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늘(10일)은 제 32번째 생일입니다.

요즘 두통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는 어제 병원에 다녀오시면서 쇠고기를 사와서는, 잠들기 전에 묵은 미역을 불려놓았고 아침에 쇠고기 미역국을 끓여내셨습니다. 제가 태어나 처음 맛본 어머니의 젖을 닮은 바다의 젖을 품은 미역국을 말입니다.

느직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 겸 해서 사발에 밥을 푹 담아서는 식은 미역국을 얹어 밥술을 떠넣었습니다. 만화 <식객>에서 묘사한 그 깊은 맛은 느낄 수 없었지만, 미역국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습니다. 아들 자식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남들처럼 번듯한 일자리가 있어 돈을 많이 벌어오는 것도 아니고, 서른이 넘었는데도 결혼할 생각도 안 하고 말입니다.

아무튼 매해 찾아오는 제 생일은 늘 이런식입니다. 생일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와서 케이크나 외식, 술자리 같은 것도 제가 원치 않아, 통장에서 얼마의 돈을 찾아 어머니께 필요할 때 쓰시라고 여느 때보다 좀더 용돈을 건네는 것으로 생일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밥 한 사발 가득 퍼담아 식은 미역국을 얹어 먹었다.
 밥 한 사발 가득 퍼담아 식은 미역국을 얹어 먹었다.
ⓒ 이장연

관련사진보기


분홍바늘꽃처럼 피어난 세계인권선언 60년

그리고 제 생일인 오늘은 세계인권선언일이기도 합니다.

올해로 60년이나 되었다고 하네요. 

1948년 12월 10일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분홍바늘꽃'처럼 피어난 한줄기 생명이자 희망인 세계인권선언. 폭력과 전쟁에 대한 혐오, 반성 속에서 평화에 대한 염원이 만들어낸 국제사회의 최소한의 합의라고 합니다.

선언은 전문과 30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맨 앞의 2개 조항이 선언의 대전제가 됩니다. 모든 인간이 보편적인 평등을 공유한다는 것과 이러한 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을 둔다는 것으로, 인권은 어떤 이유로도 누구에게도 부정돼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3조부터 21조까지는 생명권, 공정한 재판, 언론의 자유, 프라이버시 등 시민·정치적 권리를 규정하고 있고, 22조부터 27조까지는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노동권 등 인간 생활 유지에 필수불가별한 측면을 다룬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28조에서 30조까지는 위에서 열거된 권리의 향유를 위한 사회적 및 국제적 구조, 인권에 부합되는 공동체의 의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날을 맞아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사랑 이벤트, 세계인권선언 교육 캠페인, 세계인권선언 60만 읽기 캠페인 등을 벌이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와 달리 인권단체와 활동가들이 준비한 2008인권선언 행사도 서울 청계광장에서 오후 2시부터 저녁 7시 촛불문화제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자전거로 찾아가기에는 거리가 있어 가보지는 못하지만, 지난 촛불정국에서 두드러진 저항권과 연대권의 새로운 의미와 문제의식으로 '2008인권선언'을 재구성하려는 이들의 노력에 지지와 응원을 보냅니다.

모든 사람은 선언에 제시된 권리가 완전히 실현되도록 연대할 권리가 있다. 연대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존엄함을 실현하는 권리이다. / 인권을 유린하는 압제 정치와 사회 구조에 맞서 저항하는 것은 고귀하고 정당한 권리이다.

* 세계인권선언문 http://udhr60.humanrights.go.kr/02_sub/body01.jsp

국가인권위원회의 세계인권선언 캠페인
 국가인권위원회의 세계인권선언 캠페인
ⓒ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 화면캡쳐

관련사진보기


명예훼손 사과와 표현·양심·언론의 자유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이렇게 뜻깊은 날, 제게는 큰 걱정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지난 3월 말 뒤늦게 접한, 지금은 사라진 KBS2TV 시사투나잇과 그외 언론보도, 인터넷과 블로고스피어에서 본 '진성고 UCC'와 관련해 1000명의 학생인권과 학교민주화에 양심껏 공명한 것 때문에, 학원측으로부터 정보통신망법 위반에 따른 명예훼손죄로 서울고등검찰청에 형사기소된 사건 때문입니다.

지난 5월 경찰 참고인 조사 이후 수원지방검찰청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고소인은 검찰에 항소해 지난 12월 2일 인천지방검찰청에서 재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조사를 받으면서 안 것이지만, 명예훼손죄가 사실을 말해도 죄가 될 수 있다고 하고 검찰이 또다시 무혐의 처분을 내려도 고소인 측에서 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할 경우 대법원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안이라고 하더군요. 공소시효가 10년이나 됩니다.

