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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땀도 별로 흘리지 않고 유유자적 여유로운 산행이 될 거야.”

“해발 오백 미터가 조금 넘는 산이면 혹시 너무 싱거운 산행 아닐까?”

 

전국 100대 명산을 찾아서 44번째 산인 경남 고성의 연화산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일행들은 저마다 오늘 산행에 대한 느긋한 상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연화산은 근래 들어 찾은 가장 낮은 산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에 참가한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네 시간을 달려 도착한 원동에서 시작한 산행은 처음부터 진땀이 흘렀습니다.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은 마을 안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숨이 턱턱 막히는 힘든 길이었습니다.

 

마을을 지나자 밤나무 밭길이 이어졌습니다. 잠깐 평탄한 길이 나타났으나 곧 급경사 오르막길이 팍팍한 다리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대부분 초행인 등산객들이 너도나도 겉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날씨까지 포근하여 흐르는 땀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참고 올라가자고, 여긴 급경사라 조금 힘들긴 하지만 그래봤자 오백 미터 산인 걸, 얼마나 힘들겠어? 곧 능선에만 오르면 그 다음부터는 룰루랄라일거야.”

 

낮은산이라 얕잡아보고 올라가다 큰 코 다치다

 

모두들 그렇게 믿고 참으며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30여분 만에 첫 번째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남산이었습니다. 해발 427미터, 모두들 어이없는 표정들입니다. 겨우 4백여 미터를 올라오며 그렇게 힘들어하다니.

 

“주변을 한 번 살펴봐? 저 봉우리들이 오늘 우리가 모두 넘어야할 봉우리인 것 같은데.”

잠깐 땀을 들인 후 주변을 둘러보던 일행들이 놀라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가운데 골짜기를 중심으로 빙 둘러 늘어선 봉우리들이 태산처럼 높아보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봉우리들은 능선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뾰족한 삼각형을 세워 놓은 것처럼 뾰족뾰족 솟아 있는 봉우리들이 결코 만만한 모습이 아니었지요. 당장 우리들이 발을 디디고 서있는 남산에서 다음 봉우리로 가기 위해서는 급경사 길을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낮은 산이라고 얕볼 산이 아니었는데 그랬구먼. 마음 단단히 먹고 새롭게 시작해야 되겠어.”

 

일행들이 마음을 다잡고 다음 봉우리를 향해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산길은 매우 좋았습니다. 바윗길은 거의 없고 흙길이어서 느낌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힘들어 하는 일행들 때문에 뒤처지다 보니 우리는 맨 후미그룹이었습니다. 우리 일행 네 명 뒤엔 여성 등산객 한 명이 따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남산에서 우리 일행들의 사진을 찍어준 사람도 우리와 함께 후미 그룹이 된 이 여성이었습니다.

 

네 남자와 내 남자, 재미있는 농담 따먹기하며 가파른 산을 오르다

 

얕잡아 보았던 산이라 처음에 힘들어 했던 일행들도 마음을 고쳐먹으니 그리 힘들지 않은지 여유 있게 산을 내려갔습니다. 길이 좋았고 내리막길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내려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네 남자를 앞세우고 산길을 걸으니 기분이 매우 좋은데요.”

“????”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맨 뒤에서 우리들을 따르고 있는 40대 초반의 여성이었습니다.

 

“내 남잡니까? 네 남잡니까? 발음을 정확히 하셔야지요. 듣는 쪽이 헷갈립니다.”

일행이 뒤쪽을 돌아보며 농담을 합니다. 나이차이가 많아서 실없는 농담을 할 수가 없었는데 여성 쪽에서 먼저 농담을 시작했기 때문에 부담이 없었나 봅니다.

 

“네, 든든한 남자 네 분을 앞세우고 걸어가노라니 기분이 좋다고요? 네 남자, 내 남자, 알아서 받아들이세요, 호호호.”

 

이 여성은 네 남자라는 호칭에 대한 뉘앙스를 이미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던가 봅니다. 다시 한 번 네 남자와 내 남자라는 발음에 악센트를 주고 있었으니까요.

 

“젊은 여성이 먼저 농담 따먹기를 시작 하니까 산길이 한결 부드러운 느낌인 걸 허허허.”

 

힘들어 하던 일행이 모처럼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내려간 곳이 황새고개였습니다. 그런데 황새고개에 당도한 일행 한 사람이 다음 봉우리를 도저히 못 올라가겠다며 옥천사로 내려가겠다고 합니다. 전날 밤 과음해서 아침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할 수 없이 일행 한 사람을 미리 내려 보내고 가파른 오르막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황새고개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후미대장이 우리들과 동행이 되었습니다.

 

“한 분이 빠져서 아쉬웠는데 잘 됐네요. 네(?) 남자는 변함이 없으니까요, 호호호.”

 

역시 뒤를 따르던 여성 등산객이었습니다.

 

“아하! 무슨 말인가 했더니 한 분이 빠져서 세 남자가 됐는데 내가 끼어서 네 남자가 됐다는 말이군요, 설마 내 남자라고 소유권 주장하는 건 아니겠죠?”

