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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에서 피오르드를 따라 질주하다(뒤에 구름 사이로 보이는 것은 빙하!)
▲ 유럽중고차여행 노르웨이에서 피오르드를 따라 질주하다(뒤에 구름 사이로 보이는 것은 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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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라자스탄 지방을 여행할 때다. 기차창문 너머로 그림 같은 마을들이 연이어 지나갔다. 순간 충동이 일어난다. 뛰어내릴까? 저 마을에서 하루 밤 묶어갈까? 다음 역에 내린다면 과연 저 마을로 다시 찾아갈 수 있을까? 서둘러 지도를 펼쳐보지만 지도엔 없다. 역과 역 사이에는 하얀 여백뿐, 마을 이름조차 없다.

아쉬움이 목까지 차오르자 한숨이 새어나온다. 항상 선로를 벗어나는 일은 크고 작은 결단을 요구하기 마련. 시간, 돈, 교통편의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결단은 쉽지가 않다. 아내의 발칙한 상상이 시작 된 건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자기야, 유럽에서는 중고차 한 대 사자! 맘껏 돌아다닌 후에 되파는 거야!"

내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세계여행, 정말 멋진 상상이다. 가고 싶은 곳엘 가고,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난다!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더 이상 내리고 싶은 마음을 창 밖에 두고 발을 동동거릴 이유도 없다. 그날 이후, 아내의 상상은 점점 날개를 달아갔다.

"중고차를 사면 내부를 개조할 거야. 잠도 자고 밥도 해먹을 수 있게 말이야. 그러면 매일 같이 배낭 꾸리고 숙소를 찾아 헤매는 일과도 이젠 안녕이야!"

미리 얘기해두자면 차안에서 잠자는 일이 편안했을 리 없다. 하지만 단언하건데 세계여행길에서 이보다 더 사랑스런 잠자리는 없었다. 샛노란 보름달이 뜬 지중해 해변에서, 빙하가 흘러내리는 노르웨이의 피오르드에서, 반 고흐의 마을인 프랑스 아를로 향하다 마주친 해바라기 벌판에서…. 어디 그 뿐인가. 로마 콜로세움, 아테네 올림픽경기장, 베를린 필하모니 공연장 그 바로 아래에서 보낸 수많은 밤들. 그때마다 우리 중고차는 나그네의 로망이 깃든 지상 최고의 호텔이 되어주곤 했던 것이다.

가고 싶은 곳엘 가고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문다.(이탈리아 지중해변 아말피 해안도로)
▲ 자동차여행의 매력 가고 싶은 곳엘 가고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문다.(이탈리아 지중해변 아말피 해안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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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를에서)
▲ 반 고흐의 해바라기 (프랑스 아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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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상상하는 것이 그녀의 몫이라면 추진하는 건 나의 몫이다. 난 중고차 여행을 준비할 베이스캠프로 독일 괴팅겐을 선택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는데, 우선은 여행길에서 만나본 독일인들의 성격 때문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경험에 의하자면 프랑스인들은 수다스럽고, 이탈리아인들은 다혈질(정열?)이고, 스위스인들은 새침스럽고, 독일인들은 꼼꼼하다. 혹 그들의 차도 주인을 닮지 않았을까?

황당하게 들릴지 몰라도 중고차를 애마로 사들여야 하는 나그네 입장에서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생각해 보라. 수다스럽거나 다혈질이거나 새침스러운 애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난 꼼꼼하고 충직한 애마가 필요했다. 물론 현실적인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독일 괴팅겐에는 막역한 사이인 K선배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며칠을 지내고 괴팅겐에 도착했을 때 난 인구 13만이라는 이 조그만 도시에 단번에 반하고 말았다. 역 광장엔 자전거가 성냥갑 속의 성냥처럼 빽빽하게 서있었고, 새하얀 원뿔 모양의 조형물에 별자리가 그려져 있었다. 띄엄띄엄 남아있는 성벽 사이로 돌길이 도심을 향해 동화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가우스가 이곳 출신이다.
▲ 기차 역 광장의 별자리 기준점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가우스가 이곳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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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5월의 태양이 내리쪼이는 광장은 어쩐지 잔뜩 들떠있었다. 햇볕을 마주하고 맥주를 마시느라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사람들 얼굴이 그랬고, 아이스크림을 물고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여학생들의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옷차림과 즐거움에 겨워 미칠 것 같은 청춘들의 기타소리에다, 심지어 거만하게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구걸하는 거지의 돈 통에서 조차도 봄의 향기가 생동하고 있었다.

