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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동 1의 44 일대서 바라본 동네. 이 일대가 모두 헐리고 서울성곽공원이 된다.
 송월동 1의 44 일대서 바라본 동네. 이 일대가 모두 헐리고 서울성곽공원이 된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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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 그런데 과연 첫눈이란 기준은 무엇일까. 바로 종로구 송월동에 있는 서울기상관측소가 기준점이다. 이 곳에 첫눈이 내리면 서울의 공식 첫눈이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벚꽃 표준목도 서울기상관측소에 있다. 기상관측소의 벚나무가 20% 정도 꽃망울을 터뜨리면 서울 개화일이 된다. 개나리 또한 기상관측소 백엽상 옆에 심은 개나리가 피기 시작하면 인정받는다.

송월동의 행정동(동사무소를 단위로 하는 행정구역)은 교남동으로, 송월동·교북동·홍파동· 행촌동·교남동이 교남동 관할이다. 교남동엔 유난히 일제시대 유적이 많다. '봉선화'를 지어 식민지 백성의 마음을 울렸던 홍난파의 고택을 비롯해 <대한매일신보>를 만든 배설(미국명 베델), 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UPI통신 특파원 알버트 W. 테일러(Taylor, Albert Wilder)의 집이던 딜쿠샤가 교남동에 있다.

국내 최초 여기자이자 독립운동을 한 최은희가 살았던 곳도 바로 이 지역이다.(국내 최초 여기자가 이각경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다.) 또한 송월동길 근처 평동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살았던 경교장이 있다.

이처럼 역사유적이 많은 곳이지만, 교남동은 큰 변신을 눈앞에 두고 있다. 평동·교남동·송월동 일대 도심지 6만600여 평이 뉴타운에 포함돼 고층 아파트단지와 주상복합 위주 상업지역으로 개발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송월동 기상대 주변 지역 3224평은 공원으로 바뀐다. 몇 년 뒤면 지금 이 지역 지도는 완전히 바뀔 것이다.

최근 두 달 동안 자전거를 타고 또는 걸어서 이 일대를 둘러봤다.

성곽으로 바뀌는 동네 송월동, 사람이 모두 떠나 '쓸쓸'

교남동 일대를 둘러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강북삼성병원 옆 언덕길에서 시작하는 방법이 있고, 사직터널 윗길 행촌동에서 시작하는 방법이 있다. 여기선 강북삼성병원 옆 언덕길을 소개한다.

종로구 평동에 있는 경교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살았던 곳으로 여기서 안두희의 총알에 쓰러졌다. 송월동 가기 전에 볼 수 있다.
 종로구 평동에 있는 경교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살았던 곳으로 여기서 안두희의 총알에 쓰러졌다. 송월동 가기 전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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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삼성병원을 옆에 두고 언덕길을 오르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아주 이색적인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김구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살던 경교장이다. 종로구 평동 108-1에 있는 경교장은 시도유형문화재 129호다. 1938년 금광 재벌 최창학이 지은 양옥주택으로 처음에는 죽첨장(竹添莊)이라 불렸다. 이후 김구가 들어가면서,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 경구교(京口橋)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이라 바꾸었다.

김구를 통과한 총알이 박힌 곳. 2005년 복원했다.
 김구를 통과한 총알이 박힌 곳. 200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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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 안엔 백범기념관(전화 02-2001-2781)이 있다. 일요일을 빼놓곤 연중 문을 연다. 기념실 안엔 경교장 축소 모형, 백범 흉상, 집무실 책상, 백범의 생애와 활동 패널 등이 있다.

2005년 6월 내부를 복원했지만 창문과 창틀은 그 시절 것 그대로다. 눈길을 끈 것은 창문에 박혀 있는 총알 자국. 당시 김구의 몸을 관통하고 꽂힌 총알 자국을 2005년 당시 복원한 것이다. 총알 자국을 보니 그 당시 선생이 저격당하던 장면이 그려졌다.

경교장을 나와 언덕길을 계속 오르면 서울기상관측소가 나온다.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스위스대사관, 가파른 오르막길로 걸어가면 홍난파 생가가 나온다. 오른쪽 동네는 성곽공원으로 바뀌는 곳이라 모두 빈 집이다.

