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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과 헌책방 문화


지난 10월 첫머리에 서울교대학보를 엮는 기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책과 도서관과 헌책방과 우리 말과 삶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가를 조곤조곤 들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10월 29일치(397호) 서울교대학보에 헌책방 문화 이야기가 한쪽을 거의 통틀어서 실립니다.


.. 요즘 학생들, 학교신문 참 안 보죠? 토론도 하고 얘기도 나누고 주고받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제대로 안 이루어지면 읽기가 힘들어요. 그렇게 안 읽다 보면 네 해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중요한 걸 놓치고 말지요. 그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매체가 있는데 자기 스스로 놓치고 있어요. 저도 예전에는 책을 읽을 때, 안 좋아하는 책은 안 봤지만 지금은 안 좋아하는 책들도 더듬어 봐요. 내가 안 좋아한다고 해서 나한테 도움이 되는 얘기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책읽기는 자기 삶을 바꾸는 일이거든요. 책읽기는 책에 담긴 줄거리를 자기만 뽑아먹는 게 아니에요. 그 책을 쓴 사람하고 그 쓴 원고를 책으로 묶은 사람하고 묶여져 나온 책을 파는 책방사람들하고 팔린 책이 다시 버려진 다음에 주워모으는 사람, 그 주워모은 책을 다시 되파는 사람, 이 모두와 같이 이루어져요. 이게 ‘헌책방 문화’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문화예요 ..  <학보에 실린 제 말>


서울교대라는 곳을 2000년 봄인가 여름에 한 번 가 본 적 있습니다. 그때 그 학교 도서관에 들어가서 어떤 책이 꽂혔고 어떤 책을 학생들이 즐겨 빌리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학보 기자님한테 ‘요즘 서울교대 도서관은 어떻습니까?’ 하고 여쭈어 봅니다. 찬찬히 이야기를 들어 보는데, 2000년 그때하고 거의 달라진 낌새는 없고, 외려 나빠졌을지 모르겠구나 싶습니다.

 

여덟 해라는 시간이 흘렀다면 그만큼 새로 나오는 좋은 책(교육 밭뿐 아니라 여러 갈래를 두루 헤아려)이 그만큼 쌓였을 텐데, 그만큼 쌓였을 좋은 책을 갖추자면 학교도서관은 크기를 넓혀야 합니다. 또한, 새로 나오는 책뿐 아니라 판이 끊어져 사라진 자료와 책도 모아야 하니, 학교도서관은 해마다 조금씩 살림을 키워야 해요. 그렇다면, 서울교대 학생들은 어디에서 책을 읽을까요? 아니, 책을 읽기나 할까요?


.. 수십 년 동안 제대로 된 독자를 만나지 못해서 읽히지 못한 책이 있어요. 헌책방에 가면 내가 첫 번째 독자가 되는 그런 책이 꽤 있어요. 그런 책들도 있기 때문에 헌책방은 새책방 구실도 하고 있어요. 그러면 도서관에서 책을 버리면 이 책이 어디로 갈까요? 헌책방으로 가겠지요. 아마 수천만 수억 권이 될 겁니다. 여러 공공단체에서 자료로 갖고 있는 책들이 있어요. 자료를 새로 사야 하는데 우리 나라는 자료실을 잘 안 넓히거든요. 그 넘치는 책들을 버릴 수밖에 없어요. 빌려가지 않는 순위와 오래된 것, 그게 버리는 기준이 돼요. 안 빌려보는 책이라고 해서 그 책이 버려져야 하는 책은 아니잖아요. 이를테면 백과사전이나 국어사전은 사서 보거나 도서관에 가서 보고 말지, 빌려가서 집에서 보지 않을 테니 대여율은 0이겠지요. 그 무거운 책을 어떻게 빌려가겠습니까. 그러면 그 책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헌책방밖에 없어요. 그런 대목에서 헌책방은 새책방 구실도 하고 도서관 구실도 하고 있어요 ..


서울교대학보를 엮는 기자님은 ‘학교를 마친 뒤 교사로 일하지는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교대를 나오고 교사가 되지 않겠다니? 아주 뜻밖인 생각이라, 그러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여쭈니, 아직 갈피를 잡지 않아서 찾아보고 있답니다.

 

그렇지요. 교대를 나오는 바로 그때부터 교사가 되어야 하지 않고, 또한 교대를 나온다고 모두 교사가 되어야 하지 않아요. 길찾기는 지금 곧바로 할 수 있으나, 시간을 두고 두루두루 우리 세상을 부대끼고 구석구석 삶터를 두 발로 밟아 나가면서 몸으로 느껴 차근차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면서 하나같이 100점만 맞아야 하지 않듯이, 90점도 좋고 70점도 좋고 30점도 좋고 0점도 좋듯이, 우리 삶에 100점이란 어디에 있겠습니까.


