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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솔회'는 나라 사랑의 큰 뜻을 품고 평생을 나라와 겨레에 바친 외솔 최현배 선생의 높은 뜻을 이어받아 이를 널리 펴냄과 아울러, 이로써 우리 겨레와 사회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데 도움이 되려는 학회다.

 

우리나라는 외래문화 세력에 침식된 지 오래다. 따라서 외솔회는 강건한 민족 주체성을 겨레 마음에 심고 지녀온 전통을 다듬고 닦아 빛낼 수 있도록 새 문화 창조를 위한 연구 사업을 하며, 이를 통해 한국 문화와 한국의 얼을 세계에 널리 펴기에 큰 힘이 되려는 단체다.

 

'외솔'은 어떤 사람이던가? 그는 본관이 경주(慶州)이고 호는 외솔이며 울산 출생이다. 경성고보 재학 중 1910년부터 3년간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문법을 배웠다. 1919년 일본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원자격증을 받았으나 관공립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사퇴하고 고향에서 휴양하면서 조선인 상권(商權) 확보를 위하여 공동상회(共同商會)를 설립하였다.

 

 

1920년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1922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연구과에 다시 수학, 이어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1925년 같은 대학원에서 1년간 공부했다. 1926년 연희전문 교수가 되고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강제 사직 되었다.

 

실직한 동안 한글 연구의 완성을 위해 <한글갈(正音學)>을 펴냈고 1941년 연희전문에 복직, 도서관에 근무하였다. 조선어학회 창립에 참여하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이 되었으며,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8·15광복 때까지 3년간 복역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청 편수국장에 취임하여 새로 교과서를 만들었는데 이때 우리나라 교과서의 모든 기틀이 잡혔다고 한다. 이어 한글학회 상무이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51년 다시 문교부 편수국장이 되었다가 1954년 연세대학교로 돌아가 교수, 문과대학장, 부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주요 저서에 <우리말본><한글갈><글자의 혁명><나라 사랑의 길> 등이 있다.

 

 

이 외솔을 기리는 외솔회는 1970년 외솔이 세상을 뜨자 후학들이 힘을 모아 결성했다. 이후 외솔회는 홍이섭 초대회장은 물론 백낙준, 김두종, 곽종원 선생 등 당대의 학식 있고 신망받는 분들이 이끌어 왔고 직전 김석득 회장이 15년을 재임하면서 한글 3대 단체의 하나로 우뚝 서 왔다.

 

이 외솔회는 지난 3월 21일 한글회관에서 정기총회를 열고 새 회장으로 최기호 전 상명대 교수를 뽑았다. 그래서 최기호 회장을 만나 계획과 포부를 들어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젊어진 외솔회, 외솔정신으로 새롭게 펴나갈 터"

[대담] 외솔회 세 회장 최기호 교수

 

 

- 외솔 선생님은 어떤 분입니까?

"외솔 선생님은 독립운동을 하시다 3년 옥고를 치렀으며, 대단한 저서를 내신 분입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쓰는 문법은 모두 선생님이 다듬으신 것입니다. 또 해방 직후 문교부 편수국장을 맡아 모든 교과서의 바탕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때 음악교과서의 '높은음자리표', '도돌이표', '쉼표', 생물교과서의 '꽃받침', '꽃술' 같은 낱말이 생긴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저 학자가 아니라 한글, 민족운동가셨습니다. 편수국장을 하시던 중 한글 간소화 파동이 일어나자 편수국장을 내놓고 이승만 대통령과 싸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신 그런 분입니다. 교토대학 학위 논문인 '조선민족 갱생의 도'는 이분이 왜 민족학자인지를 알려주는 대단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정신과 실천이 어우러진 이 책에는 글은 한글로만 써야 하고 기계화를 해야 하며 쉽게 써야 한다는 원칙을 밝히셨지요."

 

최 회장은 외솔 선생에 대한 자랑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하기야 그분을 기리는 학회의 회장으로 그분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어디 될 일이던가?

 

- 외솔회는 주로 어떤 일을 해왔고, 정기총회의 결정은 무엇입니까?

"그동안 외솔회는 해마다 3사람씩 외솔상을 시상해왔는데, 어떤 국어학계도 못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 해마다 <나라사랑>이라는 학술지를 펴내 왔습니다. 현재 <나라사랑>은 114권째를 펴내 그것 또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전임 김석득 회장님께서 외솔회 이사장과 회장을 15년간 겸임해오셨습니다. 그러다 이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고 이사장은 외솔 선생님의 손자이신 최홍식 연세대 의대 교수에게, 회장은 제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김석득 전 회장은 한글운동계의 선비라 할 만큼 학식과 인품을 갖춘 분이다. 온화한 얼굴에 함부로 화를 내는 법도 없으며, 연세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낸 대학자로 많은 이들에게 신망을 받는다. 최 회장은 김석득 전 회장이 용퇴하신 것은 한글운동계의 개혁을 위해 솔선하신 것이라며, 이를 다른 원로들도 본받았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 그동안 외솔상 시상과 관련해 잡음이 있었습니다. 외솔회 새 회장이 되셨는데 외솔상 문제를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요?

"지난해 외솔상에 잡음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외솔상은 재단이사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그 심사위원들이 수상자를 뽑습니다. 그런데 추천자 가운데서 뽑아야 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좀 있었던 듯한데 어쨌든 잡음이 있었다는 데는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고, 앞으로 이에 대해 가능한 맑은 시상이 되도록 노력해나가겠습니다."

 

- 한글운동계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운동계는 역피라미드 구조가 된 지 오래고, 운동방식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생각은?

"한글운동계는 현재 젊은 운동가들이 없음을 잘 압니다. 그것은 그동안 원로들이 힘겹게 운동을 해온 탓에 경직된 까닭도 한몫했지만, 결국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특히 원로 운동가 선생님들은 젊은 운동가들과 호흡이 잘 맞지 않기 때문에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면 그분들이 2선으로 물러나실 필요도 있습니다. 그것을 외솔회 전임 김석득 회장님은 솔선해서 보여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 어른들에 대한 그동안 공과를 잊거나 예우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그 어른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글운동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내공을 이어받아야만 한글운동계의 바람직한 미래가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 앞으로 한글운동은 부정적인 운동보다는 긍정적인 운동으로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 앞으로 외솔회를 이끌기 위한 계획은 세우셨나요?

"아직 인수인계를 받기 전이라 현재로서는 자세한 그림은 그리지 못했습니다만, 몇 가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있습니다. 먼저 외솔 선생님을 젊은이들이 모르는데 위인전이나 전기를 펴내 알려나가도록 할 생각입니다. 또 사무실에 젊은 운동가들이 언제나 사랑방처럼 올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 것이고, 외솔상처럼 큰상만 줄 일이 아니라 작은 상도 주어 한글에 더 많은 사람이 사랑을 가질 수 있도록 칭찬하는 분위기를 만들겠습니다."

 

최기호 신임 외솔회 회장은 국어학을 전공한 학자면서 한글운동계에서 많은 일을 해왔다. '한글인터넷주소추진총연합회' 회장, '국어단체연합' 회장, '2006한글날큰잔치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학문과 운동을 아우른 몇 안 되는 인물이라고 칭찬한다. 이제 최 회장이 앞으로 어떻게 외솔회를 이끌어 나가고 한글운동의 개혁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지켜볼 때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외솔회, #최현배, #최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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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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