도시경관기록보존사업을 하고 있는 문화우리(www.culturec.org)가 지난 10월 서대문역에서 철거 전 교남동을 찍어 전시한 바 있다.

송월동 골목길에 들어섰다. 좁은 길은 두 사람이 지나갈 만한 넓이다. 어떤 길은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만한 곳도 있다. 이런 곳을 지나던 사람들은 서로의 숨소리까지 느꼈을 것 같다. 입구 쪽에선 보기 좋은 벽돌담이 많았는데, 안쪽으로 들어가자 색깔 없는 시멘트벽으로 변한다. 기와지붕이 있는가 하면 슬레이트지붕도 있다.

송월동 골목길. 대부분 빈 집이다.
 송월동 골목길. 대부분 빈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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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떠난 동네는 스산해 보인다. 문짝은 떨어져 있고, 곳곳에 버린 물건들이 내팽개쳐져 있다. 벽이 심하게 부서진 집 앞에 사진이 한 장 떨어져 있다. 대여섯 살 정도 되는 아이가 어딘가 쳐다보고 있는 흑백 사진이다. 철거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 눈이 온 다음날 갔을 때는 응달쪽에 눈이 곱게 쌓여 있었다. 이미 사람이 떠난 동네니 눈 위엔 사람 발자국 하나 없다. 빈 방에 들어가 창문 밖으로 아래를 내다봤다. 높은 곳에서 보면 서울이 얼마나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인지 알게 된다.

2007년 1분기 서울 총인구는 1038만 1711명. 1년 전에 비해 4만 5410명이 늘었고, 2년 전에 비해 7만 3573명이 늘었다. 경기도로 빠져나간다곤 하지만, 아직까지 서울인구는 계속 늘고 있다.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배설과 테일러 가문

철거촌을 빠져나오니 공터가 보인다. 2007년 12월 31일까지 서울성곽 근린공원 부지조성을 위한 철거공사를 마친다고 안내문이 서 있다. 여기서 몇 발자국 걸어가면 홍난파 고택(홍파동 2-16)이다. 2004년 헐릴 위기에 처하자 서울시가 특별교부금 8억 원을 들여 겨우 산 집이다. 하마터면 집터만 남을 뻔했다.

지금까지 문화재등록 예고기간에 훼손·철거된 문화유산이 적지 않다. 박목월 선생 생가, 스카라 극장 등 191건이나 된다. 등록 예고가 발표되자마자 하루나 이틀 사이에 헐린 곳도 있다. 사라지고 남는 것은 한 순간이다.

홍난파는 '봉선화' '성불사의 밤' '낮에 나온 반달' 등 식민지 백성의 마음을 울린 노래의 작곡가로 평가받았으나 최근 일제 말기 친일 음악단체에서 활동한 것이 알려지면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하지만 예술가의 감성이 묻어 있는 듯한 집은 예쁘기만 하다. 빨간색 벽돌벽과 묘하게 어우러진 두 개의 삼각지붕이 동화에 나오는 집 같다.

'봉선화'를 지은 작곡가 홍난파가 살던 집. 홍파동에 있다.
 '봉선화'를 지은 작곡가 홍난파가 살던 집. 홍파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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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파동 2-38번지는 <대한매일신보> 창설자 및 사장이었던 배설(영어명 배델)이 살았던 자리다. 1904년 3월 10일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온 그는 일본에 우호적인 신문사 편집방향에 반대하다 해임됐다. 1909년 5월 1일 37세 나이로 홍파동 자택에서 병사했는데, 안타깝게도 현재 홍파동 2-38번지가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집터는 찾을 방법이 없다. 배설은 일본에 맞서다 병사했고 배설의 부인 마리 모드는 모든 재산을 그대로 두고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우리나라는 그의 집조차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다. 미안할 따름이다.

홍난파 고택에서 2-3분 정도 걸어가면 골목 끝에 서울 어디서도 보기 힘든 대저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미국식 저택인 '딜쿠샤'다. '행복한 마음, 기쁨, 이상향'을 뜻하는 힌두어인 딜쿠샤는 한국을 참으로 사랑했던 테일러 가문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이다.