.. 헌책방 문화라고 따로 규격이 있지 않고, 헌책방을 여는 그 동네에 어떤 문화가 이루어져 있는 가운데 그 둘레에서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따라 문화가 달라져요. 동네사람들이 동네 새책방에서 사는 책이 동네 헌책방으로 들어가게 되거든요. 학생들한테 어떤 헌책방을 따로 추천할 수는 없고, 무엇보다도 먼저 가까운 헌책방에 가면 좋아요. 집이나 학교에서 가까운 곳으로. 동네 헌책방은 자기가 태어난 곳이잖아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를 느낀 다음에야 동네 헌책방에 있는 책을 느낄 수 있고, 다른 헌책방에 가서도 비로소 느낄 수 있어요. 그 다음은 스스로 다 찾을 수 있어요. 처음에는 한두 시간쯤 헌책방에 머물며 책을 살피셔요. 눈이 가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그렇게 책을 만지고 차례를 살피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헌책방 문화에 빠져 있을 겁니다 ..


우리들이 사는 곳은 지구라는 별이고, 아시아라는 땅덩이이고,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이며, 한겨레라는 피붙이이고, 무슨 시고 도고 하여 나뉘어진 곳에서 어느 동네나 어느 마을 어느 집입니다. 나와 함께 내 이웃이 있고, 내 이웃들한테도 다른 이웃이 있습니다. 모두 하나하나 이어져 있어요.

 

책읽기라고 한다면, 나부터 해서 내 식구며 동무며 이웃을 느끼고, 내 식구와 동무와 이웃한테 또다른 이웃이 되고 동무가 되고 식구가 되는 사람도 함께 느끼는 길잇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일본 간다 헌책방거리만 이야기하면서 우리네 헌책방 문화를 북돋울 수 없습니다. 미국이 어떻고 유럽이 어떻고 떠벌이면서 우리 삶터나 사회나 교육이나 문화나 정치를 가꿀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형편이 어떠한지 꼼꼼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 샅샅이 들여다볼 수 있어야, 시나브로 가꿀 수 있어요.


<2> 이명박을 좋아하는 서울교대 학생들


엊그제, 서울교대학교 11월 26일치(398호)가 도서관으로 왔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제17대 대통령선거, 당신의 선택은?'이라는 기획기사가 보입니다. 11월 19일과 20일, 이틀에 걸쳐 350 사람한테 설문받기를 한 결과를 싣습니다. 설문받기를 한 사람들 가운데 84.8%는 이번 대통령선거에 선거를 하겠다고 대답을 하는 한편, 자기가 밀어주고 싶은 후보를 다음처럼 밝힙니다.


 ┌ 없다 : 37.5
 ├ 이명박 : 28
 ├ 문국현 / 이회창 : 11.6
 ├ 정동영 7.2
 ├ 권영길 3.2
 ├ 이인제 0.8
 └ 그밖에(박근혜) 1.7


다음 설문으로, “대통령 후보를 볼 때 중점을 두는 것”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 정책 : 42.4
 ├ 청렴성(도덕성) : 19.2
 ├ 업적 : 10.2
 ├ 정치 성향 : 13.5
 ├ 추진력 : 12.1
 └ 그밖에(인간성) : 2.5


이렇게 나옵니다. 다섯 번째로 물은 말은 “자기가 밀어주는 후보를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느냐?”입니다.


 ┌ 하나도 모른다 : 11.5
 ├ 모른다 : 24.5
 ├ 보통이다 : 42.1
 ├ 알고 있다 : 18.5
 └ 아주 잘 안다 : 3

 

설문받기에서 자기가 대답하는 “보통이다”는 얼마나 알고 있다는 뜻일까요. 안다는 뜻일까요 모른다는 뜻일까요.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식을 조금 들었다는 뜻일까요. 조금 번거로울 수 있으나, 설문받기를 하면서, 자기가 밀어주는 후보가 내놓은 공약을 ‘시험 문제’처럼 내면서 제대로 아는가 모르는가를 따져 보면 어떨까 싶어요. 이렇게 한다면, ‘진짜로 아는지 어설피 아는지 잘못 아는지 하나도 모르는지’가 뚜렷이 드러날 테니까요.

 

학생들이 밝힌 ‘자기 깜냥’을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모른다’가 “36%”이고, ‘안다’는 “21.5%”입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내가 밀어주는 대통령 후보에서 가장 무게를 두어 살피는 대목’은 “정책(42.4%)”이라고 합니다. 정작 그 후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해 왔고 어떤 정책을 내놓고 있는지 모르면서, 그 후보가 얼마나 “깨끗한지(청렴-도덕)”, 그리고 “무슨 업적이 있는”지, “추진력은 얼마나 올바르고 알맞게” 보여주는지를 알 수 있을까요.

 

마지막 물음으로 “학생들 자기 정치 성향이 어떠한가?”를 묻습니다.


