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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 강사 권김현영씨.
 여성학 강사 권김현영씨.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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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 전, 먼저 조주은씨가 쓴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페미니스트 혹은 여성주의자라고 자신을 밝히는 것은 주류 사회로부터 추방당할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다.(중략) 페미니스트는 남성도 때로는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성차별적인 사회, 여성의 경험이 배제되거나 왜곡되어 편파적으로 구성되는 사회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 남성들만 봐도 일단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운동권이고 못생긴 년들' '(못생긴 주제에) 깐깐하기까지 하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 '성적으로 지나치게 보수적이거나 성적으로 문란한 것들'이라는 감정적 낙인을 찍어두었다. 페미니스트는 서구 이론에 무분별하게 심취된 자유주의자, (중략) 상대편과 점잖게 협상하지 못하게 한쪽 귀를 닫은 채 자기 주장만 옳다고 우기는 싸움닭 취급 받는다."

마찬가지로, 멀리 갈 것도 없다. <오마이뉴스>에서도 페미니스트 혹은 여성주의자 관련 글이 실리면 악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달린다. 국경이 없는 온라인 공간에서도 페미니스트는 일종의 주홍글씨를 짊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오마이뉴스>는 페미니스트 권김현영(33·여성학 강사)씨와 인터뷰했다. 최근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그녀들의 목소리가 왜 필요하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용산 철거민 참사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두 가지 큰 일이 벌어졌다. 우선 강모씨 연쇄살인의 전모가 드러났고, 민주노총에서는 성폭력 사건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두 사건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점이다. 너무 식상한 추론인가? 하지만 연쇄살인과 성폭력의 피해자가 '거의' 여성이라는 점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사이코패스의 한 증상이란 역설적 주장도 있다. 타인의 감정과 상처에 공감을 못한다는 게 사이코패스의 특징이란 걸 감안한다면 이런 주장이 전혀 틀린 것도 아니다.

권김현영씨는 민주노총의 정규직 대규모 사업장 남성 노동자 중심성을 비판하며 "조직보위가 아닌 성폭력 사건이 어떤 과정을 통해 해결돼야 하고, 어떤 공통 윤리를 남길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권김씨는 "여성 그 중에서도 성매매 여성, 노인,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동정심을 갖지 못하는 우리 사회가 사이코패스와 무엇이 다르냐"며 연쇄살인을 막기 위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인터뷰는 강씨 연쇄살인 사건이 잠잠해지고, 민주노총 성폭력으로 논란이 일기 시작하던 지난 주말(7일) 서울 홍익대 앞에서 진행됐다. 아래는 권김현영씨와의 일문일답이다.

"민주노총 '남성중심성' 해결 안 하면 그 의미 잃어버릴 것"

여성학 강사 권김현영씨
 여성학 강사 권김현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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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이 성폭력 사건에 휘말렸고, 사건을 은폐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솔직히 노동계의 성폭력 논란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라 놀라거나 특별히 실망하지 않았다. 노동계 내의 성 불평등에 대해서는 여성들이 여러 차례 문제 제기를 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바뀐 게 하나도 없을까? 여전히 조직보위론에 음모론에 가해자 동정론과 피해자 음해까지… 돌아가는 논리가 똑같다.

성폭력 문제는 성적 스캔들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다. 여성을 동료로서 인정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민주노총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동네도 별 볼일 없이 똑같은 곳이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면 안 된다. 적어도 여기(진보진영)에서는 이런 문제(성폭력) 해결을 위해 논쟁적이면서도 공통의 윤리를 갖기 위한 장이 만들어졌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성폭력 문제는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문제는 그걸 어떤 식으로 해결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 민주노총의 강한 '남성성'이 바뀌지 않으면 문제는 또 터질 것이란 지적도 있다. 
"민주노총은 대단위 사업장, 정규직, 남성, 그것도 '가장' 중심의 조직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의 결정권이나 투쟁방식도 그들이 독점했다. 그들만의 세상을 너무 오랫동안 만들어 왔는데, 깊은 반성이 있었으면 한다. 남성중심성,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민주노총이라는 이름 자체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 것이다."

- 민주노총과 여성계는 그동안 소통을 많이 해왔나.
"소통이 있었다. 하지만 많이 실망하고 여성들이 나왔다. 과거 울산 현대자동차 식당 아줌마들의 해고와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밥,꽃,양>이 만들어졌을 때, 일부 남성 중심의 진보진영이 인권영화제에서 상영 못하게 한 일도 있었다.

민주노총 내부에서 성폭력 사건 있을 때 종종 가서 이야기 듣고 해결하려 했지만, 그 문제가 그들에게는 골치 아프고 사소한 문제로 치부됐다. 계속 문제제기를 하면 완전히 '마녀'가 된다. 어느 사회나 조직이든 성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 사건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해결했고, 어떤 방식을 통해 해결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민주노총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양자 간의 문제로 치부되고, 그런 방식으로 해결이 안 되면 희망이 없다는 식으로 정리되곤 했다. 이런 게 무슨 진보인가."

- 사실 남성 중심의 민주노총 힘은 최근 약해졌지만,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중심이 됐던 기륭전자, 이랜드, 그리고 KTX 등의 투쟁은 많은 지지와 일정한 성과도 거뒀다.
"기륭이나 이랜드에서 싸우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이들이 남성들에게 익숙한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이다'라는 식의 노동자 계급의식으로 무장돼 있다는 생각은 안 든다.

