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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교육 정책을 보노라면 전광석화에 롤러코스트를 타는 기분이다. 어느 순간 번쩍하며 급작스럽게 치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니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정책 발표가 그것이다.

 

이제는 오랜 기간에 걸친 연구와 집필활동이 요구되는 교과서마저 그런 식으로 하려는 모양이다. 정권을 잡으면 백년지대계인 교육 개혁을 하나회 척결이나 금융 실명제 실시처럼 하루아침에 해낼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어륀지 파동'으로 그만큼 당했으면 이제는 교육이 무엇인지 알 때도 되었건만, 이명박 정부는 경험을 통해서도 학습이 되지 않는가 보다.

 

김도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14일 보수 성향 모임인 광화문 문화포럼에 참석하여 "지금 역사교과서나 역사교육이 다소 좌향좌 돼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뒤이어 교과부 관계자의 전언을 보도한 신문 기사를 종합해보면, 내년 1학기부터는 좌편향을 시정한 수정교과서로 학생들을 공부시킬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한다. 아울러 전경련 등 재벌 이익집단을 중심으로 해서 꾸준히 문제가 제기되어 온 반시장적 서술로 가득 차 있는 '경제'교과서에 대한 개정도 추진할 것으로 보도가 되고 있다.

 

장관 말 한마디에 기다렸다는 듯 역사도 뚝딱 개정?

 

교과서에 대한 수정작업은 오타나 명백한 사실오류를 중심으로 매년 조금씩 바뀌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렇듯 급작스럽게 역사관 전면에 대한 대수술을 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내년 신학기 시작이 3월이고 출판과정과 배포과정을 고려하면 실제적인 내용 수정을 할 수 있는 기간은 채 6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전면적인 역사관을 수정한 교과서 작업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해석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미묘한 표현만을 구체적으로 적시해서 고칠 요량이라면 이는 더욱 큰 문제가 된다. 교과서 집필자의 자율성은 무시하고 단어 하나 표현 하나까지 교과부가 지침을 내리겠다는 발상인데, 다시 독재 시대로 돌아가서 역사 교육을 정권 입맛대로 바꾸겠다는 뜻이 아니면 무엇인가?

 

현재 교과서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과목은 '경제'와 '한국 근현대사'이다. 이 두 과목은 기존 교과서에 대한 반발로 보수진영이 새 교과서까지 출간해 둔 상태다. 전경련 등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집단을 중심으로 기존 경제교과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면,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뉴라이트 계열인 교과서 포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교과서를 둘러싼 이념 전선은 한국사회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대혈투 참조)

 

이 중 '경제'교과서에 대한 공격은 참여정부의 교육부와 연합전선까지 펼쳐서 추진되었다는 측면에서 아이러니가 가장 많았다. 전경련 주관으로 만들어진 '차세대 경제교과서'는 2006년 2월 김진표 교육부총리와 합의하에 출간되기로 발표가 되었었다. 이후 노동계와 교육계의 반발로 교육인적자원부가 막판에 빠지긴 했지만, 기획부터 출간까지 참여정부 교육부가 후원했다는 것은 뉴라이트 계열이 그렇게 좋아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경제' 교과서에 대한 보수진영의 비판적 태도는 기존 교과서 집필자였던 주류경제학자인 보수진영 아군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측면에서 그들의 논리적 파탄을 엿볼 수가 있다. 6차 경제교과서는 고등고시를 보는 사람의 필독서였던 조순과 정운찬이 공동집필한 <경제학 원론>의 축소판이라는 이야기까지 나돌았을 정도로 기존 경제학자들의 입김이 절대적으로 반영된 책이었다. 교과서 집필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사람들이 쓴 글을 가지고 왜 좌파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6차 교육과정은 교육과정 확정부터 교과서 집필까지 모두 문민정부 이전 시대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자신들이 만든 경제교과서 두고 '반시장' '좌편향' 공격

 

제7차 경제교과서가 반시장적이라는 비판 역시 이런 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반시장적 표현이 늘었다고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제7차 교육과정안이 확정이 된 것은 1997년, 즉 정권이 교체되기 이전이라는 사실이다. 더욱이 제7차 경제교과서 집필진 역시 좌파로 낙인찍힐 사람은 절대 아니다.

 

개인적으로 차세대 경제교과서 집필자 중의 한 사람인 경제학과 교수와 업무 차 조우했다가 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내 비판의 핵심은 교수님들이 쓰신 경제교과서를 가지고 교사들이 가르쳐 왔는데 뜬금없이 왜 이제 와서 좌편향 교육을 했다고 이념 공세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정권의 압력과 7차 교육과정에 대한 교육부 고시가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 교수는 이념편향을 걱정하면서 제7차 교육과정 고시 확정이 1997년이었다는 기본적인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더구나 구체적인 압력에 대한 사실 관계는 제시하지도 못했다.