 ┌ 진보 : 3.7
 ├ 중도개혁 : 22.4
 ├ 중도 : 44.3
 ├ 중도보수 : 21
 └ 보수 : 8


이 설문받기를 놓고,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김용신 교수는, “학생들이 지지하는 후보들을 보면 진보 진형이라 할 수 있는 정동영 후보와 문국현 후보의 지지도는 합쳐도 18%를 상회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는 우리 대학 학생들의 정치적 성향이 중도보다는 중도보수 성향에 가까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개혁’이며 무엇이 ‘중도’이고 무엇이 ‘보수’일까요. 학생들은 자기 정치 성향이 어떠하다고 느끼기에 ‘진보-중도-보수’라는 말을 쓸까요.


<3> 책 안 읽는 유권자와 대통령후보


그제부터였나, 제가 사는 동네에도 대통령후보 걸개천이 내걸렸습니다. 하지만 이 동네에 살면서 대통령후보들이 내놓고 있는 정책이나 공약이 무엇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 신문을 펴고 텔레비전을 켜도 후보들 정책검증이나 공약 꼼꼼한 풀이가 담기지 않습니다. 무슨무슨 의혹, 무슨무슨 통합, 무슨무슨 지지율, 무슨무슨 방송토론 문제, …… 알맹이를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제가 조금 바지런히 움직여서 대통령후보들 인터넷방에 하나하나 들어가 구석구석 헤집으면서 공약과 정책을 살필 수 있겠지요. 그래, 저는 이렇게 해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분들은 어쩌지요? 집에 컴퓨터 없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인터넷은커녕 자판 두들기기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어쩌지요? 움직이기 힘든 어르신들을 부축해서 투표하러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투표하러 가기 앞서 후보들 정책과 공약을 차근차근 들려주면서 스스로 헤아리도록 이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서울교대 학생들 또한(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새 대통령이 풀어야 할 숙제’ 1번으로 ‘경제 정책’을 꼽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경제란 무엇인가?’를 밝혀 말하지 않습니다. 연봉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자리 얻으면 경제가 살까요? 경기부양책을 쓰면 경제가 살까요? 아파트 많이 짓고 여름ㆍ겨울 올림픽, 월드컵, 엑스포, 아시안게임, 문화축제들을 끊임없이 끌여들여서 새 건물 짓고 홍보활동 펴면 나라살림이 나아질까요? 무엇보다도, 우리한테는 “얼마쯤 되는 돈이 있어야 먹고살 만할 뿐 아니라 즐겁게 살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 살림은 ‘어느 만큼이 되어야 한다’는 금긋기부터 하고 나서 ‘경제를 살리든’ 무엇을 하든 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한 사람이 살아가기에 넉넉한 집 평수가 얼마쯤인지부터 금긋기를 해 놓고 나서 아파트 재개발을 하든 옛동네 간직하기를 하든 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더 많은 돈, 더 많은 옷, 더 큰 집, 더 비싼 밥과 술, 더 크고 빠른 차, 더 좋은 전화기와 사진기에 몸이 달아 있느라 아이들을 학원에 줄줄이 보내고 있으니 살림살이 구멍나고, 이 아이들을 대학교에다가 유학도 보내느라 그동안 쓴 돈이 엄청나게 많으니, 더욱 높고 큰 회사에 취직시키려고들 하고, 걱정없는 쇠밥그릇 일자리를 얻게 하고 싶어서 고시공부를 시키고 있지 않은지요.

 

자기 삶을 가꿀 수 있도록,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도 한 번 주어진 자기 목숨을 고이 여기면서 추슬러 나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참된 가르침과 배움은 어디로 밀려나 있을까요. 책 한 권 읽지 않고 있는, 아니 자기 마음밭을 살찌울 책 하나 손수 책방 나들이를 하며 애써 고른 뒤 온몸으로 곰삭이며 읽어내고 있지 않는 우리들 유권자이기에, 대통령 후보로 나오는 사람들도 마음밭 일구는 책 하나 가슴에 안으면서 이 나라 사람들을 살뜰히 굽어살피지 못하는 입에 발린 ‘서민’ 소리와 구름보다 높이 붕뜬 정책들과 살갗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들만 쏟아내고 있지 않은지요.

 

“책이 모든 것”이 아니라, “책은 우리 삶”으로 느끼는 가슴이 없기에, 자기가 걸어갈 길이 ‘돈-이름-힘’이 아닌 ‘사랑-믿음-나눔’이 되고 있지 못하기에, 헛발린 이야기와 소식들이 넘쳐나기만 하고, 이 넘쳐나는 물결에 휩쓸리며 정치에 등돌리고 투표에 손놓고 자기가 하는 일마저도 자기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려주는 일이 아니라, 한낱 돈뭉치만 쥐어들려는 데로 흘려가 버리지는 않는지.

 

머지않아 초등학교 교사가 될 서울교대 학생들은, 앞으로 자기가 가르칠 이 나라 아이들한테 ‘너희들이 가장 무게를 두어 생각할 대목은 이런 거야’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가르칠까 궁금합니다.

 


태그:#책읽기, #대선, #이명박, #서울교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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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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