이 분들은 자신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사회에 던졌고,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함께 싸워나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협상도 해보고, 국회도 찾아가 보고, 시민들도 만나고, 파업과 집회도 조직하는 등 공공 영역에서 이야기하는 걸 배워나가고 있다. 이분들은 이전에는 단지 아줌마, 평범한 여성이었지만 이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하고 배우면서 서로 연대의 즐거움을 느꼈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희열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민주노총은 힘과 조직이 있다. 그래서 그걸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무너지면 지금의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즉 총파업을 하자는 식으로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까를 중심으로 생각하는데, 여성들은 그런 힘을 한 번도 가져보지도 못했고, 경험도 못했다. 여성들은 이제 다른 형태의 힘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다."

성폭력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석행 위원장을 포함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키로 한 9일 오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석한 간부들이 착잡한 표정으로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성폭력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석행 위원장을 포함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키로 한 9일 오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석한 간부들이 착잡한 표정으로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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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공개하고 공개 처형하자고?... 인권의식 더 떨어졌다"

- 강모씨 연쇄살인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가 많은 논의를 할 수 있었는데, 얼굴 공개 논란만 벌어졌다.
"얼굴 공개를 원하는 사람이 과연 누구였는지 의문이다. 여성들이 얼굴 공개를 원했을까? 거의 그렇지 않다고 본다. 2004년 유영철 사건 때도 그랬지만,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범인 얼굴을 보는 걸 불편해한다.

그 때 이후 인권의식이 더 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얼굴을 공개하고, 공개처형 해야 한다는 말도 서슴지 않은 사람도 있고. 한 사람에게 모든 사회적 문제를 덮어씌워서 그 사람을 없애면 된다는 식이다. 그런 식의 인권 침해 옳지 않고, 얼굴을 공개할 필요도 없다.

왜 범인 얼굴을 보려고 했을까. 얼굴을 보고 범죄의 모든 특성들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살인이나 성폭력은 누구나 겪을 수도 있는 사회적 범죄인데, 개인적 범죄로 여기고 그만을 처벌하면 된다는 인식이 있는 듯하다."

- 이번 사건 역시 원인은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사실 사이코패스라는 말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 동의어다. 말도 안 된다. 사이코패스는 윤리적 감정 이입 불가능한 상태를 말하는데, 개념적 완결성이 없는 말이다.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범인이 너무나 머리가 좋으면 편집증이라 하고, 혹은 주변 사람들과 사이가 나쁘면 히스테리 환자라 한다. 그리고 두 얼굴의 사나이면 이중인격자라고 하고… 사실 이게 아무 의미 없다.

1일 오후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범 강모씨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비눌치고개에서 부녀자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하는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1일 오후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범 강모씨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비눌치고개에서 부녀자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하는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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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사이코패스라며 개인의 문제로 돌리려 하는 건 사회적 불안이 반영된 결과다. 유영철 사건도 사이코패스로 분류됐는데, 그 사건은 성매매 여성들이 얼마나 사회 안전망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봐야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성매매 여성들의 아픔을 살피지 않았고, 그들의 인권을 고민하지 못했다. 이런 모습과 타인에게 감정 이입 못하고 도덕적 죄책감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와 무엇이 다른가."

- 연쇄살인의 희생자는 모두 여성이고 사회적 약자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걸 사회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용산 참사를 보면서 한국 사회가 참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과거 장안동 성매매 지역 재개발 문제로 성매매 종사 여성 1명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용산참사와 비슷한 애도심이나 문제의식을 불러오지 못했다. 똑같이 사람이 죽었는데 다르게 기억된다. 연쇄살인범은 여성, 그 중에서도 성매매 여성들을 많이 노린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 건지는 전혀 논의되지 않는다.

"사이코패스보다 무서운 건 여성을 인간 이하로 보는 사회 시선"

- 얼굴 공개 논란도 있었는데, 사건을 보도한 언론을 어떻게 평가하나.
"'여자만 보면, 살인 충돌을 느꼈다'는 기사 제목이 나왔는데, 이게 얼마나 여성에게는 충격인지 아는가? 그렇다고 그런 신문들이 왜 범인이 그런 마음을 먹게 됐는지 분석을 안 해준다. 그냥 사이코패스란다.

가령 어떤 언론이, '한국인만 보면 살인 충돌이 느껴진다'는 어느 외국인의 목소리를 보도했다고 치자. 그 보도에서 그들이 왜 한국인을 해치고 싶어 하는지 설명을 안 해주면 얼마나 웃긴가."

- 여성이 물리적 힘이 약하기 때문에 희생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여성 살해의 동기가 힘이 약해서? 그건 아니다. 강씨 사건을 잠시 살펴보자. 어떤 희생자 부모들은 너무 절실하게 '우리 딸은 아무 남자 차에 타는 사람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왜 그런 '명예'에 집착했을까.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 남자 차에 타는 여성'이 되는 순간 사회적 애도와 연민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희생자의 부모님들도 그걸 의식하고 분해하셨던 것 일 것이다. '그런 여자'로 취급되는 순간, 즉 아무 남자 차에 타는 여자가 되는 것은 두 번 죽는 일이다. 성매매 여성들이 사회적 참사 사건으로 희생되면 그 유족들이 당당하게 나서는 걸 봤나? 그리고 그녀들은 사회적 애도의 대상이 되지도 못한다.

우리 사회는 어떤 특정 여성들의 희생에 대해 감정 이입이나 애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감정이 연쇄살인범에게도 작동하고, '어떤 여자는 죽여도 되는구나' 하는 인식을 갖게 한다. 신체적 차이가 아닌, 혹은 사이코 패스가 아니라 이렇게 특정 여성 혹은 사회적 약자를 인간 이하로 보는 사회의 시선이 살인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고 본다."


태그:#민주노총 성폭력, #연쇄살인, #권김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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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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