테일러 가문의 뿌리는 조지 A. 테일러(Taylor, George Alexander, 1829-1908)에서부터 시작한다. 채금 전문가였던 조지 테일러는 1896년 67세 고령으로 운산 금광 개발에 참가했다. 1908년 12월 10일 79세로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묘는 양화진 제1묘역에 있다.

딜쿠샤. 테일러 가문의 한국 사랑이 묻어있는 곳이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이란 뜻. 행촌동에 있다.
 딜쿠샤. 테일러 가문의 한국 사랑이 묻어있는 곳이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이란 뜻. 행촌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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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테일러의 아들인 알버트 W. 테일러(Taylor, Albert Wilder) 또한 금광 기술자이자 일제강점기 UPI통신 특파원이었다. 알버트 테일러는 1919년 독립선언서 일부를 침대 밑에 숨겼다가 한국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렸다. 그 해 아들 브루스를 낳은 알버트 테일러는 1923년 행촌동에 집을 짓고 딜쿠샤라고 이름붙였다.

일본에게는 미운털이었을 그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5월 한국을 떠났다. 8·15 광복 후 한국에 남겨둔 재산을 찾고자 미군정청 고문으로 한국에 돌아왔고 1948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 역시 양화진 제1묘역에 묻혔다.

알버트 W. 테일러의 부인이었던 메리 테일러는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다 한국 남편 옆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 따라 그의 묘 또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남편 옆에 만들어졌다.

딜쿠샤 내부
 딜쿠샤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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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때까지 딜쿠샤에서 산 아들 브루스 테일러는 1940년 미국 대학 입학을 위해 서울을 떠났다. 그 뒤 딜쿠샤는 알 수 없는 건물로 묻혀 있다 지난해 1월 31일 브루스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딜쿠샤의 비밀이 알려지게 됐다. 3대에 걸친 그들의 한국 사랑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선교문화신문>(2005년 9월 13일)은 이 집에 살고 있는 안정희(1931년생), 서금순(1937년생)씨의 증언을 실은 바 있는데, "17가구의 무연고자가 지금도 살고 있으며, 바닥과 창틀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적고 있다.

증언에도 나오듯이 이 집은 상당히 큰 저택이다. 도로에서 가장 가까운 벽 쪽에 장독대 몇 개가 놓여 있고, 그 옆을 보면 'Dilkusha 1923'라고 적힌 글씨를 볼 수 있다.

입구 쪽으로 가면 실내를 살짝 엿볼 수 있는데, 나무 바닥과 나무 계단이 인상적이다. 맨발로 걸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다.

딜쿠샤 앞엔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다. 나이가 무려 420살이다. 나무가 있던 곳이 임진왜란의 명장 권율(1537-1599)의 집터다. 집터만 남아 있고 건축물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니 별로 감흥이 없다.

송월동에서 본 한 장의 흑백사진. 아이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송월동에서 본 한 장의 흑백사진. 아이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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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에서 마을 입구로 걸어 나오면 아래로 차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사직터널이다. 행촌동에서 사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예전엔 삼형제고개라고 불렀다. 터널이 뚫리면서 삼형제고개는 사라졌다.

옛날 고개 밑에 주막을 경영하는 삼형제가 살았는데, 우애가 깊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조선시대에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고자 그의 집 문 앞에 세우는 붉은 문)이 세워져 삼형제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단지 지금은 사직터널, 교남동으로 불릴 뿐이지만 불과 몇 십년 전만 해도 이 곳은 삼형제고개였다. 그렇게 역사는 쉽게 잊히고 지워진다. 테일러씨가 지난해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딜쿠샤는 영원히 '희한한 집'으로만 기억됐을 것이다.

재개발이 시작되면 누군가는 이 곳을 떠나고, 또 누군가는 이 곳에 새로 들어온다. 새로운 사람이 많이 들어오는 만큼 마을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진다. 교남동은 쉽게 지워버려선 안되는 곳이다. 그러기엔 이 땅이 안고 있는 사연이 너무 많다.

식민지 시절의 아픔과 울분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마을. 이제 이 마을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태그:#교남동, #미니벨로, #딜쿠샤, #경교장, #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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