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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표현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볼테르. 그는 태생적으로 반골 기질이 강한 사람이었다. 프랑스의 섭정에 맞서 싸우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꼭 한 올곧은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 정부에서 미움을 사서 추방당하고 쫓겨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위의 말은, 그의 인생이 그대로 보여주듯이,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불사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국에서 최근 볼테르의 말이 과연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볼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옥스포드, '특급 극우인사' 초청하다

 

사건의 발단은 '세계 최고 대학' '세계 최고 지성'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비롯됐다.

 

옥스포드 대학교에 한번 가본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과거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건물과 내부 시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곳이 정말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다수 거쳐 간 역사적인 곳이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옥스포드 시내 관광안내 버스를 타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이 대학 출신의 세계적 유명 인사들이 계속 나온다. 안내 버스가 법과대학 건물 앞을 지나면 장내 방송은 여지없이 "이 곳은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가 공부했던 곳"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힌다.

 

영국 사람들도 옥스포드 대학 출신이라고 하면 다시 한 번 그 사람을 쳐다볼 정도로 그 가치를 높이 쳐준다.
 
그런 옥스포드 대학교의 토론모임인 '옥스포드 유니언'이 최근 사고(?)를 쳤다. 영국에서도 알아주는 '특급 극우파' 인사들을 초청, 지난 26일에 토론회를 연 것이다. 이 토론회는 18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학생 자치 토론 모임. 지금까지 달라이 라마,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닉슨 전 미국 대통령 등을 비롯해서 2005년에는 포르노 스타 론 제레미를 초청하기도 했다.

 

"이민자 추방해야" "홀로코스트는 사실 아니다"

 

이 토론회가 개최되기 한 달 전부터 언론들이 떠들썩하게 보도하는 등 난리가 났다. '아니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일개 대학에서 여는 토론회 참석자 때문에 영국 언론이 이렇게 호들갑을 떨까' 싶을 정도였다. 여기에는 물론 영국 최고대학 옥스포드라는 '상징성'이 한몫했을 것이다.

 

이번 토론회의 초청발표자는 국민당(SNP) 총재인 닉 그린핀과 역사학자인 데이빗 어빙. 닉 그린핀 총재는 "정말 영국인 같지 않은 외국 이민자 수백만 명을 영국에서 추방해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소수 인종집단들에 대한 망언을 일삼는 인물이다. 그러다보니, 인종차별주의자(Racist)로 낙인찍힌 지 이미 오래다.

 

영국에서는 인종·나이·성 등으로 인해서 어떤 형식으로도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법률로 강력히 규정되어 있다. 그러 다보니 이에 어긋나는 발언을 대놓고 하는 사람들은 매우 부도덕하고 법률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사실 영국은 매우 백인 중심적인 사회다. 내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암묵적으로는 이런저런 형식으로 인종 차별적인 생각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 않고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주요 부분에서 그렇게 백인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또 한 명의 초청인사인 역사학자 데이빗 어빙. 그의 독설도 닉 그린핀 총재 못지않다. 그는 "히틀러는 대량학살을 지시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독가스실은 없었다"며 나치 정부의 홀로코스트를 인정하지 않은 역사학자로 유명하다. 이로 인해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3년간 감옥살이까지 했다.

 

격렬한 찬반 집회... "표현의 자유" vs. "나치 쓰레기는 집으로 가라"

 

토론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옥스포드 대학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이 사실에 분개했다. "인종차별주의자와 파시스트에게 이런 모임에서 연설할 기회를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특히 유대인 모임, 이슬람계 등의 소수민족들이 격분했다.

 

그럼에도 옥스포드 유니언은 이 토론회를 강행했다. 회장인 루크 트릴(Luke Tryl)은 "자유롭게 균형 잡힌 정보에 근거한 토론을 해야 한다"고 밝히고 그러려면 반대 의견도 들어야 한다며 이 토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사실 옥스포드 유니언은 이전에도 이 극우인사들을 초청할 것을 고려했지만, 반대 여론이 두려워 미루다가 이번에 강행했다는 후문이다.

 

토론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행사장 밖에는 옥스포드 뿐 아니라 멀리 버밍엄에서 온 학생, 소설가, 국회의원 등 찬반이 갈리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거의 1천명에 육박하는 사람이 이 토론회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기 위해 모인 것.

 

이 토론회를 찬성하는 한 여성은 "나는 국민당의 의견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듣고 싶다"며 "자유롭게 말하는 것조차 막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이들 찬성 집회자들은 볼테르의 이 '표현의 자유'의 말을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반대의견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이것은 표현의 자유와 상관없다, 이렇게 되면 파시스트에게 신뢰성을 부여해 그들로 하여금 활동을 해서 사회의 주류가 되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반대 측은 "나치 쓰레기는 집으로 가라", "국민당은 떠나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소신(?) 굽히지 않는 극우주의자들

 

두 명의 극우 토론자들이 도착하자, 반대 학생들이 이들의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서 길을 막는 등 소동이 일어났다. 급기야 경찰이 개입해서 이들의 행사장 진입을 도와준 후에야 간신히 행사가 이뤄졌다. 토론이 열리는 중간에도 반대하는 학생 등이 토론장 진입을 시도하는 등 토론 내내 주변 분위기는 험악했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토론회에서 이 극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소신(?)을 꿋꿋이 펼쳤다고 한다. 닉 그리핀 총재는 자신의 토론회 참여에 반대하는 군중을 히틀러의 광적인 지지자들로 비유하면서 "이 군중이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 만약에 그들이 독일 나치 소속이었으면 그들은 나치를 훌륭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며 비꼬기까지 했다. 역사학자 어빙도 "나는 그들이 내가 쓰기 원하는 것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내용대로만 쓸 것"이라며 주장을 꺾지 않았다.

 

토론 내내 바깥에서는 찬반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는 등 어수선했지만 토론회는 결국 큰 사고 없이 끝났다. 옥스포드 유니온의 회장은 "토론회가 잘 진행되었다"며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세계 최고 대학이라는 '옥스포드'는 자신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었다.

 

'철없는 옥스포드'... 토론 모임 탈퇴 선언 잇달아

 

이 토론회가 강행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과거에 옥스포드에서 공부하면서 '옥스포드 유니언'의 평생회원으로 가입했던 유명 인사들이 줄줄이 탈퇴를 선언했다. 한마디로 옥스포드 학생들이 이런 토론회를 연다는 것 자체가 "실망스럽다"는 이유다.

 

여기에는 여당, 야당 구분이 없었다. 줄리언 루이스 보수당 국회의원은 탈퇴 의사를 밝히는 편지에서 "이 악당들"을 토론회에 참석하게 하다니 "창피하다"고 밝혔다. 여당 국회의원인 데스 브라운과 어스틴 미첼도 탈퇴를 선언했다.

 

영국 언론들의 반응도 역시 차가웠다. 일간 <인디펜던트>는 영국 내에서도 법률을 어기는 듯한 발언을 일삼는 극우적인 인사들은 공식적인 연설이나 토론회에 초청하지 않는 게 암묵적인 관행인데 옥스포드 학생들이 이를 어긴 것이라며 이들의 '미숙한 행동'을 지적했다.
 
일간 <가디언>도 "표현의 자유의 지나친 남용"이라며 "표현의 자유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든 것이 인정되는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고 일침을 놓았다. 일간 <데일리텔레그래프>도 옥스포드 유니온이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이 시끄러운 일을 벌였고, 결국 이 목적을 달성해서 속으로 웃고 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태그:#표현의 자유, #옥스포드, #닉 그린핀, #데이빗 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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