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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관에서 본 여수. 여순사건 때 인민대회가 열렸던 곳이 지척이고, 진압군의 진압이 한창일 때는 불바다를 이룬 현장이다. 멀리 돌산대교가 보인다.
▲ 여수 시가지. 진남관에서 본 여수. 여순사건 때 인민대회가 열렸던 곳이 지척이고, 진압군의 진압이 한창일 때는 불바다를 이룬 현장이다. 멀리 돌산대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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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에 다녀온 게 고작 열흘 전의 일인데도 아주 오래 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열흘 전 남도 끝자락에 있는 여수는 아직 단풍도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열흘 사이 내가 사는 마을엔 시월이 가고 낙엽이 지더니, 어제와 오늘 아침엔 무서리와 함께 얼음도 얼었다.

애써 외면하며 살았던 여수 "미안하다 동백꽃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요즘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분주한 시절이라는 핑계를 대며 여수에서 듣고 보았던 신음하는 땅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그게 어디 나뿐이던가. 이 땅을 살아가는 숱한 이들이 '불온과 반란의 땅, 여수'라는 꼬리표를 어쩌지 못해 그 시절의 진실을 외면해 왔다. 그러하니 당연히 우리의 찬란했던 역사도 지난 60년을 침묵으로, 혹은 건들면 불씨라도 살아날까 싶어 여수와 순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말 없음의 고통'에 대해 귀를 닫고 눈을 감았다.

그랬다.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잊고 싶었다. 그래야만 내 정신의 불온을 떨쳐 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가 배워서 알고 있는 '반란의 땅' 여수에서 만난 이들의 처연한 눈빛과 그들이 태생부터 받아온 '불온의 고통' 만큼은 외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마흔을 넘는 생애 동안 몇 차례 여수를 다녀왔다. 그럴 때마다 내 행선지는 돌산도에 있는 향일암이었다. 어떤 날은 여수의 야경을 보기 위해 돌산대교 아래에 있는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를 들이키는 일이 전부였고, 그 일도 하지 못할 땐 오동도에 들러 검붉게 떨어지는 동백을 카메라에 담고선 서둘러 여수를 떠났다.

언젠가는 '여수'라는 이름의 여주인공을 등장시켜 소설로 쓴 적이 있었으나 그때에도 여수는 그저 사람의 이름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여수가 안고 있는 상처를 외면했고,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어떤 것이 있을까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일제가 수상비행장을 건설하던 중 완공을 앞두고 패망을 하자 미군정청이 인수했고, 이후 국방경비대 14연대가 주둔했다. 사건 후 제15 육군병원이 설치되었다가 결핵환자 자활촌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 이후 한국화약공장이 입주해있다.
▲ 여순사건 발발 장소. 일제가 수상비행장을 건설하던 중 완공을 앞두고 패망을 하자 미군정청이 인수했고, 이후 국방경비대 14연대가 주둔했다. 사건 후 제15 육군병원이 설치되었다가 결핵환자 자활촌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 이후 한국화약공장이 입주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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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병기고. 제주로 파병되는 군인들에겐 미군이 준 신식무기가 지급되어 있었다.
▲ 병기고.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병기고. 제주로 파병되는 군인들에겐 미군이 준 신식무기가 지급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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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여수를 찾았다. 여수가 진정 반란의 땅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지난 10월 25일 여수에선 1박2일 일정으로 한국문학평화포럼(회장 김영현)이 주관하는 '여순사건 60주기 문학예술제'가 열린다기에 먼 길을 마다하고 일행이 되어 버스에 올랐다.

여순사건으로 숨져간 무고한 양민은 1만명이 넘어

그날의 행사는 여순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심포지엄과 문학축전, 그리고 다음 날로 이어지는 여순 유적지 답사가 있었다. 그 고단하고 먼 여행길에서 나는 여수와 순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진액이 어떤 색으로 남아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기도 전에 피는
여수 동백은 언제나 불온의 바닷가
북소리 찢겨 울던 신월리 산언덕을 향해서 핀다

60년 세월에 묻혀버린 신월리 그 이름은
어둔 달빛에 젖은 상처가 아니라
우리가 기어이 이루어야 할 해방과
화해와 신원의 이름,

그해 시월 폭죽처럼 터져버린 신월리 그 이름은
신화의 그늘에 덮인 영욕이 아니라
우리가 꼭 이루어야 할 통일과
평화와 상생의 이름

저기 흰 바다 검은 절벽에
눈부신 한 무리 선홍빛,
아직도 흰 붕대를 풀지 못한 여수 동백은
해마다 시월이 오면 후드득, 후드득,
생모가지 통째로
붉은 울음을 운다.
- 나종영 시 '여수 동백' 중에서

여수 동백이 왜 검붉은 피처럼 진하고 독한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순신 장군이 시누대로 화살대를 만들어 왜구와 싸웠다는 말만 전해지는 여수 오동도의 동백이 왜 그렇게 서럽게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는지도 짐작이 갔다.

