깔스런 언어로 그려져 있다. 글을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아련한 추억에 젖어들게 된다. 그렇다고 책속의 글들이 모두 고향의 풍경이나 생활만을 담은 건 아니다. 이 나라의 잘못된 교육 형태와 사회 현상도 비판하고 있다.

 

"나는 무섭습니다. 나라의 모든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려는, 모두 같은 방향으로 1등을 향해 달리는 이 무지한 질주가 가져올 필경이 무엇일지 나는 무서운 것입니다. 공부는 잘 하는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 외에 삶의 내용이 없는 지독한 개인주의와 배타주의와 이기주의와 독선주의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이웃에 대한 '온기 없는 무심주의'가 학교에서 길러진다는 것이 나는 무섭습니다."

 

그러면서 세계에 대한 고민 없는 '싸늘한 직업인'이 된 교사들을 볼 때마다 무섭다고도 말한다. 사실 교사의 역할은 단순한 지식을 전달하는데 그치면 안 된다.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줘야 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엄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근 40여 년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시인에게 작금의 교육의 모습과 교사들의 모습은 미래의 현실을 암울하게 한 것 같았다. 그래서 무섭다고 말한다.

 

인간사회의 가장 기본은 정이 있는 사랑이다. 사랑은 사람의 얼굴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의 얼굴을 찾기가 어렵다고 하며 아파하기도 한다.

 

시인은 오늘도 진메 마을에서 농촌의 현실을 고민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농촌의 모습을, 절벽의 난간에 서있는 농민들을 벼랑 아래로 밀어버리려 하는 오늘날의 농업 정책을 바라보며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오래된 마을>에 실린 글들을 전반적으로 따스하다. 사람 냄새가 난다. 훈짐이 있다. 시인이 가르쳤던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마을 할머니들의 이야길 통해서도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순두부처럼 고소하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벼우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편안한 글을 읽었다.

덧붙이는 글 | 김용택 산문집 <오래된 마을> / 한겨레출판 / 1만1000원


오래된 마을 - 김용택 산문집

김용택 지음, 한겨레출판(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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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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