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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으로 본 세계화와 민족주의>를 읽기 전, '민족주의'라는 어휘에 대해서 나는 부정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중국의 언어와 역사,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배우는 나는 근자에 위협적으로 노정되고 있는 '중화민족주의'가 자연스레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눈으로 본 세계화와 민족주의
 우리 눈으로 본 세계화와 민족주의
ⓒ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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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적으로 티베트의 자유를 외치던 시민단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욕설을 일삼던 새빨간 오성홍기 아래 결집한 중국인들의 새빨간 모습은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남의 나라 한복판에서 경찰을 폭행하고, 취재기자들에게 삿대질을 하는 저열하고 과도한 집단적 광기는 '문화강국'을 자부하는 중국의 강퍅한 자화상이었다.

"나는 무엇 무엇에 반대한다"는 논변이 '문법적 착각'에서 기인했다는 문화평론가 진중권의 견해에 동의하기에 "나는 중화민족주의에 반대한다"는 단선적인 주장을 전개할 생각은 없다. '중화민족주의' 자체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며 그 정당한 민족정신에 대해서 내가 왈가왈부할 계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나는 타민족에게 큰 위협을 느끼게 하는 과잉된 중화 민족주의를 반대한다"는 사견(私見)은 논리적으로 큰 하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잉된 중화민족주의를 반대"하기 위해서는 타당하고 적실한 논거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김영명 교수의 이 책은 내게 민족주의에 대한 지난한 논의에 긴요한 단초를 제공했다. 중화민족주의에 대해서 논할 때, 항상 부딪히는 모순은 한국의 민족주의 역시 쉽게 과열되고 비이성적으로 변질되는 측면이 엄존하는 점이었다.

김영명 교수는 강대국과 약소국의 민족주의를 분리해서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위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소해준다. 중국의 민족주의가 폭압적인 소수민족정책, 군사비 부문 과다 지출 등으로 대변되는 팽창주의의 일환으로서의 민족주의라면, 약소국 한국의 민족주의는 분명 그것과 구분이 된다. 피의자와 피해자 관계로 비유하면 한국은 피해자로서의 저항과 생존의 민족주의고 중국과 같은 강대국은 피의자로서의 팽창과 탐욕의 민족주의인 것이다. 고로 중화주의에 대한 비판의 화살이 한국의 반일시위, 반미시위 등으로 돌아오는 것은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강대국'에 대한 의미 규정이 간단하지만은 않다. 중국은 분명 G8 선진 8개국의 모임에도 포함되지 않고, 30년 전만 해도 땅덩어리만 큰 빈국에 다름 아니었다. 허나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연평균 두 자리 성장률을 기록한 중국은 현재 2조원에 육박하는 외환보유고를 이용해 세계 경제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고 무역규모는 미국, 일본에 이어 3위 그리고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는 UN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을 맡고 있는 등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국은 현재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와있다. 따라서 김영명 교수가 분류한 강대국의 범주에 중국은 속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폭력적인 양태로 치닫는 중국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면, 되돌아오는 반박의 기제는 몇 가지로 항상 정해져있다. 중국은 아직 강대국이 아니라는 주장, 고로 다른 강대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약한 나라끼리 연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김영명 교수의 주견(主見)인데 한국이 중국을 비판하는 것은 이와 상충된다는 것. 그리고 조금 더 양보해 중국은 아직 '과도기'라는 주장, 적빈에 시달리던 힘 빠진 호랑이에서 성장한지 얼마 안 됐는데 중국의 민족주의를 미국, 일본의 팽창주의와 등가비교 하는 것을 무리라고 보는 견해. 또한 언필칭 '중국식'이라는 고전적 레토릭의 마법. '중국식 사회주의', '중국식 개혁·개방' 등등 궁지에 몰릴 때는 항상 '중국식'이라 강변한다.

일견 그럴싸해 보이는 논거도 존재하지만, 대개가 논리적인 자가당착의 늪에 빠져있다. 중국과 근린국가인 한국의 국민으로서, 중국이라는 대상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자기모순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들을 건져내고자 한다. 이런 고차원적인 민족주의를 백범 김구 선생은 '사해동포주의'라 하지 않았던가.

