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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군 악양에 문을 연 동네문화예술학교인 '지리산학교'의 쟁쟁한 선생님들. 오른쪽부터 교장을 맡은 사진작가 이창수 교수, 화가 오치근, 시인 이원규, 목공예가 김용회씨 등이 인사를 하기 위해 서있다.
 경남 하동군 악양에 문을 연 동네문화예술학교인 '지리산학교'의 쟁쟁한 선생님들. 오른쪽부터 교장을 맡은 사진작가 이창수 교수, 화가 오치근, 시인 이원규, 목공예가 김용회씨 등이 인사를 하기 위해 서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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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식이 열린 악양면사무소 2층 강당 한켠엔 강사들의 작품이 전시됐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려거든>이 사잔작가 이창수의 작품 <지리산> 위에 섬진강처럼 흐르고 있다.
 입학식이 열린 악양면사무소 2층 강당 한켠엔 강사들의 작품이 전시됐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려거든>이 사잔작가 이창수의 작품 <지리산> 위에 섬진강처럼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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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동네주민들이 만든, 동네 문화예술아카데미 '지리산학교'

세상에 널린 게 학교다. 그러나 제대로 가르치는 학교는 드물다. 돌부리보다 많은 게 '선생'이다. 그러나 제대로 가르치는 선생은 드물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와 구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제대로 배우고 싶어 하고, 제대로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손 놓고 가만있지 않은 세상이 왔다는 것이다.

지난 9일 오후 3시. 경남 하동군 악양면사무소 2층 강당에서 한 학교의 입학식이 열렸다. 학교 이름은 '지리산학교'. 지리산학교는 지리산자락 악양에 눌러 살고 있는 시인·사진작가·화가·목공예가·산악인·음악인 등이 모여 만든 일종의 '동네 문화예술아카데미'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별난 예술인들은 지난해 12월엔 동네 주민들과 '동네밴드'를 구성해 폐교에서 첫 공연을 열기도 했다. 그래서 지리산학교는 주민들과 함께 문화예술을 공유하려는 '귀농 예술인들'과 '동네 원주민들'이 동네밴드의 성과를 이어간 측면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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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학교는 시문학반·그림반·기타반·목공예반·숲길 걷기반 등 모두 10개의 강좌로 구성돼 있다. 오는 7월까지 열리는 이번 학기에는 8개 강좌가 열리고, 모두 48명 학생이 공부 등록을 마쳤다. 옻칠반과 천연염색반은 오는 가을학기부터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

지리산학교의 '선생님'들은 누가 봐도 쟁쟁한 이력의 소유자들이다. 시문학반은 일찍이 시집 <적막>으로 잠자는 세상을 황홀하게 흔들어 놓았던 시인 박남준과 '지리산 시인'으로 유명한 시인 이원규가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숲길 걷기반은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여성 산악인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해발 7455m)에 오른 '산을 내려온 산악인' 남난희씨가 지리산 숲길 길라잡이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림반은 최근 백석의 동화시에 그림을 그려 만든 그림책 <오징어와 검복>을 펴낸 화가 오치근씨가 생활그림을 함께 그릴 예정이다.

지리산학교 교장을 맡은 이창수 순천대 겸임교수는 자신의 전공인 사진반을 운영한다. 동네밴드의 보컬이자 리더인 김선웅씨는 기타반을, 목공예가 김용회씨는 생활소품과 차도구를 만드는 목공예반을 맡았다. 그리고 도예가 류대원·안상흡씨는 도자기반을, 퀼트작가 안경임씨는 퀼트이불과 생활소품을 강의하는 퀼트반을 각각 책임졌다.

중요한 것은 강사 모두가 주민이고, 수강을 신청한 이들 중 절반이 넘는 이가 지리산권에 사는 주민이라는 것이다.

지리산학교 시문학반 강사인 박남준 시인이 자신의 시 <따뜻한 얼음>을 축시로 낭송하고 있다.
 지리산학교 시문학반 강사인 박남준 시인이 자신의 시 <따뜻한 얼음>을 축시로 낭송하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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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을 하고 있는 지리산학교 교장 이창수 교수. 사잔작가인 그는 지리산학교의 경험을 지역학교를 만드려는 이들에게 모두 제공하겠다고 밝히며 무엇보다 지역주민과의 유대감을 강조했다.
 인사말을 하고 있는 지리산학교 교장 이창수 교수. 사잔작가인 그는 지리산학교의 경험을 지역학교를 만드려는 이들에게 모두 제공하겠다고 밝히며 무엇보다 지역주민과의 유대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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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 교장 "주민의 삶과 함께 가면서 딱 반 발만 앞서가야 한다"

