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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에서의 이틀 밤이 그렇게 흘러갔다. 2007년 7월 마지막 밤을 야간무도회와 함께 보냈다. 우리는 계속해서 중국 각 도시에 흩어져 사시는 귀환 중국노동자분들의 가정을 방문해야 했기에 천진에 계속 머물 수만은 없었다.
 
우리가 떠나는 날 목서관 선생님이 점심을 사시겠다고 오셨다. 목서관 선생님은 지난 번 호에 언급한 제유진, 회송년 선생님과 절친한 친구 사이시다. 세 분 모두 중국 천진시가 고향이시며 한국에서 불법체류노동자(‘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더 바른 표현) 생활을 하다 비슷한 시기에 귀국을 하셨다. 제 선생님과 회 선생님은 두 분 모두 건설회사에서 중장비를 다루시고, 목 선생님은 무역회사 중역으로 근무하면서 꽤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계셨다.

 

 

식사 전까지 반나절을 함께 지내던 회 선생님이 식사시간이 되자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졌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 즈음 식당으로 허겁지겁 들어오는 회 선생님.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다.


“아 회 선생님. 아니 어딜 그렇게 급히 갔다오시는 거예요?”


“차 국장님. 심양에 가면 양씨 아줌마에게 이것 좀 꼭 전해주세요. 어젯밤 이거 사느라 하루 종일 천진 시내 백화점을 돌았습니다.” 회송용(가명)씨가 건네 준 건 다름 아닌 참기름.


“아니, 참기름은 갑자기 왜요?”

 

시커먼 비닐종이에는 회 선생님이 허둥지둥하며 급하게 포장했을 참기름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왕매옥(가명)씨가 차 국장님 편으로 참기름을 꼭 좀 보내라고 해서요.”

 

회 선생님은 연신 땀을 훔치면서 목적을 달성한 안도감에 빙긋이 웃고 있다. 왕 선생님과 회 선생님은 서로 애인 사이. 원곡동에서 서로 노동자로 일하던 중 깊은 친구가 되어 동거까지 하던 관계. 그리 ‘건전한’ 관계가 아니라 쉽게 둘 사이를 축복해줄 수도 없고, 먼 타향에 와서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는 막역한 사이를 상담센터 일을 한다는 권한으로 훼방을 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냥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한번은 왕 선생님의 남편이 한국에 잠시 방문했을 때 자신의 남편에게 회 선생을 소개하며 함께 밥도 먹고, 회 선생과 함께 지내는 동안에 촬영한 단란한 사진들을 보여준 사건에 많이 놀라기도 했었다. 중국이란 나라가 워낙 크고 다양한 민족들이 살다보니, 한두 사람의 경우를 들고 중국 전체의 문화를 보편화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뒤늦게 식사에 합류한 회 선생님이 식사를 마치자 우리는 기름과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는 비닐을 들고 천진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제 선생님이 한 군데 꼭 보여줄 곳이 있다며 어디론가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가 안내한 곳은 천진시내를 흐르는 강 하이허(海河)였다. 서울로 치자면 한강인데 한강보다는 훨씬 못하다며 조금은 쑥스러운 듯 미안한 기색으로 하이허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있잖아요. 제 어린시절은 이 강에서 다 보냈죠. 중학교 때까지도, 점심시간이면 이 강물에서 매일같이 수영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강물이 너무 많이 더러워졌어요. 보세요.”

 


과연 하이허는 한강에 비해 폭도 많이 좁았고 굉장히 오염되어 있었다. 그리고 강물의 부영양화가 심해져서 짙은 녹색을 띄었다. 다행히 하이허 정화운동을 통해 최악의 상황에서는 조금 개선되었다고 한다. 군데 군데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하허강의 정취를 그나마 만회시켜주었다.

 

 

'그래 누구에게나 추억은 있게 마련이다. 어린 송아지를 몰고, 실개천에서 멱을 감는 시골정취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정서는 우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땅에서 나고 자라는 건 우리 한민족을 넘어 호흡을 하는 인간개체, 아니 온 생명의 공통분모다. 비록 매연으로 가득한 도시이지만, 오염된 강물을 바라보며 옛 시절을 아쉬워하는 한족분의 감흥을 잠시 감상하며, 우리는 다른 것보단 같은 것이 너무 많은 사람들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천진시는 과연 공해가 심하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숙녀들의 자태가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어쩌면 여행객의 지나친 감상이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매연을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 숨을 겨우 참으며 자전거 페달을 밟는 노동자의 회한을 단지 낭만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책임한 여행자의 감흥일 뿐이다. 2007년 8월 초,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겨드랑이 사이로 연신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한여름. 숙녀들은 이 더위 속에서도 어깨 위로 쏟아지는 매연분진들을 피하기 위해 얇은 면사포 손수건을 어깨에서 팔까지 뒤덮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노동자들의 자전거 행렬을 바라보며, 그들의 존엄한 노동이 더 인정받는 사회가 될 수 있기를 하느님께 기도하고 우리는 천진역으로 향했다.

 


니먼 께이 ***, 니먼 께이 ***”
박 선생님. 아니 이 할머니 도대체 뭐라는 거예요? 아까부터 자꾸 저만 졸졸 따라와요.”


