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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하는 필리핀 거리. 도로에 차선도 없고, 신호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싶다. 연신 울려대는 클랙슨과 끼어들기가 성행하고, 주변엔 2층에서 3층 밖에 되지 않는 건물들이 즐비하다.

"공항 근처는 낙후된 지역이에요. 중심가로 나가면 멋있는 호텔과 높은 빌딩 숲이 있어요."

짧게나마 들었던 선입견이 말 한 마디에 무너졌다. 배가 고팠다. 필리핀에서 처음 접하는 음식, 현지 체인음식점인 'pancake house'에 갔다. 옆에는 필리핀 바다가 보이고, 주로 외국인들이 앉아 있는 식당, 빵빵한 에어컨과 가자마자 주는 콜라 덕에 잠시나마 후텁지근함을 잊을 수가 있었다.

필리핀에서의 첫 끼니
 필리핀에서의 첫 끼니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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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음식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쌀도 그리 푸석푸석하지 않았고, 고기 맛도 좋았다. 단지 더운 지방이기에 짜고 단 것이 익숙하지 않았을 뿐. 먹는 도중 창성 형님과 장미의 카메라가 연신 셔터음을 들려줬다. 덩달아 나도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야 된다는 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우리가 첫 식당으로 체인점을 온 이유가 있었다. 필리핀 음식점은 음식이 빨리 나오지도 않고, 영수증 하나를 가져오는데도 몇 분이 걸릴 때가 종종 있다고 한다. 당연히 그것을 재촉하는 한국인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쳐다본다.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움직여야 하는 우리 팀의 특성상 이 곳을 찾았던 것이다.

한 번은 큰 형님이 회사에 있는 필리핀 직원을 혼낸 적이 있다고 한다. 그의 실수로 회사가 중요한 계약에 입찰조차 못했기 때문이었다. 큰 형님에게 필리핀 직원은 의아하단 표정으로

"내가 실수한 것은 알겠다. 하지만 당신은 왜 성질을 내냐? 차분히 이야기 해도 다 알아듣는다."

물론 형님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고 한다.

인스트라무로스의 모습
 인스트라무로스의 모습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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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필리핀의 첫 번째 출사지는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스페인 식민지의 흔적으로 구성된 이 곳, 우리는 산티아고 요새를 찾았다. 스페인, 영국,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시대 열강들의 점령지로 전락했던 이 곳에선 수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처형되기도 했다고 한다.

산티아고 요새의 모습
 산티아고 요새의 모습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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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요새로 가는 길
 산티아고 요새로 가는 길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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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엔 사람 발자국 형태의 동판이 길을 따라 이어져 있는데 필리핀의 영웅 호세 리잘이 처형장으로 걸아가던 발자취라고 한다. 문제는 필리핀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대책없는 여행객은 이 곳에서 별 감흥이 없었다는 정도. 오히려 흥미로운 이야기는 큰 형님의 설명이었다.

"강 건너편에 보이는 동네가 필리핀 차이나타운이 형성된 곳인데, 정말 위험한 곳이에요. (물은 왜이리 시뻘개보이냐는 질문에). 그거야 물이 오염되서 그렇지. 한강도 저런 적이 있었어요."

산티아고 요새의 문양
 산티아고 요새의 문양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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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둘러본 산티아고 요새, 그런데 갈수록 작렬하는 태양에 팀원들 모두 녹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차를 한 잔 마시기 위해 근처 카페로 향했다. 스페인식 건물 형태로 지어졌다는 카페, 하긴 주위를 둘러보니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거리와 흡사했다. 유럽의 어느 거리 같은 느낌이랄까.

마닐라의 찻집 'Barbara's'
 마닐라의 찻집 'Barbara's'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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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의 찻집 'Barbara's'
 마닐라의 찻집 'Barbara's'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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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다 시원한 음료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카페에선 그다지 시원한 음료가 제공되진 않았다. 필리핀의 전기세는 살인적이기에 현지 사정에 맞춘 온도라고 큰 형님이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 카페의 직원들도 주문이 없거나 할 일이 없으면 누구보다 편안한 모습으로 쪽잠을 자거나 편하게 의자에 기대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더운 날씨에 지치지 않는 힘이 원천이 아닐까?

우리 팀은 5일여의 일정동안 40여시간 버스를 탔다. 그것도 매우 좁고 낡은 버스, 모두들 사람 꼬리뼈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할 만큼 지루한 시간이었다.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장시간 버스를 타고 이동할 줄은 몰랐다. 특히 오늘밤엔 세계 8대 불가사의의 고장 '바나우에'까지 10시간의 버스를 타고 이동 후 바로 산행을 감행해야 한다고 큰형님이 설명했다.

그래서, 우리의 몸 상태를 배려한 주최측은 필리핀 마사지를 체험하게 해주었다. 일단 샤워를 하러 샤워실에 들어갔는데 물이 졸졸졸. 이 쪽 물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졸졸졸이 어떠랴. 너무도 시원한 걸.

마사지 샾
 마사지 샾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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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 후 가운을 입고 1시간여의 마사지 대장정이 시작됐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받은 마사지가 좋았지만, 나를 마사지해주는 안마사가 다소 힘이 부친 듯 힘들어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사지를 받는다는 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다시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마사지가 끝나니 한국말로 '끝났어요'라고 안마사가 말해줬다. 몽롱한 상태에서 멍하니 있다가 팁을 줄 타이밍을 놓쳤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안마사에 팁을 챙겨줬지만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이 곳은 팁이 하나의 정당한 문화였다. 우리 식으로 접근하면 상당히 몰상식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곳엔 팁이 없으면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영위하기 힘들단다.

