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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때 한 권의 역사서를 읽으며 마음의 매무새를 가다듬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새겨보며 오늘의 현실을 냉철히 깨달아 현재의 삶과 앞으로 살아갈 진보적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꾸고 키우는 일은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E H 카아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의미와 그 해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즉 과거의 상황을 반추하여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고 보다 발전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 미래는 시간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연속적인 과정의 일부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러한 의미를 사뭇 생각하며 읽기에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책 한 권<조선왕조실록>(대교출판)을 골라 흥미롭게 읽었다.

간략하고 쉽게 쓰여진 청소년을 위한 역사책 한 권을 읽었다.
 간략하고 쉽게 쓰여진 청소년을 위한 역사책 한 권을 읽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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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10대 임금으로 왕위에 올랐다가 폐위된 연산군(1476년~1506년)의 일대기 부분을 읽으면서는 마치 당시의 상황이 오늘의 현실과 너무나도 흡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연산군의 이른바 '5대 폭정'을 열거해 기록해놓은 내용을 읽을 때는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편 내용에 기록된 '5대 폭정'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첫째, 연산군은 왕의 신분으로 '사초'를 보았다. 그러니까 대신들의 말과 행동을 비롯해 당대 인물들에 대한 평가와 왕의 품성과 사생활까지 사관이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해놓은 '사초'를 읽는다는 것은 왕일지라도 금기시되는 것인데, 그 금기를 깬 것이다.

즉 연산군은 세조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단종을 풍자하며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세조와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 김종직이 쓴 글(조의제문)을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김종직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사초'에 기록한 것을 빌미삼아 사람파(정적)를 무차별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둘째, 연산군은 자신을 반대하거나, 자신에게 충고를 하는 자들, 그리고 그 밖의 죄인들을 잔인하게 처벌하는 흉악한 짓을 일삼았다. 자신을 반대한 사람들을 처형하고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게 한 후, 만일 누군가가 그 시신을 수습했을 경우 이른바 '쇄골표풍'이라는 명을 내려 시행하도록 했다. '쇄골표풍'이란 매장된 시신을 파내고 해골을 가루처럼 잘게 부스러뜨려 바람에 날려 버리는 것이란 의미이니 가히 끔찍스럽다.

셋째, 연산군은 지금으로 말하면 정말 막무가내로 무식한 언론통제를 실시했다. 그는 자신을 반대하거나 충고하는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신언패'라는 패를 만들어 관리와 내관들 모두에게 차고 다니라고 명했다. '신언패'란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니 입은 다물고 혀는 깊이 간직하면 편하고 안전하리라'라는 글귀가 적힌 패를 일컬으니 이 또한 얼마나 괴이한 언론통제이자 잔혹한 폭력인가?

넷째,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는 연산군의 또 다른 폭정 행위 중 하나였다. '갑자사화' 이후 백성들이 왕실에 바치는 공물의 양을 대폭 증가시킨 것, 각종 명목의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게 한 것 등은 백성들에게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연산군과 그의 간신들은 왕실(권력자들)의 안위를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낸 간악한 일당이었다.

다섯째, 연산군은 '금표'를 확대해 당시 경기도 일대의 민가를 철거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금표'는 왕의 사냥터 입구마다 세워졌고 백성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표시였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금표가 세워진 곳은 백성들에게 죽음의 땅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서 하루아침에 거리로 쫓겨나 양식도 없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숫하게 많이 생겼다고 한다.

연산군은 재위기간 그렇게 잔혹하고 흉폭한 칼을 휘두르다 결국 중종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의 말로는 폐출된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되었으며,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3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나는 연산군일기를 읽는 도중 당시의 상황과 오늘의 현실이 매우 비슷한 공통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연산군 재위시절 순간순간의 장면들이 '오버랩'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후보시절부터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던 그, 자신을 사냥개처럼 충성하며 호위하는 수구 권력집단을 앞세워 반대하는 세력과 국민을 무차별적인 힘으로 밀어붙이는 그. 방통위와 KBS, YTN, OBS 등에 낙하산을 투하하여 자신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방송에서 지워버리려는 그. '미네르바'같은 인터넷 논객을 포함한 다수 국민들의 다양하고 자유로운 의견과 발언을 유언비어 유포로 몰아붙여 구속 탄압하는 그. 부동산 부자들로 친위를 구성하여 땅 많은 부자, 집 많은 부자들의 세금은 덜어주고, 가난한 서민들에겐 각종 생활고를 떠넘기고 있는 그. 재개발이란 명목으로 가난한 도시의 세입자 및 서민지역에 '금표'를 세우고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여 끔찍한 죽음의 참사를 초래케 한 그. 자신의 코드와 맞지 않는다 하여 보장된 임기를 채우기도 전에 각급 기관장들을 닥치는 대로 쫓아내고 있는 그. 만인에게 평등한 법과 공권력을 자신의 도구로 만들어 반대세력을 축출하는 데 혈안이 된 그. 국회를 장악한 다수의 일파들을 통해 그들의 장기집권 계획에 필요한 법안을 차근차근 만들어 가고 있는 노골적인 그.

그밖에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오늘의 무자비한 폭정의 작태를 떠올리며 나는 문득 연산군의 말로와 그의 말로가 겹쳐지는 듯한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그야말로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보고, 현재의 상황을 성찰하며 마음가짐을 단단히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장 맞닥뜨려야 할 다급한 현실과 암울한 미래를 생각하니 그가 불도저처럼 밀어붙일 폭정의 기운이 두렵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 일당을 통해 엄습해 오는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이며, 반통일적인 폭정을 단호히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말로를 국민들과 함께 꼭 지켜보고자 한다.


태그:#연산군, #연산군일기, #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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