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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수사를 받던 도중 갑작스러운 죽음을 택한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고인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은밀한 수사정보를 주고받으면서 피의자에게 모욕감을 주고 사건을 키우는 검찰과 언론의 행태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크다. 정치와 언론이 유착하는 시대를 지나 검찰과 언론의 유착이 빚어낸 '검언복합체'를 견제해야 한다는 게 비판론의 골자다. <오마이뉴스>는 3회에 걸쳐 '검언복합체'의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첫 회에서는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법조계 안팎의 의견을 들어봤다. [편집자말]
"피의사실 공표나 수사 내용의 생중계가 얼마나 힘들게 하는 것인지 드러났으니 검찰도 이제 고민해야 한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1일 <한겨레> 인터뷰)

"대검 이인규 중수부장 등은 노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고 수시로 언론에 밝히는 등 피의사실을 공표했다." (민주당이 2일 서울남부지검에 낸 고발장의 일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해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공표가 다시금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피의사실 공표와 알 권리의 충돌은 법조계의 해묵은 논쟁거리였지만,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되는 만큼 이제는 논란의 사회적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피의사실 공표 논란은 197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7월 28일 이규명 서울지검 검사가 반공법 위반 피고인 측으로부터 당시 돈 9만7000원 상당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서울형사지법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의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이 논란을 촉발시켰다.

훗날 '1차 사법파동'으로 불린 이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의 '수사 중단' 지시와 검사의 좌천성 인사로 마무리됐다.
▲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로 촉발된 판사들의 집단사표를 다룬 1971년 7월29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훗날 '1차 사법파동'으로 불린 이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의 '수사 중단' 지시와 검사의 좌천성 인사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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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견상 수뢰 사건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이 검찰을 이용해 반정부 인사들에게 호의적인 판결을 내리는 법원 판사들을 길들이려는 것이 사건의 본질이었다. 전국 판사 455명 중 153명의 판사들이 집단 사표를 내는 등 사건은 일파만파 커졌다.

38년 전의 검찰, 판사 구속시키려고 언론에 '수뢰' 영장 공개

특히 판사들은 검찰이 두 판사를 상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보다 검찰이 영장에 기재된 뇌물수수 내역을 언론에 공개한 것에 더 격분했다. 검찰이 작성한 영장에는 피고측 변호인이 판사들의 제주도 관광호텔 객실료와 식대는 물론, 수영복 값과 화투놀이 비용을 대준 것이 적혀 있었다.

판사 2명은 증인 신문차 제주도 출장을 갔다가 변호인으로부터 이러한 '편의'를 제공받았는데, 당대의 기준으로는 변호인이 판사들을 이 정도 대접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판사들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법원의 영장 발부를 압박하려던 검찰은 거센 비판 여론에 부딪혔고, 박정희 대통령이 신직수 법무장관에게 판사들에 대한 수사 중단을 지시하고 해당 검사를 좌천시키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판사들의 집단 사표와 전직 대통령의 죽음.

38년의 시차를 둔 두 사건에는 검찰이 피의자를 압박하는 방편으로 언론을 '활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검찰이 상대해야 할 피의자가 판사나 전직 대통령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물'일수록 언론플레이의 유혹은 더욱 커지고, 언론도 사건을 키우려는 저널리즘의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검찰의 '확성기' 역할을 하는 행태가 되풀이된 셈이다.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가 피해자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지기 전에 여론의 섣부른 단죄를 낳는다는 지적은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 때문에 1953년 제정형법에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처벌 조항(126조)이 만들어지고 1987년 개정헌법 27조 4항에는 형사피고인의 무죄 추정 원칙이 마련됐다. 경찰과 국가정보원 등이 형사사건 피의자의 자백 또는 주변 사람의 진술만을 근거로 언론사에 피의사실을 발표했다가 피의자에게 손해배상금을 물어준 판례도 있다.

형법에 처벌 조항 있는데도 피의사실 계속 공표되는 이유

그럼에도 검찰이 주요 범죄사건의 피의사실을 확인해주면 언론이 크게 보도하는 관행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이번에도 법무부는 사건관계인의 인권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 수사 브리핑 기준 ▲ 오보 또는 추측성 보도 문제 ▲ 수사상황 유출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수사공보제도 개선위원회를 발족시키겠다고 밝혔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비슷한 결과물들이 나오곤 했다.

제도를 새로 마련하는 것보다는 원칙을 지키겠다는 검찰의 의지가 더 중요한데, 최근 5년간 검찰이 피의사실 공표를 처벌한 예가 없다.

2일 최문순 민주당 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09년 4월까지 피의사실 공표와 관련해 116건의 사건이 접수됐지만 기소 처분이 내려진 건은 하나도 없다.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이 피의사실 공표에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명 피의자의 사생활과 국민의 알 권리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법원이 후자의 손을 들어준 판례도 많다. 2006년 4월 13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 16부가 개그맨 출신 사업가 주병진씨가 경찰관과 국가를 낸 소송에 대해 내린 판결이 최근의 대표적인 예다.