어쨌든 진성학원측이 말하는 '근거없는 비난'이나 '악의적인 음해'를 하려고 '진성고 UCC'를 블로그에 올리고, 입시위주의 교육현실이나 사학재단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고 또다시 답하고, 진성고나 진성학원과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공익을 위해 양심과 표현·언론의 자유 그리고 학생·청소년 인권, 학교민주화를 위해 관심을 가져달라는 진성고 학생들의 외침에 화답한 개인(블로거)을 법원의 판결이 나지 않음에도 죄인 취급하는 것은 도리어 문제가 있다고 항변하고 볼테르의 유명한 말로 진술을 마쳤습니다.

인천지방검찰청
 인천지방검찰청
ⓒ 이장연

관련사진보기


조사를 마친 후 학생인권침해로 문제시된 진성학원의 명예와 개인(블로거)의 양심·표현·언론의 자유와 권리가 상호 충돌되는 사안이라서 검찰도 결국 법리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합의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왔습니다.

7개월간 경찰과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고소인과 연락을 취해 고소철회를 요청한 적도 없고, 법원에서 유죄 판결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연락을 취하는 것도 제 입장에서는 고려할 대상이 아니라 합의할 의향이 있는지 어떤지는 고소인측에서 의향이 있는지 확인하는게 먼저가 아니냐고 답했습니다. 이후 안 것이지만 저뿐만 아니라 다른 네티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진성학원은 그와 합의를 보았다고 합니다.

인천지방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은 뒤 지난 8일(월) 검사실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합의할 의향을 다시 물어왔고 만약 있다면 고소인측에 연락을 취해 물어보겠다고 했습니다. 고소철회가 이뤄지지 않는 이상 이래저래 마찬가지라서 그렇게 해주십사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왔고 내일(11일) 오후 2시에 고소인과 담당 검사실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정말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무엇보다 고소인측이 어떤 합의조건으로 무엇을 요구할지도 모르는 상황(게시글 삭제?)에서 명예훼손에 대한 사과부터 하고 합의를 부탁할 것인지? 아니면 표현·양심·언론의 자유와 학생인권문제 등을 말하며 고소철회의 의미와 정당성을 요구할 것인지 말입니다. 이 두가지 질문에 어떤 지혜로운 답을 내놓아야 할지 난감해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세계인권선언
 세계인권선언
ⓒ 국가인권위원회

관련사진보기


어제도 이 문제로 머리가 복잡해 하루종일 블로깅에 매진했는데도, 고소인과 만날 내일이 점점 다가오자 무엇을 위해 합의를 볼 것인지? 합의를 보지 않을 경우, 내게 불리·불편한 것은 무엇인지? 형사기소가 되든 재정신청으로 법원에 사건이 넘어갔을 경우,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등등의 답답한 질문들만 더 많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다 세계인권선언의 각 조항들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그리고 왜 지금껏 진성고 UCC와 학생인권문제를 그동안 다뤄왔는지 곱씹어봤습니다. 역시 답은 이미 나와있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 때문에 그 답을 회피하고 있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일(11일) 고소인과 어떤 합의가 이뤄질지,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합의는 원치 않습니다.

제8조 모든 사람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당했을 때, 해당 국가 법원에 의해 효과적으로 구제받을 권리가 있다.
제 10조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범죄인지 아닌지를 판별받을 때, 독립적으로 공평한 법정에서 공평하고 공개적인 심문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제12조 개인의 프라이버시, 가족, 주택, 통신에 의해 타인이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의 명예와 평판에 대해서도 타인이 침해해서는 안 된다.
제18조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제19조 모든 사람은 의사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제30조 이 선언에서 말한 어떤 권리와 자유도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남의 권리를 파괴할 목적으로 자기 권리를 사용할 권리는 없다.

11월 15일자 한겨레, 감사원 내부고발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되어 10년간 재판을 받아오다 대법원에서 무혐의 판결을 받은 현준희님의 사연.
 11월 15일자 한겨레, 감사원 내부고발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되어 10년간 재판을 받아오다 대법원에서 무혐의 판결을 받은 현준희님의 사연.
ⓒ 한겨레신문 지면 캡쳐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 1996년 효산종합개발 콘도사업 특혜 의혹에 대한 감사 과정에서 청와대의 지시로 감사가 중단되었다는 의혹을 폭로하여 감사원으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된 현준희님께서 12년 재판 끝에 지난 11월 14일 대법원으로부터 최종 무죄판결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12년이란 세월동안 재판정을 드나들며 자신의 양심과 사회정의를 위해 맞서온 현준희 선생님께 존경의 인사를 올립니다.

"우리사회에서는 내면에 숨겨져 있는 사실을 밝혀낸 대가로 온갖 소송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공익제보자, 언론인, 시민활동가 등 우리사회는 아직도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99%의 진실을 말하더라도 1%의 오보가 있으면 수십억의 소송과 형사고발을 당하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심지어 100% 진실이라도 소송은 걸린다. 숨겨진 사실을 세상에 폭로할 때는 많은 사람들은 환호하지만 그 뒤에는 길고 외로운 소송이 기다리고 있다."



태그:#세계인권선언, #국가인권위원회, #생일, #미역국, #진성학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