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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지대에서 바라본 반구정
 앙지대에서 바라본 반구정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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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과 압구정, 이름이 비슷하네요, 강변에 세워진 것도 그렇고."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조선 초기 청백리로 유명했던 황희정승의 반구정 앞에서 아우는 갑자기 서울 한강변 압구정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이름이 비슷했기 때문이겠지요.

"이름은 비슷해도 두 정자의 주인공이나 정자에 담긴 정신은 아주 다를 걸요?"

막내가 모처럼 숙부의 말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평생을 벼슬아치로 지내고 특히 세종대에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역임했지만 멍석자리를 깔고 살았을 정도로 검소하고 청렴결백했던 황희정승의 반구정이 압구정과 비교되는 것이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건 그려. 어떻게 청백리의 표상 황희정승과 정의보다 권력에만 집착했던 한명회가 비교될 수 있겠어? 그냥 정자이름이 비슷하다는 거지, 강가에 세워진 것도 그렇고."

아우는 조카가 거들고 나선 말뜻을 금방 알아차리고 변명을 합니다. 황희의 넉넉한 인간성과 평화로운 정신이 깃든 반구정과 한명회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세운 압구정은 정말 이름이나 뜻이 거의 비슷합니다. 반구(伴鷗)나 압구(狎鷗), 모두 한가하게 갈매기를 벗 삼는다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강가에 세워진 정자라는 것도 비슷했지요.

후손들이 자랑스러운 조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앙지대
 후손들이 자랑스러운 조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앙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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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청백리의 표상 황희정승의 반구정을 찾다

지난 9월 16일 파주지역 파주3현의 유적지 탐방 중 세 번째로 찾은 곳이 문산읍 사목리 임진강변에 있는 반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반구정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오른 편 길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덩달아 따라 들어가니 엄청나게 커다란 음식점이었습니다.

이 음식점은 규모가 커서 한꺼번에 수백 명이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반구정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는 이 음식점에서는 강변 건물 밖에도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냄새는 말할 것도 없고 음식을 굽는 연기가 자욱한 것이 반구정의 정취를 여지없이 깨뜨리고 있더군요.

음식점을 나와 반구정 구내로 들어서니 파주3현의 유적지를 둘러보는 마지막 코스여서 해가 이미 설핏 기울어 있었습니다. 기념관은 공사 중이었지요. 왼편의 솟을 대문으로 들어섰습니다. 문은 세 개였지요.

"오른 쪽 문으로 들어가 나올 때는 왼편 문으로 나오는 거야?"
"그럼 가운데 문은 누가 사용하는 문이지요?"

내가 앞장서서 오른편 문으로 들어서며 가르쳐 주자 막내는 왜 가운데 닫혀 있는 제일 넓은 문은 사용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임진강에 비친 석양
 임진강에 비친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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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당지의 가운데 문은 주인공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지?"
"그럼 귀신이 사용하는 문이네요?"
"그런 셈이지."

그때서야 막내는 이해가 되는지 더 이상 묻지 않고 뒤를 따릅니다. 우선 강변 언덕 위에 있는 반구정으로 올랐습니다.

영당지의 삼문은 사람과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 달라 

계단길을 올라 정자 위에 서니 발아래 임진장 맑은 물이 은빛으로 반짝거리며 출렁입니다. 갈매기 몇 마리도 날고 있었지요. 이 갈매기들도 어쩌면 옛날 풋풋한 인간미가 넘쳐났던 노 정객과 어울렸던 갈매기들의 후손인지도 모르지요.