이창수 지리산학교 교장은 "(지역에서 자발적 문화예술학교가 만들어지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예술하는 사람들끼리 놀아서도 안되고, 이론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몇 차례에 걸쳐 강조했다. "주민의 삶과 함께 가고 주민과 함께 생활하면서 딱 반 발만 앞서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장이 '반 발만 앞서기'를 강조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흔히 귀농한 이들이나 시골마을로 작업터전을 옮긴 예술인들이 자기들끼리만 놀고 동네 원주민과 불화하다가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리산학교가 유달리 지역밀착형·주민밀착형을 강조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 교장은 "그 사람이 주민이건 아니건 간에 누군가가 간절히 무언가를 배우려 할 때 그것을 막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지리산학교에서는 단 한 명만 수강신청을 해도 강좌를 연다.

수업을 진행할 강사들의 의욕도 크다. 숲길 걷기반을 이끌 남난희씨는 학교 입학식에 맞춰 지리산 천왕봉에서 내려왔다. 지리산에 케이블카 설치하는 것을 반대하는 산악시위를 하고 있다가 내려온 것이다.

남씨는 "우선 어떤 분들이 내 수업을 신청했는지 면면을 봐야 알겠지만 걷는 게 목적이 아닌 명상과 함께 하는 숲길 걷기를 할 것"이라고 수업방식을 예고했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숲길을 걸으며 어느 땐 이 숲길을 걷고 있는 '내 발'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 생각을 나누고 또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우리 동네를 생각해보는 그런 걷기를 할 것"이라고 했다.

목공예반을 맡은 김용회 작가는 "한 명도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8명이나 신청했다"며 연신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웃었다. 그는 "이건 강사에게 의향도 물어보지도 않고 이창수 선생과 박남준 시인 등이 자기들끼리 다 결정해놓고 '너 해' 한다"고 농담을 하며 "그만큼 주민들과 유대가 깊고, 작가들끼리 다른 욕심 없이 어울리니까 지리산학교도 가능한 것"이라고 은근히 자랑했다.  

지리산학교 입학식엔 강사와 수강생, 축하객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조유행 경남 하동군수, 채영국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은 축하 말을 했다.

채현국 이사장 "씨알이 되려하지 말고 우리 거름이 되자"

지리산학교 선생들에게 "씨알이 되지 말고 거름이 되자"고 격려해 큰 박수를 받은 채현국 경남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 그는 민주화운동 시절 든든한 후원자로 기록되고 있는 인물이며, 강원도 원주와 경남 지역에서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고 있는 이다.
 지리산학교 선생들에게 "씨알이 되지 말고 거름이 되자"고 격려해 큰 박수를 받은 채현국 경남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 그는 민주화운동 시절 든든한 후원자로 기록되고 있는 인물이며, 강원도 원주와 경남 지역에서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고 있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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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후원자로 유명한 채현국 이사장은 "나는 고등학생만 800명이 넘는 큰 학교를 하고 있는데 너무 커서 늘 미안했다"며 "작으니까 정말 좋네, 참말로 좋네"하며 축하했다.

채 이사장은 강사진을 향해 자신이 살아온 민주화 과정을 은유하며 "씨알 되려 했더니 이것저것 너무 힘들더라, 씨알이 되려거나 씨알을 키우려고 하지 말고 선생님들은 거름이 되어라, 우리 거름이 되자"고 격려해 큰 박수를 받았다.

한편 이원규 시인은 "우리가 지리산학교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문의가 온다"며 "오늘 이 자리에도 제주도에서 한라산학교를 만들 준비하는 이들이 와있다"고 귀띔했다. 이 시인은 "전국 각지에서 지리산학교와 같은 지역학교가 만들어지면 교환특강도 하고, 정식교류도 할 것"이라고 즐거워했다.

박남준 시인은 "전국 마을마다 동네마다 뒷동산학교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면서 "욕심없이 시작하는 것이 좋다"며 악양 지리산학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참조하기를 충고했다.

이 교장도 "전국 각 지역에서 작은 지역학교를 열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며 "자기지역 실정에 맞게, 주민에게 반발만 앞서 가면 좋은 학교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또 "지역학교를 만드는 데 필요하다면 지리산학교를 만든 경험과 자료를 모두 내놓겠다"고 했다.

"수직적 문화가 아닌 수평적 문화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각 동네에서 지역에서 만들어진 작은 학교들이 연합해서 '열린 문화제'를 여는 날이 오도록 노력하는 것이 지금 우리 지리산학교가 반발 앞서간 학교로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태그:#지리산학교, #하동, #악양, #지리산,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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