안마가 끝나고 가뿐하게 발걸음을 내딛었는데 5분 뒤 도로아미타불이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몸이 금방 적응해버린 탓이었다. 이제 마닐라 해변의 일몰을 보기 위해 해안가로 이동했다.

마닐라의 일몰
 마닐라의 일몰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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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필리핀 최대의 쇼핑몰 'SM' 근처의 해안가. 흡사 우리나라의 한강 고수부지처럼 가족들과 연인들이 많이 걸어다니고, 근처에 식당들이 줄 서 있었다. 문제는 잔뜩 낀 구름 탓에 제대로 된 일몰을 못봤다는 것과 오염된 바다 탓에 조금 악취를 느꼈다는 것.

자유로운 여성의 흡연
 자유로운 여성의 흡연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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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을 즐기는 필리핀 이방인
 석양을 즐기는 필리핀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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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상적이었던 것 두 개. 하나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걸어다닌다는 것과, 또다른 하나는 젊은 필리핀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스스럼없이 담배를 핀다는 것. 전자는 필리핀보다 잘살고, 특색있는 자연환경을 가진 우리나라는 관광산업이 왜 활성화 되지 않는지에 대해서, 후자는 우리 사회에 둘러씌인 편견이 여성들에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그리고 드는 생각.

'정말 우리가 필리핀보다 잘 사는 것일까? 잘 산다는 기준은 뭘까?"

필리핀의 튀긴 족발 요리
 필리핀의 튀긴 족발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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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해는 지고, 우리는 harbor view라는 유명한 필리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어느새 짜고 단 음식은 입에 익숙해지고, 한 상 가득 차려지는 필리핀 음식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특히 필리핀 족발이라며 양파에 곁들여져 나온 튀긴 음식은 이후에도 몇 차례 맛봤는데 내 입맛에 꼭 맞았다.

이제 만난지 채 하루도 안 된 사람들, 하지만 어느새 화기애애한 식사자리. 내 화법 탓일까. 큰형님, 형님, 형, 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하자 대부분 사람들도 그렇게 동화되버렸다. 역시 어색한 사람들끼린 말을 트고 호칭을 편하게 부르는게 친해지는 지름길 같다.

마닐라 SM 내 wang mart
 마닐라 SM 내 wang m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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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우리는 'SM'내에 wang mart라는 곳에 가서 컵라면을 대량 구매했다. 공항에서 컵라면과 고추장을 구입할지 말아야할지 잠시 토의했을 때는 '며칠 다녀올 것인데 굳이 그럴 필요 있겠냐?'는 의견이 많았지만, 현지에서 10년이상 사신 큰 형님이 컵라면과 고추장을 챙겨오신 걸 보곤 마음이 달라졌다. 다행인 것은 대부분 한국 물품이 있다는 것과 가격 차이(컵라면 개당 1000원꼴)가 별로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닐라 UCC의 아이스커피
 마닐라 UCC의 아이스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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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라면 든 손, 왜 이리도 든든한지. 11시에 떠난다는 바나우에 행 버스를 타기까지 남은 2시간여의 시간. 우리는 UCC라는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UCC는 일본 커피 프랜차이즈, 필리핀 내에선 상당히 고급스런 가게로 자리잡고 있었다. 큰형님이 말씀하셨다.

"이곳 애들은 생각보다 브랜드를 중시한다."

하긴 5일 내내 내가 가장 많이 본 간판은 '코카콜라'였다. 필리핀인들도 드문 오지에 가도 어김없이 '코카콜라' 간판은 있었다. 거기에 도요타, 맥도날드, 노키아 그리고 현대와 삼성도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현대차 '스타렉스'는 파격적인 서비스제시에 현지인들에게 요즘 인기가 많다고 큰형님이 얘기해주셨다. "현대차는 도요타보다 승차감은 좋은데, 도요타가 필리핀 현지 도로 사정에 맞춰봤을 땐 더 튼튼해"라는 말도 덧붙여서.

우리나라도 훌륭한 한식이나 우리 전통 먹거리로 세계적인 프랜차이즈를 왜 만들면 안 될까? 왜 항상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서 반걸음씩 여러 분야에서 뒤처지는 것일까? 큰 형님이 한마디 하셨다.

"우리가 일본보다 개항이 100년이 늦었어. 선진국과 비교해선 몇 백년은 뒤처진 채 산업화를 시작했어. 지금은 선진국들이랑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잖아. 그럼 대단한 거 아니냐?"

형님 참, 왜 자꾸 날 부끄럽게 만드시는지. 차를 마시고 바나우에 행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갔다. 애초에 아주아주 좋은 버스라고 하더니 이 걸 타고 10시간을 가서 밤을 지샐 생각을 하니 머리가 조금 아파지기 시작했다.

바나우에로 떠나는 정감있는 버스
 바나우에로 떠나는 정감있는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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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이 나라 버스를 타면 무지 춥다는데 배낭 깊숙한 곳에서 점퍼를 꺼낸다.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데, 내일 아침 몸 건강히 웃는 얼굴로 보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렇게 필리핀에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아직 필리핀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필리핀 관광청'과 '야후'가 함꼐하는 '코닥 사진 원정대'의 후원으로 작성됐으며casto와 푸타파타의 세상바라보기(http://blog.daum.net/casto)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CASTO, #필리핀, #마닐라, #인스트라무스, #산티아고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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