 

이 기사를 쓰기 위하여 언론보도를 검색하다가 문화일보에서 재밌는 칼럼 하나를 발견했다. 홍진표 자유주의 연대 사무총장이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발언을 환영하는, <좌편향 교과서 반드시 수정해야>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실증주의적 해석을 중시하는 뉴라이트 계열의 운동가가 쓴 기사 치고는 너무나 수준 미달이었다. 우리 역사교육의 문제점으로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하였다.

 

"2004년 1월 육사에 합격한 25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무려 34%가 우리의 주적(主敵)이 미국이라고 답한 충격적인 결과는 반미 민족주의를 조장하는 일부 교과서의 영향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 기사의 출처는 한 예비역 육사 교장이 자신의 불확실한 기억에 의해 한 발언이 유일한 근거였다. 설문지도 존재하지 않고, 설문문항도 어떻게 조사되었는지 전혀 공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34%가 우리의 주적을 미국이라고 답했다는 발언만 전하고 있다.(관련기사 4년 전 '주적 설문'으로 색깔론 덧씌우기)

 

설문조사가 조사기법에 따라 엄청난 편차의 대답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실증주의 연구방법을 공부할 때 누구나 알게 되는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는 실증주의를 잘 모르거나 이념적 이익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과학적 원칙을 포기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실증' 좋아하는 뉴라이트, 이게 실증인가요?

 

재미있는 것은 뉴라이트가 이렇게 실체가 없는 설문조사에 대해서는 인용을 하여 상대편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해방 직후에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우리 국민 다수가 사회주의 체제를 원했다는 사실은 근거 미약으로 무시한다는 점이다. 미군정 시대의 설문조사의 근거가 확실한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으나, 실증주의적 근거를 정확히 따지는 뉴라이트가 원칙을 이중 잣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맨 마지막의 결론을 내리는 문장은 실소를 자아내게 하였다.

 

"물론 정부가 수정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전문가들의 근거가 명확한 문제 제기가 사회적 설득력을 얻게 되면 출판사들의 태도 변화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좌편향 교과서를 수정하겠다는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발언을 '태도 변화도 기대할 수' 있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가? 만약 앞으로 뉴라이트 입맛에 맞는 새로운 경제 교과서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나온다면,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발언은 정부가 정권의 힘을 바탕으로 교과서의 논지를 좌지우지한 실증적 근거로 두고두고 인용이 될 것이다.

 

이번 사태를 두고 뉴라이트를 위시한 보수 세력에 충고를 한다면, 자기모순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코드인사를 비판하다가 '강부자 내각'에 '고소영 S라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게 해주고, 남보고 좌파경제라고 비난하다가 MB물가지수 등을 만들어 정부가 직접 경제 개입을 하지를 않나, 참여정부 보고 소통부족을 말하더니 본인들은 그보다 더한 행동으로 지지율을 더 까먹는 행태를 보면 이것은 너무나 아닌 것 같다.

 

현재 청와대의 교육과학문화 수석은 경제학자 출신이다. 교육경력이 일천한 경제학 박사에게 교육 분야 참모를 맡기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60년의 교육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교육과학기술부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에는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자들까지 참여시키겠다고 한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명저를 남긴 E. H. 카가 역사학자가 아니었듯이 역사학에 사회과학적 연구 성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역사학계나 역사교육학계의 자발적 동의를 바탕으로 해야지 정권의 힘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교과서 개정', 딱 거기까지 만이다

 

교육계에도 나름대로의 룰이 있다. 이를 정권의 힘으로 깨뜨리거나 외부의 분위기를 이용해 강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 경쟁 시대에 이리 저리 욕먹고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동네북처럼 두들겨 맡는 것이 교사들이다. 언제는 인수위원장이 나서서 영어교사들 욕을 먹이더니 이제는 교과부 장관이 나서서 역사 선생님들을 욕보이고 있는데, 관료들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정말 곤란하다.

 

만약 현재 사회 교과서와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적인 것이 사실이라면 차분하게 교사들을 설득하기 바란다. 우리 교사들이 그 정도 이야기를 못 알아들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만약 합리적인 설득과 논리로 교사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면, 정권의 힘으로 교과서는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교육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설사 교육을 장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교육의 결과물인 학생들의 사고도 정권 맘대로 한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뉴라이트가 그토록 미워하는 386세대는 가장 확실한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이며, 지난 18대 대선에서 이명박을 많이 찍었다고 회자되는 20대는 뉴라이트 주장대로 그 386으로부터 금성사 판 '한국근현대사'를 배우고 자라났다.

 

교육은 실험실에서 객관적 수치 조정하듯이 데이터를 조작하여 일정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키우듯이 늘 조심하고 돌아보며 성찰을 하며 해나가는 작업이다. 이것이 현직 사회과 교사로서 김도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태그:#좌편향 교과서, #김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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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고등어 사전(메디치미디어)>, <나의 권리를 말한다(뜨인돌)>, <세상을 보는 경제(인포더북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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