도시 괴팅겐의 첫인상은 이렇듯 상큼했다. 게다가 걸어서 30분 안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아시아마켓, 시청, 대학, 병원, 콘서트홀, 보험사, 은행, 백화점. 중고차를 구입하고 개조하고 준비물품을 구입하기 위한 유럽여행의 베이스캠프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독일인들은 단짝 친구가 세 명 이상인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K선배의 설명이다. 독일인들에게 친구라 함은 친구의 인생을 책임지는 거라고 한다. 그러니 친구가 너무 많은 이들은 그 진정성을 의심받는단다. 사실이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게 중요한 점은 K선배에게 그런 독일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가 중고차를 사고파는 '핸들러'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가 중고차 판매점의 사장이라니! 중고차여행 준비가 땅 짚고 헤엄치기가 되는 순간이다.

친구 '홀거 뷔도프'가 적당한 가격에 좋은 차를 구해주기로 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튿날부터 아내와 난 선배를 따라다니며 상큼한 도시 괴팅겐을 탐닉했다.

2주일 동안 거의 매일 다녔던 길...
▲ 골목길 2주일 동안 거의 매일 다녔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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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따라 한적한 산책로를 걷다보면 '가우스 천문대'나 '비스마르크 생가'를 만나기도 하고, 도심 속 돌길에서 '거위치는 소녀'나 독일전통 나무집을 볼 수 있었다. 이 작은 도시에 놀랍게도 인도, 베트남, 터키, 그리스 등 전 세계의 다양한 음식점들이 있었고, 수십 개의 소극장에서 거의 매일 다양한 공연들이 열리고 있었다. 아시아여행에서 쌓인 피로를 풀어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며칠 후 드디어 홀거로부터 전화가 왔다. 좋은 놈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적당한 가격에다 여행 후에 다시 사들이겠다는 약속까지 덧붙였다. 그는 주말에 '튑Tűb(2년마다 받는 정기검진으로 무척 까다로워 차의 안전성은 물론 사고팔 때 가격에 크게 영향을 끼칠 만큼 중요하다)'까지 받아서 가져 오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홀거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자기 아버지 몰래 차안에서 바닥까지 싸악 정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안락한 자동차여행을 위해 뒷좌석을 뜯어내고 침실공간으로 개조해주겠다며 우리 의사를 물어왔다.

"당연히 오케이지! 실내개조까지 맡아주겠다는데!"

아내와 나는 독일인들의 헌신적인 우정에 눈물까지 쏟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홀거가 우울한 목소리로 또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미안해 친구, 차를 팔 수가 없게 되었어."

무슨 소리? 그는 친구의 친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크고 작은 수리에 새 부품까지 몰래 갈아 넣다 사장인 아버지에게 발각 당했다는 것이다. 결국 수리비와 부품비용까지 더해 가격이 1천유로나 뛰어버렸다고 했다. 이런!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를 믿었기에 손 놓고 놀기만 한 시간이 1주일이다.

그날부터 K선배와 함께 지역신문과 웹사이트를 죄다 뒤져가며 중고차를 찾아다녔다. 다행히 이틀 만에 마음에 드는 놈을 다시 만났다. 94년형 오펠 아스트라 콤비. 파이브 도어에, 18만km 주행, 가격은 1950유로. 색상은 보랏빛이 도는 짙은 청색에 디자인도 나름대로 미끈했다.

94년 형  오펠 아스트라
▲ 애마 당첨! 94년 형 오펠 아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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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뒷좌석이 앞으로 접혀지면서 잠자는 공간을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매트리스 한 장만 깔면 특별히 개조할 필요도 없이 움직이는 침대 방이 될 터였다. 아내와 나는 기분 좋게 그 자리에서 계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부터였다. 한국인 유학생의 명의로 차량을 등록하고 보험에 들었는데, 독일사회는 보험료를 현금으로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팔자에도 없는 독일 은행 계좌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아차, 수수료가 있다. 그것도 매달(!) 4유로. 게다가 통장을 해지할 때에는 24유로를 물어야 한다.