해마다 시월이 오면 생모가지를 통째로 떨구며 붉은 울음을 우는 곳인 여수. 그 여수를 우리는 '반란의 땅'이라며 금기시했다. 여수 사람들도 여순 사건을 겪으며 '나서면 다친다'는 말로 스스로를 단속하고 자위했다. 그 결과 여순사건은 아직까지 누구도 풀 수 없는 숙제처럼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여순사건을 이해 하려면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와 국민 중 사회주의 지지자가 80%나 되었다는 그때의 국내정세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니 2008년 현재의 사상과 이념으로는 언죽번죽도 어렵다. 그나마 '여순반란사건'에서 '여순사건'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하지만 '사건'은 그야말로 '해결하지 못한 사건'일 뿐이다.

1만명에 가까운 양민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던 땅. 여수에서 '사건'의 열쇠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 보였지만, 60년이 지나도록 어느 누구 그 열쇠를 선뜻 발견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혹여 흉하게 아물어 가던 상처가 덧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었다.

해방정국의 대한민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미군정청이 남쪽 땅을 지배하면서 벌어진 혼란은 친일파들의 득세와 궤를 함께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제 백성을 쥐잡듯 했던 친일 경찰들이 경력자 우대가 되어 다시 경찰복을 입었고, 마땅히 지난 일을 참회하며 숨죽이고 살아야 할 인사들이 다시 고관대작이 되어 일제 때 보다 더 큰 소리로 백성의 심장을 유린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인 김종원이 일본도로 양민의 목을 치던 종산국민학교이다. 학교로 걸어들어간 이들 중에서 살아서 나온 이가 없다고 한다. 모든 게 바뀌었지만 운동장 귀퉁이에 있는 늙은 플라타너스만 지난 일을 기억하고 있다.
▲ "부역자를 찾아라!" 학교를 배경으로 당시의 일을 설명하고 있는 연구소 관계자. 일본군 하사관 출신인 김종원이 일본도로 양민의 목을 치던 종산국민학교이다. 학교로 걸어들어간 이들 중에서 살아서 나온 이가 없다고 한다. 모든 게 바뀌었지만 운동장 귀퉁이에 있는 늙은 플라타너스만 지난 일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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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으로 숨져간 형제가 잠들어 있는 '형제묘'의 묘비. 묘비의 크기가 애기 무덤처럼 작다.
▲ 넋들의 묘. 여순사건으로 숨져간 형제가 잠들어 있는 '형제묘'의 묘비. 묘비의 크기가 애기 무덤처럼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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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의 발단은 1948년 4월 3일 발발한 제주 '4·3항쟁'. 제주에 민중 봉기가 일어나자 정부는 진압을 위해 여수에 있던 14연대를 제주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 14연대 병력들은 무기고를 접수하고 제주 파병에 반기를 들었다.

동족상잔의 비극보다 친일 경찰 단죄 택한 14연대 병사들

그들이 제주 파병을 거부하고 반란군이 된 것은 1948년 10월 19일 오전 8시경. 당시 14연대 인사과에 근무하던 지창수 상사를 비롯 정락현, 최철기, 김근배 등 하사관들이 반란의 주동을 맡았다. 이들은 '동족상잔 결사반대'와 '미군 즉시 철퇴' 등의 강령을 두고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정부와 맞섰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 우리의 목적은 외국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의 호소문 글 <애국국민에게 호소함> 중에서

그렇게 촉발된 여순사건의 봉기군들은 여수와 순천, 구례, 보성, 광양 등의 지역을 점령하면서 세를 넓혀 나갔으나, 그해 10월 27일 오후 3시경 진압군이 여수를 장악하면서 역사적인 막을 내렸다.

짧은 해방 공간의 기록. 하지만 우리는 그날의 역사를 '여순반란사건'으로 배웠고, 그 이후 여수와 순천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소식은 어느 역사책에서도 찾아 낼 수 없었다.

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48년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를 장악하면서부터였다. 진압군은 여수 서국민학교를 비롯해 동정공설시장, 동국민학교, 종산국민학교 진남관 등 공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여수인들 모이게 하고는 여순사건 동조자 색출에 나섰다.

진압군은 여수 시민 모두를 반란군으로 취급했다. 우익이 아니면 고개도 들지 못했던 순간들. 흰 고무신을 싣고 있다는 것도 죄가 되고, 머리가 짧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가 되어야 했던 극한의 공포.

누군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향해 지목만 해도 즉결처분되는 생과 사의 갈림길. 이른바 '손가락 총'이라 불리는 인간 사냥. 좌익과 우익이라는 이념의 잣대 앞에선 부모자식과 친구 사이라는 인과관계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인간이되 인간일 수가 없었던 끔찍한 학살의 기억.

10월 26일엔 그 학살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이들과 유적지 답사를 떠났다. 여수 경찰서 인근에 있는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는 걸어서 나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죽음의 공간이었다.