후미대장이 금방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고 농담에 끼어든 것입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며 ‘네 남자와 내 남자’가 화두가 되어 농담을 주고받다보니 어렵지 않게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꼭대기엔 작은 돌탑과 표지석 한 개가 세워져 있었지요. 연화산 정상이었습니다. 해발 528미터, 육산에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능선길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가파르게 솟아 있는 봉우리들이 등산객들을 지치게 하는 산이었습니다.

 

다음봉우리로 가는 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역시 골짜기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봉우리가 제1연화봉, 일명 매봉이라는 봉우리였지요. 역시 가파른 길을 허위허위 올라가니 정상 가까이 작은 돌탑들이 세워져 있고 제법 넓은 꼭대기에도 표지석과 돌탑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뾰족뾰족한 세 개의 봉우리를 거쳐 내려가는 길은 다시 오른편이었습니다. 한 바퀴를 빙 돌아 내려가는 형세였지요. 그렇게 한 참을 내려가자 암자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지붕 기왓골에 노란 은행나무 잎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골짜기 중앙에 있는 옥천사의 암자 중 하나인 백련암이었습니다.

 

둥그런 연꽃 산세 가운데 안긴 꽃술 같은 천년고찰 옥천사

 

암자엔 나이든 보살 한사람과 강아지 한 마리가 토방에 나란히 앉아 드나드는 사람들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한가한 모습입니다. 플라스틱 표주박으로 시원한 샘물 한 번 퍼마시고 앞뜰로 나섰습니다. 법당문은 닫혀있고 바로 옆 요사채 앞엔 빨간 열매가 촘촘히 열린 나무 한 그루와 마당가에 널어 말리는 곶감이 싱그럽습니다.

 

백련암을 둘러보고 잠간 내려오자 옥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왼편 넓은 마당에 홀로 서있는 건물은 천개의 작은 불상들이 빼곡하게 안치되어 있는 천불전이었습니다. 옥천사 앞마당엔 ‘연화산 옥천수’라는 표지석을 등에 얹은 커다란 돌거북 입에서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습니다.

 

신라 문무왕 10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은 대웅전 뒤편에서 구슬 같이 맑은 물이 솟아 나와 옥천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절입니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3교구 쌍계사의 말사지만 절의 규모는 오히려 쌍계사보다 크고 웅장한 모습이었습니다.

 

백련암과 청련암, 연대암 등 세 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린 옥천사는 창건 이래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듭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고승인 진경국사와 고려 때의 고승 진각국사가 이 절에서 기거하며 수학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승병들이 군영으로 사용한 호국사찰입니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이르자 노승 한 분이 합장을 하며 맞아 줍니다. 대웅전 앞마당에 들어서자 오래된 당간지주 몇 개가 서있고 앞쪽에 고색창연한 대웅전이 웅장한 모습입니다. 마당은 사각형이었습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와 앞에도 건물이 세워져 있어서 성벽에 감싸인 모습 같았습니다.

 

아주 특이한 건물은 마당 건너 대웅전 맞은편에 있는 자방루였습니다. 자방루는 정면이 7칸, 측면이 3칸인 5량 구조의 팔작지붕 익공계 건물이었습니다. 건물 안은 각 칸마다 중앙에 기둥을 세우지 않고 하나씩 걸러서 모두 4개의 높고 큰 기둥을 한 줄로 세운 것이었습니다.

 

건물내부는 칸마다 벽이 없어서 훤하게 열려있는 길쭉하고 커다란 단일공간으로 되어 있고, 바닥은 누마루로 되어 있었지요. 이 자방루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건물로 일설에는 이처럼 대규모로 세워진 것은 종교적 의미와 용도 외에 호국사찰의 역할을 하기 위해 국가에서 지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1733년 영조9년부터 1842년 헌종 8년까지 이 사찰에는 340여개의 군정이 주둔했으며, 12개의 건물과 12개의  물레방아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 절 참 대단한 절이구먼, 그리고 절터가 정말 명당이야 명당, 연화산이 둥그런 연꽃잎이라면 그 중심 꽃술자리가 바로 이곳이잖아?”

일행 한 사람이 마치 풍수지리에 일가견이라도 있는 것처럼 절터 명당론을 펼쳤습니다.

 

“연꽃잎의 꽃술이라? 정말 그런 것 같아, 연화산은 분명히 연꽃잎 같은 모양이고, 그 한가운데 이 절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분명해.”

 

일행들의 느낌과 시각은 거의 같았습니다. 실제로 연화산이라는 이름도 연꽃과 비슷한 모양이어서 지어진 이름이고 보면 일행들이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옥천사 앞마당 가에는 범종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종각 앞에는 불사를 위한 기와가 쌓여 있었지요, 마당 끝에 있는 계단을 내려오면 곧 사천왕문이 나타납니다. 사천왕 문 안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옛날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 누구라도 이곳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는 장소였습니다.

 

계곡에는 벌거벗은 나목들 사이에 철늦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새빨간 잎으로 치장한 채 저 홀로 외로운 초겨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연꽃잎 모양의 연화산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서는 꽃술 자리에 서있는 천년고찰 옥천사가 단풍잎처럼 고운 모습으로 스치듯 지나치는 등산객들을 전송하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연화산, #옥천사, #천년고찰, #네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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