백구야 껑쩡 날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성상(임금)이 버리시매
너를 좇아 예 있노라.     - 방촌 황희의 유고시 한 구절

'껑쩡 날지 마라'는 매우 익살스러운 시구가 재미있는 시입니다. 후세의 선비들이 단가로 즐겨 부르던 한 구절인데 방촌 선생의 텁텁한 인간미가 묻어나고, 정말 갈매기를 벗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반구정과 앙지대가 있는 강가의 언덕
 반구정과 앙지대가 있는 강가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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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래는 절벽입니다. 그 절벽을 감돌아 흐르는 임진강 물줄기는 하류에서 한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흐를 것입니다. 강 건너는 북녘 땅입니다. 마침 그 북녘 땅 너머로 기운 해가 임진강물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지 어언 반백년이 훌쩍 지나고 말았지만 아직도 남북은 총부리를 맞겨누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양쪽의 실력자들이 모두 방촌 황희 선생 같은 마음을 지녔다면 통일은 벌써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임진강물과 한강물이 서해에서 서로 어우러졌듯이 말입니다.

반구정 옆에는 또 하나의 정자가 서 있었습니다. 이 육각정자는 반구정보다 오히려 더 멋진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앙지대(仰止臺)였습니다. 앙지대는 후손들이 자랑스러운 조상 황희 정승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입니다. 앙지대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강변을 따라 이어져 있는 기나긴 철조망이 민족분단의 깊은 상처처럼 시뻘겋게 녹슨 모습이었습니다.

청백리 황희의 됨됨이와 인간미

"이 반구정을 찾는 사람들은 우리들처럼 주인공인 황희 정승을 기리는 마음이 애틋할 텐데, 한강변의 압구정도 지금 남아 있었다면 사람들이 이런 마음으로 찾을까요?"

"무슨 소리? 주인공이 너무 다른 걸, 하지만 압구정을 좋아할 사람도 있긴 있겠지? 요즘 우리 사회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황희선생 동상
 황희선생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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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에서 다시 압구정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니 반구정의 주인공인 청백리 황희와 세조의 정난공신 한명회의 이야기를 다시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 황희 정승은 집안의 노비 두 사람이 서로 다투다가 그를 찾아와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일러바치자 사내종에게 '네 말이 옳다' 하고 또 여종에게도 '네 말이 옳다'고 했다 합니다. 이를 지켜본 부인이 대감의 소견 없음을 나무라자 '부인의 말도 옳다' 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황희가 영의정 시절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는데 어린 아이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며 황희의 상투와 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상 위에 차려놓은 음식까지 마구 집어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황희는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고 허허허 웃으며 "아이고, 요놈들 보게. 손님이 와계시니 너희들 나가 놀아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숭모제
 숭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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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그것을 보고 민망하여 "대감께서는 손자들을 굉장히 귀여워하시나 봅니다" 했다 합니다. 그러자 황희는 "허허허 아까 그 놈들은 우리 집 노비의 자식들인데 나를 아주 잘 따른답니다. 결례가 되었다면 미안하외다" 하고 대답했답니다. 손님은 손자가 아닌 노비의 자식들까지 친손자처럼 자상하게 사랑하는 황희의 모습에 진심으로 감복했다고 전합니다.

황희의 벼슬살이와 소박하고 텁텁했던 삶

황희의 인간미와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어림해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황희는 본래 고려의 유신이었습니다. 이십일 세에 고려조의 사마시에 합격했고, 스물 셋에 진사시에 급제했지요. 그러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스물일곱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이 스물여덟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고려가 멸망했습니다. 그는 고려의 유신으로 남겠다고 의기로 뭉친 두문동 72현의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두문동에 칩거한 이들로 인해 오늘날에도 쓰이는 사자성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이 바로 이때부터 생겼습니다.

황희선생 영당 출입문
 황희선생 영당 출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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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이성계의 회유와 협박에도 의기를 꺾지 않고 두문불출하던 72현은 결국 두문동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황희만을 조선조정으로 내보냈습니다. 황희가 조선조에 출사하게 된 배경이지요.

한편 한명회는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1등 정난공신입니다. 그는 1452년에 경덕궁직이라는 미관말직에 등용됩니다. 그런 그가 친구인 교리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에게 가담하여 무사 홍달손 등 30여 명을 천거하고, 1453년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군기녹사가 되고, 1등 정난공신으로 사복시소윤에 오릅니다.