주씨는 2000년 성폭행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가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아낸 뒤 "경찰이 피의사실을 공표해 명예가 훼손됐다"고 소송을 냈다. 그러나 법원은 ▲ 국민들은 범죄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정당한 이익이 있고 ▲ 피고가 피의사실을 공표할 때 주씨의 혐의를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 또는 확증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 언론사 기자들이 경찰서로 몰려와 수사내용 공표를 강력하게 요구했고 ▲ 공표 방법이 주씨를 범죄자로 일방적으로 매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소송 청구를 기각했다.

이는 유명인의 명예 등 정신적 손해가 일부 인정된다고 해도 국민의 알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원칙을 재확인한 판결이었다.

법조계에서도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성향을 떠나 "세간의 논의가 피의사실 공표 자체를 터부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곤란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보수성향 법학자인 이상돈 중앙대 교수는 "언론이 검찰의 범죄 수사를 보도하지 못하면 자칫 검찰의 비밀수사를 용인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나는 오히려 언론에 과도하게 명예훼손 책임을 묻는 법 조항 때문에 우리나라 기자들이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처럼 진실을 파헤치는 일에 소극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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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서울대 법학과 교수도 "노무현 사건만을 놓고 보면 피의사실을 함부로 공표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타당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모든 범죄 사건을 보도해서는 안 된다는 일반화의 오류로 연결돼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박주민 변호사도 "발표 내용이 어느 정도 진실에 기초하거나 '알 권리 충족'이라는 명분이 있다면 피의사실 공표의 죄를 물을 수 없다는 판례들은 수없이 많다"며 "수사기관이 권력형 비리 수사를 안 하고 쉬쉬 덮으려고 할 때는 언론이 이를 폭로하는 보도를 해서 진실을 밝혀야 할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렇다고 해서 검찰과 언론의 잘못이 '묻히는' 것은 아니다.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을 한 차례 소환조사를 한 뒤에도 그의 신병 처리를 신속히 결정하지 않고 3주 이상 시간을 끌며 노 전 대통령을 압박하는 혐의 사실을 계속 흘린 것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구속 명분을 찾지 못한 검찰이 언론을 통한 여론 몰이에 나섰다"는 비판이 많다.

"일부 기자들, 검찰과 너무 가까운 나머지 스스로 수사기관으로 착각"

이 과정에서 드러난 검-언 유착을 바라보는 시선도 싸늘하다.

조국 서울대 교수는 "피의자를 수사하고 재판에서 유죄를 받아내야 할 검찰로서는 자신에게 유리하고 피의자에게 불리한 사실만 발표할 수밖에 없는데, 검찰과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스스로 수사기관으로 착각하는 기자들이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고 꼬집었다.

"법조 출입기자를 하다 보면 검사들과 술도 마시고 여러 가지 얘기도 듣게 되면서 검찰의 말을 많이 신뢰하는 심리 구조가 형성된다.

취재원(출입처)과 일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기자들의 기본 도리일 텐데, 검찰의 일부 출입기자들은 중요한 정보를 가진 취재원을 만나다 보니 일종의 유착 관계가 만들어지고 균형 있는 보도를 하지 않는 느낌이다.

반면, 변호인들과는 검사만큼 친분 관계가 쌓이지 않으니 기자들이 어느 쪽 말을 더 많이 듣겠나? 언론이 검찰 발표를 보도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피의자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언론계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법조계를 취재하는 일부 방송사 기자들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여론의 비난처럼 검찰 발표를 스피커마냥 확대 재생산하진 않았는지? 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채 특종에 눈이 멀어 사실을 과대포장하진 않았는지? 이런 자문에 떳떳하다고 말하진 못하겠다"(5월 24일 MBN 안형영), "내게 쥐어진 큰 칼을 무책임하게 휘둘러대지 않겠다"(5월 27일 SBS 김요한)는 자기고백 성격 글을 발표한 것도 과거에는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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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같은 흐름은 언론계의 '대세'가 되지는 못하고 있다. 워낙 특종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보니 전직 대통령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사그라지면 과거로 돌아갈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익명의 검찰 출입기자는 "지난주까지 노무현의 죽음을 애통해하다가도 이번 주부터는 박연차 게이트의 또 다른 축인 천신일씨의 혐의를 취재해야 하는 게 우리의 숙명"이라고 푸념했다.

이상돈 중앙대 교수는 "기자들이 명예훼손 소송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사기관 발표라는 안전판 뒤에 숨으려는 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이 교수는 "미국에는 법정에서 나온 얘기를 토대로 한 탐사보도 기사가 많은데, 우리나라 기자들은 재판 기사는 별로 없고 검찰 발표만 기다리는 경향이 강하다"며 "언론 보도가 바뀌려면 재판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피의자 = 죄인', '구속 = 단죄'로 간주하는 사회적 통념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태그:#이상돈, #노무현서거, #피의사실공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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