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발히 활동하던 여배우가 어느 날 갑자기 운명을 달리한다면, 특히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한 여배우라면 심적으로 받게 되는 충격은 클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시기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고(故) 이은주 역시 나에게 그런 여배우다. 벌써 그녀가 세상을 등진 지 4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우리 곁에서 그녀를 추억하고 좋아하는 팬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의 빈 자리가 느껴지는 것은, 그녀가 작품으로 남아 여전히 팬들을 웃고 울게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최소한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여전히 그런 존재다.

4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녀가 그리운 건...

 드라마 <불새>에서의 이은주

드라마 <불새>에서의 이은주 ⓒ imbc

많은 사람들은 '이은주'하면 에릭과 함께 한 MBC드라마 <불새>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톱스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고, 그와 동시에 많은 팬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이제 그녀의 시대가 열릴 것 같은 그때, 그녀는 다른 선택을 했고, 많은 팬들은 충격을 받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처음 인터넷으로 그녀의 소식을 접하고 한동안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음 속에서 "왜?"라는 물음표만 계속 따라다녔다.

시간이 지나고 세상살이에 바빠 그녀에 대한 기억들이 가물가물해질 때쯤 보게 되는 그녀의 영화들은 남다른 감회를 줬다. '이은주 정말 연기 잘했는데, 지금 만약 그녀가 살아 있다면 어떤 연기자가 되었을까?' 이런 망상들이 나를 기쁘게 하기도 하고 때론 슬프게 하기도 한다.

이은주는 그 시기에 활동했던 배우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만의 '색'이 있는 여배우였다. 특히 꾸준히 작품에 출연하면서 자신의 가능성을 계속 시험한 여배우이기도 하다. 1998년에 데뷔했지만 실제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가 2000년부터임을 감안하면, 그녀는 세상을 떠난 2005년 2월22일까지 길지 않은 시간동안 14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정말 쉬지 않고 연기했다.

연기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녀가 얼마나 자신 스스로 연기에 욕심이 많았는지 출연한 작품 수만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오늘은 그녀가 남기고 간 작품들 중 영화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아끼는 그녀의 출연작 <번지 점프를 하다> <연애소설> 등은 여태껏 관람한 한국영화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다.

<오! 수정>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다!

 <오!수정>에서의 한 장면.

<오!수정>에서의 한 장면. ⓒ 미라신코리아


홍상수 감독은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년), <강원도의 힘>(1998년)으로 많은 영화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서 명맥이 거의 끊어진 새로운 작가주의 감독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실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는 소재를 자유자재로 풀어내는 감독의 능력은 영화평론가들의 관심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렇게 주목받던 홍상수 감독이 2000년에 연출한 작품이 <오! 수정>이다. 이은주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수정역을 맡았다. 영화는 현실적인 삼각관계에 대한 끝을 보여준다.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운명적으로 만나고 서로를 확인하게 되는 과정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이 작품은 관객들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개연성을 부여하면서 이 껄끄러운 연애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홍상수 감독이 보여준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현실적이면서도 속이 쓰린 이야기들이 잘 살아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은주보다 남자주인공으로 나온 정보석, 문성근의 연기가 빛난 작품이다. 연기 초년생이나 다름없던 이은주가 주인공을 맡기는 했지만 실제 두 남자 배우가 극을 이끌어간다고 보는 게 맞다. 그렇다고 해서 이은주 연기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녀는 이제 데뷔한 지 2년 조금 넘은 신인이라고 생각될 수 없을 만큼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그녀는 이 영화 전에 TV드라마 <카이스트>로 스타덤에 오른다. 하지만 연기자로서 과연 정말 발전 가능성이 있는지 객관적인 시선을 둘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평가할 때 그녀는 TV드라마 <카이스트>보다 영화 <오! 수정>에서 보여준 연기 때문에 더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오! 수정>은 이은주가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확실하게 보여준 작품이라 평가된다.

<오! 수정>은 2000년 제1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 작품상, 각본상, 제45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각본상, 53회 칸영화제 공식부분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면서 유명세를 얻게 된다.

<번지 점프를 하다> 영화계의 보석이 되다!

 <번지점프를 하다> 포스터.

<번지점프를 하다> 포스터. ⓒ 눈 엔터테인먼트(주)

개인적으로 <연애소설>이 없었다면 그녀가 출연한 영화 중에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꼽고 싶은 작품이다. 물론 작품성으로 따진다면 <오! 수정>을 선택해야겠지만 감정이 끌리는 영화를 꼽으라면 이 작품을 거론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운명적인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는 <번지 점프를 하다>는 이은주가 영화계에 보석 같은 여배우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다.

한국 영화가 기지개를 켜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이후 많은 여배우들이 등장했지만 확실하게 자신을 어필한 여배우는 드물었다.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여배우 혼자 출연해서 큰 티켓파워를 보여줄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최근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만큼은 여배우들이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었다. 최근 전도연이 눈부신 활약을 하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여전히 문소리, 전도연, 이영애, 전지현 정도를 제외하면 여배우가 영화를 통해 관객들을 불러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여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에 최초로 길을 열어준 배우는 이은주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다. 그리고 이은주가 이후 자신이 타이트롤이 되는 <하얀방> <하얀정원> 같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작품이 바로 <번지 점프를 하다>이다. 그녀에게 있어 이 작품은 항상 숙명 같이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영화다.

<연애소설> 이런 멜로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연애소설>에서의 이은주.

<연애소설>에서의 이은주. ⓒ 팝콘필름


그녀가 출연한 영화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DVD로도 수십 번 이상을 본 작품이다. 나에게 있어 이 작품은 한국멜로영화 명작이라 해도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만큼 개인적인 애착이 가득하다.