압구정의 주인 한명회의 일생과 삶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한 그는 동부승지와 좌부승지를 거치며 우승지가 됩니다. 그는 이듬해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을 주살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오릅니다.

그는 1457년에 이조판서가 되고 병조판서를 거쳐, 1459년에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체찰사를 역임한 후,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됩니다. 이듬해에는 우의정이 되고,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에 벼슬길의 정점인 영의정이 됩니다.

방촌 황희선생 영당
 방촌 황희선생 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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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두 딸을 왕실에 시집보내어 두 명의 왕비를 배출하기도 했지만 모두 단명하여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합니다. 그의 죄업 때문이라는 것이었지요. 예종비 장순왕후 한씨는 세자빈 때 인성대군을 낳고 이듬해 사망합니다. 열일곱 살이었지요.

파주 삼릉 중의 하나인 공릉이 바로 장순왕후의 능입니다. 세자빈으로 죽었지만 성종 3년에 왕후로 추존된 것입니다. 성종비 공혜왕후도 한명회의 딸입니다. 그러나 공혜왕후도 20세가 되기 전에 죽어 역시 단명했지요. 역시 파주 삼릉 중의 하나인 순릉의 주인입니다.

잘못된 것은 예종과 성종이 숙질간이니 한명회의 두 딸인 장순왕후와 공혜왕후가 자매간에서 왕실에서는 숙모와 조카며느리 사이로 바뀐 것입니다. 두 딸이 모두 단명하고 왕실에서의 관계가 이렇게 된 것도 한명회의 권력에 대한 탐욕의 결과라고 하기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권력의 정점에 있던 한명회도 1467년 이시애의 난에 연루되었다 하여 체포되는 수모를 겪기도 합니다. 그가 죽은 후에는 1504년 연산군에 의한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의 사사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시체에 형벌을 가하는 부관참시 되었다가 후에 신원되기도 했으니 어쩌면 그도 파란만장한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반구정에버 바라본 해저물녘의 임진강 풍경
 반구정에버 바라본 해저물녘의 임진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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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명회가 말년에 황희 흉내를 낸 건지 한강변에 정자를 지어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압구정이라고 했답니다. 그 압구정에 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 백수와강호(白首臥江湖) "젊어서는 사직을 돕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히다"라는 시구를 걸어놓고 거드름을 피웠다고 합니다.

한명회의 압구정, 매월당에게 모욕당하다

그런데 어느 날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우연히 이 시를 보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김시습의 성미에 그걸 보고 그냥 놔뒀을 리가 없지요. 김시습은 청춘부사직 중의 부(扶)자를 망(亡)자로, 백수와강호 중의 와(臥)자를 오(汚)자로 고쳐 써놓은 것입니다. 뜻이 이렇게 바뀌고 말았지요,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다"로 말입니다. 한명회가 보고 노발대발 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고요.

"그럼 반구정과 압구정을 비교해서는 안 되겠는데요, 비교되는 것만으로도 불쾌할 것 같아요."

황희와 한명회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들은 가족들이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야기 중에는 조금 과장 되었거나 그냥 전해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섞여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 두 사람의 됨됨이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 최고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에 어울리는 명재상이 황희였고,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딱 맞는 재상이 한명회였던 셈이네요."
"그런 셈이지, 그런데 그게 어디 옛날이야기뿐이겠니. 지금도 역대 정권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더구나. 본래 사람이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게 마련이거든."

내 설명을 들으며 가족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곱고 예쁘게 핀 코스모스와 영당지 전경
 곱고 예쁘게 핀 코스모스와 영당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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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에서 내려오니 바로 앞에 황희 정승의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동상 옆으로는 정면 다섯 칸의 숭모제, 그리고 선생의 영당 문에는 멋진 초서체 글씨로 '방촌선생영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담장 옆 마당가에는 때맞춰 피어난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곱고 예쁜 모습이었습니다.

황희 선생이 1452년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1455년(세조 1년)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반구정 옆에 앙지대와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영당은 6·25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경기도 기념물 2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황희, #반구정, #압구정,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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