당시 부산의 5연대 1대대장이었던 김종원은 일본군 하사관 출신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종산국민학교에서 혐의자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도로 여수 시민의 목을 치기도 했다. 그는 여순사건 이후에도 거창양민학살을 주도하는 등 대표적인 군내 친일 세력이었다.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김종원. 정부는 그에게 양민 학살을 자행한 대가로 을지무공훈장을 비롯해 8개의 훈장을 선물했다. 당뇨병으로 1963년 사망한 그는 1960년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에 까지 연루되었으니 현대사의 비극이 한 둘 아니다. 그런 김종원에게 누군가 '백두산 호랑이'라고 했다니 그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부역 혐의를 받고 있는 125명이 총살되어 불태워진 계곡. 거대한 죽음의 계곡이다. 불타버린 시신들에게 형제처럼 지내라며 '형제묘'라 했다.
▲ 형제묘. 부역 혐의를 받고 있는 125명이 총살되어 불태워진 계곡. 거대한 죽음의 계곡이다. 불타버린 시신들에게 형제처럼 지내라며 '형제묘'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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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유적지 답사를 하던 문화예술인과 시민들이 형제묘을 찾아 묵념을 하고 있다.
▲ 이젠 편히 쉬길... 여순사건 유적지 답사를 하던 문화예술인과 시민들이 형제묘을 찾아 묵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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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시내에서 마래터널을 걸어서 지나면 만성리. '형제묘'라는 비석이 세워진 곳엔 125명의 넋이 섞여 있는 거대한 무덤 땅이다. 이들의 혐의는 봉기군에 대한 부역혐의. 봉기군에게 박수를 쳤거나 고운 눈길로 바라만 봐도 총살감이니 혐의는 말 그대로 혐의 일뿐. 그날의 진실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학살 현장을 직접 지켜 보았는데, "5명씩 총살한 후 다시 5명씩 장작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 모두 125명이 매장되었다"라는 이야기를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실태 조사 때 증언하였다 -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 펴낸 자료 중에서

학살이 이루어진 날은 1949년 1월 13일이라고 한다.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이들 중 125명이 먼 거리를 걸어서 만성리까지 왔고, 처형을 주도한 이들은 헌병이었다고 한다. 헌병은 총살한 양민을 장작더미에 올려 놓고 불 태웠는데, 시신이 얼마나 많았던지 3일간이나 불길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기 전엔 여순사건 풀 수 없다

뒤섞여 버린 시신들은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지내라며 '형제묘'라 이름 붙였다. 제주의 백조일손지묘와 다르지 않는 죽음들. 그러한 일은 형제묘뿐이 아니었다. 그날 둘러 본 여수는 곳곳이 거대한 무덤이었으며,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짓밟힌 핏빛의 땅이었다.

답사에 나선 이들은 준비해간 막걸리 한사발을 놓고 처참하게 숨져간 이들의 영혼 앞에 묵념을 했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죽임의 대행자로 당신들을 임명했단 말인가? 정부인가? 국민인가?"

묵념과 음복을 끝낸 한 사람의 절규. 분노한 이의 절규에 답할 수 있는 자 또한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형제묘에 주저 앉아 속울음을 울고 있는 사람들. 죽은 자에게 씌워진 '빨깽이'는 여전한데, 세상은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지 않고 있다.

"작가는 무당입니다. 무당은 억울하게 숨진 이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당시 죽은 자는 모두 빨갱이였습니다. 어린아이에게 빨갱이라는 덧 칠을 하는 나라, 그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글을 쓰게 하는 겁니다. 작가는 죽은 자의 영혼을 받아 들여 그것을 소설로 시로 풀어내야 합니다. 모름지기 작가란 그래야 하는 겁니다." - 여순사건 60주기 '문학심포지엄' 발제자로 나선 소설가 현기영 선생의 말

제주 4·3항쟁의 평가는 이미 상당수 진행되고 있다. 대통령의 사과도 있었다. 국무총리가 기념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수는 아직 풀지 못한 '사건'에 머물러 있다. 아직도 여수엔 '나서면 다친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회자되고 있으니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여순사건이 만들어낸 악법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입니다. 국가보안법의 폐지 없이는 여순사건을 풀기 어렵습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관계자의 말이다. 여순사건이 있은 지 한달 후인 1948년 11월 20일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으니 그의 말이 맞다.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알지만 대한민국의 '보도연맹사건'을 모르는 국민들이 있는 한 역사의 진실을 캐는 일이 쉬워 보이진 않는다.

그러하니 현기영 선생의 말처럼 이젠 작가들이 나서서 여순사건을 재조명 하는 일만 남았다. 작가들의 한풀이가 질펀하게 시작될 때 여순사건의 기억이 진실로 승화되고, 그날의 상처와 아픔이 상생과 평화의 날로 재평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일제가 만든 말굽 형태의 자연 암반 터널. 길이 640m로 국가지정등록문화제로 지정되어 있다. 여순사건 연루 혐의자들이 터널을 걸어 만성리 학살터로 이동했다. 일명 죽음의 터널이다.
▲ 마래터널. 일제가 만든 말굽 형태의 자연 암반 터널. 길이 640m로 국가지정등록문화제로 지정되어 있다. 여순사건 연루 혐의자들이 터널을 걸어 만성리 학살터로 이동했다. 일명 죽음의 터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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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여순사건, #4.3항쟁, #해방정국, #미군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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