주연으로 지금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차태현, 손예진 그리고 이은주가 참여했다. 영화는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이 삼각관계 자체가 묘하다. 서로에게 느끼는 친구의 감정과 연인으로서의 감정이 교차하면서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올 수 있게 한다.

지환(차태현), 경희(이은주), 수인(손예진)은 병으로 수인이 죽기 전까지 서로에게 감정을 숨긴 채 친한 친구로 지낸다. 지환 역시 경희를 사랑했지만, 수인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친구가 되어준 경희를 오랫동안 남몰래 사랑하고 있었다. 수인과 경희는 친구로서 오랜 시간 모든 것을 나누었지만, 수인이 경희를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그 감정은 서로 숨길 수밖에 없었다.

지환 역시 경희를 사랑한다. 그리고 경희 역시 그의 마음을 눈치 채고 있지만 경희가 죽는 그날까지 자신의 사랑을 꼭꼭 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세 사람의 엇갈린 사랑이 관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작품이다.

특히 <연애소설>은 수인이 경희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란 것을 철저하게 숨겨놓으면서 관객들에게 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는지 갑론을박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였다. 처음 본다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놓치고 가기 쉬운 작품이다. 좋은 멜로 영화를 찾는 분들에게 필히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작품 중 한 편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주홍글씨> 그녀의 가치를 보여주다 

2004년은 이은주에게 너무나 특별한 한 해였다. 그녀가 주조연으로 출연한 영화 3편이 한 해 동안 개봉하였고, 최고의 톱스타반열에 오르게 해준 TV드라마 <불새> 역시 2004년에 나왔다.

그녀는 2004년 1월 <안녕! 유에프오>를 시작으로, 2월 <태극기 휘날리며>, 10월 <주홍글씨>까지 연속적으로 영화 개봉이 이루어지면서 그녀가 충무로에서 얼마나 주목받는 여배우인지 한눈에 알 수 있게 해주었다.

2004년 1월 개봉한 <안녕! 유에프오>는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영화평론가들 역시 이 작품에 악평을 했지만 이은주와 이범수의 매력이 물씬 묻어난 작품이다. 두 배우가 보여준 순수함은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해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장점이 다른 부분에서 접근하면 상당한 단점으로 작용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 영화는 무척이나 순수하다. 그래서 보는 시각에 따라 유치함이 숨어 있는 작품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유치함이 오히려 장점으로 바뀔 수 있는 점이 이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시각장애인 경우 역을 맡은 이은주는 순수하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인물을 잘 표현했다.

 <주홍글씨>에서의 고 이은주.

<주홍글씨>에서의 고 이은주. ⓒ LJ 필름


2004년 2월에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는 주연으로 출연한 장동건, 원빈이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그뿐만 아니라 <쉬리> 이후 다시 한국형 블록버스트 영화 가능성을 보여준 강제규 감독의 뛰어난 대중 감각 역시 눈에 띈 작품이다.

작품은 개봉 후 연일 최고관객동원 기록을 경신하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이은주는 이진태(장동건)가 사랑하는 영신 역을 맡아 영화에서 중요한 키포인트 역할을 소화했다. 남성적인 느낌이 강한 전쟁영화에서 주인공 진태가 결정적으로 자신의 이념마저 부정하며 다른 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인물을 잘 소화해냈다.

2004년 10월 개봉한 <주홍글씨>는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출연했던 작품이기에 실제 그녀의 비극적인 자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풍문일 뿐, 이 작품에서 그녀가 보여준 연기는 실질적인 여자 주인공이라고 해도 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녀는 이미 가정을 꾸미고 있는 이기훈(한석규)를 사랑하는 최가희 역을 맡았다. 이기훈은 이기적인 인물이다. 자신 말이라면 어떠한 것도 따르고 믿는 순종적인 아내 한수현(엄지원)이 있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의 아내보다 최가희의 매력에 더 빠져 있다. 그리고 치정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되는 지경희(성현아)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불륜 극은 점점 파국을 향해 달린다.

<주홍글씨>는 이기훈과 최가희의 미묘한 관계가 파국을 향해 달려가면서 보여주는 반전에 힘을 실은 스릴러물이었다. 이 작품은 복잡 미묘한 인물 최가희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영화 전체적인 완성도가 좌우될 만큼 그녀가 맡은 배역은 중요했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최상의 연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작품 완성도에 누를 끼치지 않을 만큼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차가운 매력과 감수성이 이 영화에서 잘 발휘되었다.

다만 김영하의 뛰어난 소설이 원작임에도 불구하고 원작에 전혀 다가서지 못한 연출력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다. 결국 이 작품의 실패는 어떻게 보면 원작이 존재하는 영화의 비애라고 할 수 있었다. 배우들이 보여준 연기가 크게 나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명확하지 않으면서 감독의 연출력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영화는 배우들의 예술이기도 하지만 실제 감독이 보여주는 역량이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아쉽기에 더 기억되는 배우 이은주

고 이은주, 그녀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영화들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았다. 이 외에도 큰 주목은 받지 못했지만,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던 영화 <하얀방>(2002), <하늘 정원>(2003)도 있었다.

언제나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으며 연기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 여배우, 아직 완전히 자신의 재능을 꽃 피운 것이 아니라 미래가 더 기대되던 여배우, 그녀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선택을 했고 우리 곁을 떠났다.

매년 그녀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들이 극장에서 관객들과 다시 만난다는 것은 연기자로서 영화배우로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재능을 다 꽃피우지 못하고 떠난 것에 대한 진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영화 최고의 멜로영화 중 한 편으로 언급하는 <번지 점프를 하다> <연애소설>에서 그녀의 모습은 앞으로 영원히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두 작품은 지금과 같은 감흥을 나에게 주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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