"이런, 기가 막힐 일이!"

1달러에 울고 웃는 배낭족의 이 피 같은 돈을! 그래도 어찌할 것인가. 길은 가야하고. 그래도 탈세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법이라고 하니 국제 민주시민인 우리 부부가 너그러이 이해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차량 등록을 하러 시청에 갔더니 자동차 소유주는 자동으로 라디오 시청료를 내야 한단다. 그 돈이 자그마치 6개월에 100유로! 마침내 아내의 탄식이 터져 나온다.

"으아~! 이러다간 배보다 배꼽이 크겠네!"

물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5개월 동안 본전 뽑느라고 매일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느라 고생 좀 했을 뿐.

이제 차 개조를 시작했다(사실 개조라고 거창하게 얘기할 것도 없지만). 먼저 뒷좌석을 접어서 생긴 바닥에다 종이박스를 붙이고 산악용 매트리스 두 장을 깔았다. 그리고 공간이 조금 남은 한 쪽 벽면에 종이박스를 오려붙여서 수납장을 만들었다. 또 창문 모양대로 종이박스를 오려서 차량과 같은 색의 포장지로 감쌌다. 필요에 따라 떼고 붙일 수 있는 커튼인 셈이다.

(침실로 꾸미기 전 모습)
▲ 애마를 공개합니다. (침실로 꾸미기 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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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틀에 걸쳐 ALDI, RIDL, PLUS 등의 저가 슈퍼마켓과 아시아식품점을 헤집고 다니며 쇼핑을 했다. 휴대버너용 가스, 휴지, 치약, 양초, 촛대, 생수, 식용유, 식빵, 계란, 버터, 치즈, 커피, 설탕, 잼, 땅콩크림, 햄, 오이피클, 라면, 건미역, 국수, 식초, 마요네즈, 토마토케첩, 참치, 정어리 캔, 오이, 호박, 마늘, 감자, 양파, 배추, 무, 과일, 밀가루, 사탕, 껌, 과자, 찹쌀….

휴~우. 쇼핑한 물건들을 쌓아놓고 보니 엄청나다. 모르는 이가 보면 유럽이 아니라 아프리카 오지라도 여행하는 줄 알겠다. 쿡쿡. 우습기도 하지만 한 편 마음이 아주 든든하다. 자동차용 유럽지도책과 노트북과 카메라 충전을 위한 '시가 소켓'용 인버터를 추가하고, 마지막으로 쌀 10kg과 고추장 한 통을 사서 의자 밑에 쑤셔 넣는 것으로 쇼핑 끝.

출발 전날. 옷과 책, 일기장을 직접 만든 수납장에 정리하고 나니 캠핑카가 따로 없다. 그런데 오후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5월의 하늘이 스산해지고 나그네 심경이 복잡해진다. 막상 내일 떠난다고 생각하니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커진다.

"잘 할 수 있을까?"

남들처럼 유레일패스를 들고 여행할 걸, 잠깐 후회를 한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언제나 시작하는 마음엔 두려움이 있는 법. 내일 아침이면 해가 뜰 것이다. 아니 해가 뜨지 않아도 좋다. 길을 나서는 순간 나는 이미 행복해하고 있을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아내와 함께 지난 2003년에서 2006년까지 근 3년 동안 배낭 하나씩 둘러매고 세계여행을 했습니다. 그 중 유럽에서는 중고차를 구입해서 19개국을 돌아보았는데, 그 기간이 앞뒤로 중고차를 사고파는 시간을 더하자면 2004년 4월 16일부터 10월 16일까지 꼭 6개월 동안입니다.

이미 [안녕 친구야, 세계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 중심으로 오마이뉴스에 연재했었습니다. 그때 몇 차례 중고차이야기가 언급되었는데, 이를 읽은 독자들과 지인들이 중고차여행에 대해 적잖은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덕분에 [유럽 중고차여행]만을 떼어내어 다시 한 번 여행기를 연재하기로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성원 부탁드립니다.

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태그:#중고차여행, #유럽여행, #독일여행, #괴팅겐, #자동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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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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