항상 불리할 때만 스스로 강대국이 아니라고 하는 중국

중국은 항상 자신들이 불리할 때만 스스로 강대국이 아니라고 한다. 미국의 위안화 절상 요구에 대한 대응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약소국으로 깎아내린다. 겸손을 넘어서는 마조히즘적 자기비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권을 주장하고자 할 때는 자신들도 이제 경제적으로 성장했으니 강대국으로 우대해달라고 요구한다. 얼마 전까지 약소국이라 자처했던 나라가 갑자기 강대국이라 참칭하는 것이다.

또한 '과도기'와 '중국식'이라는 케케묵은 수사법. 중국은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부터 30년 동안 항상 자신들의 현 상황을 과도기라 표현했다. 앞으로도 당분간 과도기라 주장할 것 같다. 그럼 중국이 말하는 과도기 상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그 끝은 언제이고 어디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기실, '과도기'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것은 지극히 유아적인 발상에 불과하다. 프랑스의 저명한 문화비평가 기 소르망 박사는 "과도기는 무기연기와 동의어이며 영원한 알리바이이다."라고 갈파한 바 있다.

'중국식'이라는 전근대적 어법도 '과도기'에 대한 기 소르망의 비판으로 충분히 설명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중국식'이라는 수사법은 자신들이 불리할 때만 사용하는 얄팍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반발하는 티베트인들의 대항은 '티베트식'이므로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아야 그들 주장의 선후관계와 인과관계가 들어맞는 것 아닌가.

중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고찰을 해봤으니, 무엇보다 중차대한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해봐야 한다. 우선, 중국의 사례에서 반면교사를 얻을 수 있다.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서는 안 될 것이다. 김영명 교수는 이를 "정념적 민족주의"라 표현한 바 있다. 그렇다고 이 말이 민족주의가 약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체인데, 정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극복하고 구체적으로 '정책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민족'이 은폐되어야 했던, 더 적나라하게 말한다면 36년간 '민족'이 부재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역사에서 '민족주의'의 약화를 주장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진정으로 지켜야할 숭고한 가치를 지키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를 또 다시 범하는 꼴이 된다.

서구 특수한 시각을 약소국이 받아들이는 것은 통탄할 일

또한 김 교수는 서구 몇몇 국가의 '특수한' 시각이 세계의 '보편적'인 사상으로 둔갑한 현실을 힐난한다. 서구에서 직조된 일체의 보편적 이념을 약소국에 투사하는 것은 현대판 오리엔탈리즘이다. 가장 아이러니하고 동시에 통탄할 일은 그런 서구의 시각을 식민지 지배 경험이 있던 약소국(한국)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점이다. 소위 식자층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치명타가 아닐 수 없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뒤쳐지지 말자며 시장만능주의에 도취되어 민족주의의 지양과 신자유주의의 지향을 외치는 자들이 있다. 보통 일부 사이비 우익진영에서 주로 사용하는 이념공세인데, 김 교수의 표현대로 "사대주의자 또는 국가주의 세력"으로 이들에게 아이덴티티(?)를 부여할 필요를 느끼는 바이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민족에 대해 설파한 다음의 글귀는 민족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민족주의는 낡은 이념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민족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통일의 과제가 남아 있고, 미국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간섭의 문제가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한 민족이 문화적 정체성을 갖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몇 푼의 효율성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을 지워버리는 것이야말로 인류문화에 대한 테러다."

"중화의 자부심"을 외치며 이웃 나라의 거리를 점거하고 난동을 부리는 극단의 중화주의는 배격해야 마땅하다. 허나 평화적이고 이성적이며 동시에 구체적으로 정책화되는 방향으로 한국의 민족주의가 나아간다면 민족주의는 더 이상 구시대의 산물이 아닌 새 시대를 여는 축복이요 선물이 될 것이라 사료된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양분법에서 어쩔 수 없이 후자에 속하는 한국, 민족주의의 방향과 정체성에 대하여 고민하는 이들에게 <우리 눈으로 본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일독을 권한다.


우리 눈으로 본 세계화와 민족주의

김영명 지음, 오름(2002)


태그:#민족주의, #내셔널리즘, #세계화, #신자유주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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