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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지난 27일 파격적인 금리 인하, 시중은행 채권 매입 등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이다.

 

불신이 만연해 있는 시장을 상대로, '공포'에 휩싸여 있는 다수의 투자자와 국민을 상대로 한국은행이 본격적인 길 안내에 나선 것이다. 한국은행의 한 간부는 28일 "솔직히 우리도 두렵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물론 한은의 이같은 행보는 예사롭지 않다. '물가 안정'이라는 한국은행 설립 목표와 원칙을 충실히 지켜온 이성태 총재의 그동안 행보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시장 일부에선 "청와대(이명박 대통령)가 뚝심의 원칙주의자인 이 총재의 소신을 꺾었다"는 평이 흘러나왔다. 또 한편에선 "(이 총재가) 소신과 다른 파격적인 대응책을 내놓으면서, 금융위기 상황에서 확실한 소방수 자리를 굳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면, '안정론자'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의 '성장' 유턴은 성공할 수 있을까.

 

시장은 아직 이성태의 해법이 성공적이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연이틀 주식시장이 반짝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 위안거리다(29일 오전 코스피 1049.79로 시작). 하지만 물가는 여전히 높고, 원-달러 환율은 연일 상승세를 타면서 1500원선을 위협하고 있다. 투자자들의 불안감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일요일 청와대 회동서 무슨 말이?... 갑작스런 금통위 개최

 

지난 26일 오후 1시 8분. 한국은행으로부터 기자에게 한 줄짜리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내용은 이랬다.

 

"한은-공지사항. 임시 금통위 회의 개최 10/27(월) 오전 8:00"

 

당초 금융통화위원회는 내달 7일 열릴 예정이었다. 27일 회의가 갑자기 생긴 것이다. 가장 최근에 임시 금통위 회의가 열린 것은 2001년 9·11 사태 직후였다. 7년 만에 처음인 셈이다. 한은 고위 간부들도 뒤늦게 일정을 통보 받았다. 그만큼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한은 관계자는 "국장급 간부들도 일요일 오후에야 '긴급 금통위가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주말 해외 (주식)시장 폭락 소식에 중앙은행 차원의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작용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 일요일 오전에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서별관에서 긴급 경제장관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엔 한승수 총리를 비롯해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이성태 한은 총재, 전광우 금융위원장, 박병원 경제수석 등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 이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어떤 주문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박병원 수석이 오후에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국제 금융위기에 따른 실물경제 침체를 줄이기 위한 대책이 시급하며, 이를 위한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선, "한은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긴 했지만, 청와대 쪽에선 이미 "금리 인하"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신문 1면에 단정적으로 박힌 '금리 인하'... "얼마나 급했으면"

 

이성태 총재는 청와대 회동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금통위 회의 소집을 알렸다. 이미 정부 쪽으로부터 '한은 금리 인하설'이 흘러나왔고, '특단의 조치'도 나올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뒤늦게 사실 관계 파악에 나선 한은 쪽에선 신중한 반응이었다. 당시 한은 관계자는 "금리인하 등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만큼, 뭐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면서도 "금융 위기 불안 해소에 정부가 총력을 기울이는 만큼 중앙은행 차원의 대책 마련을 논의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다음날(27일) 일부 언론들은 아예 1면 머리기사 제목으로 "금리 인하"를 단정지었고, 또 다른 경제신문은 "0.5%포인트 인하"로 앞서 나가기도 했다. 금통위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언론에서 금리 인상이나 인하를 단정짓는 기사나 제목을 내보내는 일은 그동안 거의 없었다.

 

금융계의 한 임원은 "금리 결정의 독립성을 갖고 있는 중앙은행의 금통위 회의가 열리는 날, 아침 신문에 단정적으로 금리 인하와 인하 폭까지 실린 것은 처음 본다"면서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으며, 시장에선 '정부가 얼마나 급했으면…'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진 금통위의 결론은 또 다른 반전이었다.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파격적인 금리 인하(0.75%포인트)가 나왔다. 이어 대규모 시중은행의 채권을 매입하겠다는 내용까지 포함됐다. 특히 이 총재와 한은에선 그동안 은행 채권 매입에 부정적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중앙은행 총재, 이성태의 파격

 

이 총재는 지난주 국정감사에서 은행채 매입 여부에 대해 "은행들이 어려운 것은 알고 있지만, 엊그제도 일부 (은행채가) 거래됐고, 연금 등 기관 투자자들이 매입할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은 차원에서 은행채 매입을 고려하고 있지 않음을 강하게 시사한 것이다.

 

그러고는 일주일여 만에 180도 다른 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일부에선 원칙주의자인 이성태 총재가 청와대에 '백기투항'한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이 총재는 금통위 회의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금융) 불안이 지속되면 내수 쪽 부진을 부추켜 경제 성장이 크게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기준금리를 큰 폭으로 인하해서 내수경기 위축과 급속한 경기 하락을 완화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생각이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현 정부 들어서도  금리와 환율 문제 등을 놓고 안정 기조의 원칙을 굽히지 않았던 그동안의 이성태 총재와는 사뭇 다르게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일부에선 이 총재가 자신의 소신과 다른 과감한 처방을 내놓음으로써, 금융 위기 상황에서 확실한 소방수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도 있다.

 

금융계의 또 다른 간부는 "최근 금융위기 상황에서 이성태 총재가 내놓은 조치는 시장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라며 "현 정부의 경제팀이 사실상 시장의 불신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 총재가 남은 유일한 소방수인 셈"이라고 말했다.

 

물가와 환율 폭등의 후폭풍이 두렵다

 

문제는 앞으로다. 정부와 한은 쪽에선 금융시장이 안정되기를 기대한 눈치다. 하지만 일단 시장은 '별로'라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지난 9·11 테러 이후 금통위에서 0.5%포인트 금리를 내렸지만, 주식시장은 발표 당일에만 반짝 올랐을 뿐, 이후 10일 동안 내리막을 걸었다.

 

한은의 대폭적인 금리 인하에도, 지난 27일과 28일 주식시장은 상승으로 끝마치긴 했지만 900선이 무너지는 등 널뛰기 장세를 보이며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채권 금리는 오히려 올랐다.

 

게다가 외환시장의 불안은 더 커지고 있다. 28일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27일보다 25.30원이나 올라 1467.80원으로 마감했다. 지난 6일 동안 환율은 무려 152.80원이나 상승했다.

 

이미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 한은의 금리 인하가 외국인들의 국내 자본시장 철수를 가속화할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경기침체 우려에도, 현재는 외환시장의 안정이 중요한 만큼 금리 인하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홍종학 경원대 교수(경제학)는 "외화의 유동성 관리를 위해서 외국자본의 이탈을 막아야 하지만, 한은의 금리 인하는 외국인의 자본 철수를 오히려 부추길 소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김광수 '김광수경제연구소' 소장도 최근 내놓은 <위기의 한국경제>라는 책 등에서 한은의 섣부른 금리 인하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내놓았다.

 

물론 이성태 총재의 말처럼 경기침체가 예상보다 심각하고, 가계와 중소기업이 이자 부담으로 큰 타격을 입고 있는 점을 볼 때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대폭적인 금리 인하로 인한 물가와 환율 상승은 향후 경제에 큰 부담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금융회사들의 부실 경영에 대한 손실을 국민 부담으로 메워주는 것 역시 두고두고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물가보다 경기', '안정보다 성장'으로 기조를 바꾼 이성태의 금융 처방이 성공할 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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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금융위기, #이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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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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