천진역에서 표를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백발의 할머니가 나에게 자꾸 말을 거신다. ‘생존’ 중국어에만 겨우 익숙한 내가 본토박이 할머니의 걸쭉한 중국어를 알아들을 리가 만무했다. 구걸을 한다고 하기엔 할머니가 꽤 점잖게 보였다. 궁금증을 견딜 수 없어서 박 선생님께 물었다. 기차역에서 길게 늘어선 여행객들의 후미에 가서 시간이 부족해 쩔쩔 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신속히 표를 끊어주는 특이한 직업의 소유자다. 듣고 보니 새치기나 마찬가지인데 특이한 것은 차표를 발부하는 직원들도 그 할머니가 오면 일순위로 우선권을 준다는 것이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땅이 넓다보니 별별 직업군들이 다 있다. 그래도 서울시내에서 리어카를 끌며 폐지를 주우면서 추운 겨울밤을 이겨내셔야 하는 할머니들보다는 훨씬 수월한 일자리를 갖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열차표 구입을 의뢰하였다. 할머니는 황급히 열차표 판매대로 가서는 잽싸게 표를 구매하셨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우리는 모두 놀라서 입을 벌렸다.

 

천진~선양. 저녁 6시 출발. 새벽 1시 37분 도착. 소요시간은 7시간 37분이다. 여기서 잠깐만, 많은 분들이 아시는 내용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중국의 기차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자.

 

중국에서 기차의 좌석을 나누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앉아서 가는 의자인가 누워서 가는 침대인가다. 그리고 이 둘도 각각 쿠션이 딱딱한지 부드러운지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으니 총 네 종류의 좌석이 있는 셈이다. 부드러운 침대를 '란워'라 하고 가장 비싸며,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가는 것을 '잉쭤'라 하며 가장 싸다. 밤을 이용해 기차를 타는 배낭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은 잉워, 즉 딱딱한 침대인데 얇은 쿠션이 있어서 잠 잘만 하다.

 

누워서 가는 기차를 예매하려면 적어도 3일 전에는 차표를 예매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좌석에는 주로 여행객들이 많다. 우리는 현지인들이 평소에 이용하는 객실을 이용하고 싶어서 일부러 미리 차표를 예매하지 않았다.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했다. 제 선생님 일행이 열차 안에까지 배웅을 나오셨다. 중국열차가 참으로 낭만적인 건, 이렇게 배웅하는 사람들이 열차 안으로까지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헤어지기 전에 우리는 사진촬영을 했다. 제 선생님이 어디서 장미 한 송이를 구해오셨다.  이제 박 선생님 일행은 산뚱성으로 돌아가야 하고, 우리는 랴오닝성으로 간다. 일주일간의 여행을 끝내고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모두들 하나 같이 한국에서 불법체류의 아픔을 겪으신 분들이라, 우리가 다시 이 곳을 찾지 않는 한 서로 다시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한국으로 가기 전 혹시 양 선생님(외국인노동자의 집 식구들 중 한 명이셨던)댁 방문을 위해 짱수성에 들리게 되면 박 선생님과 다시 만나기로 하고 작별을 했다. 열차가 막 출발했다. 방금 전까지 웃음소리 가득했던 일행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차창 밖으로 제선생님 일행이 일제히 우리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으신지 박 선생님이 창문 밑으로 우리를 빼꼼히 쳐다보신다. 태어나서 처음 동네를 벗어나보셨다는 양 선생님은 울음보를 금세라도 터뜨려버릴 것만 같다. 열차가 떠나며 일행들이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독일군 열차라도 탄 듯, 남는 이와 떠나는 이 모두 마음이 너무 아프다. 우린 원곡동에서 너무 깊이 정이 들었다.

 

 
 
 
 
 

“열차에 타서 정말 힘들면 무조건 식당 칸으로 가면 됩니다요! 그리고 일단 식사 주문을 하시고 오래 오래 버티면 됩니다요. 그리고도 계속 눈치를 주면 그 자리를 사시면 됩니다요. 아마 밥값에 얼마를 더 보태면 자리를 팔 겁니다요.”


박 선생님이 우리와 헤어지면서 마지막으로 건넨 힌트였다. 가장 싼 사격에 탈 수 있는 딱딱한 좌석표인 잉쭤에 머무르다, 정 힘이 들면 해결해보라며 알려준 ‘중국 3등 열차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열차표를 살 때만 해도 ‘까짓 것. 조금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가면 되지. 그게 뭐가 힘들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열차가 출발하며 우리가 찾아간 잉쭤 객실. 다들 무슨 피란민들이라도 되는지 좌석 위에도 좌석 사이사이에도 온갖 보따리와 짐짝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열차가 흔들리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그들만의 저녁식사를 시작한다.

 

흙을 채 털어내지도 않은 굵은 파뿌리를 손으로 두어 번 툭툭 쳐서 흙을 떨어낸다. 그리곤 아삭 아삭 몇 번을 씹더니, 사발면 국물을 후루룩 후루룩 요란하게도 드신다. 그리고 건너편에선 중국식 빈대떡을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낸다. 역시나 집 앞 텃밭에서 갓 파낸 것 같은 굵은 대파 양쪽을 손으로 비틀어 뜯어낸 후 빈대떡 위에 펼친다. 그리곤 빈대떡을 돌돌 만 다음 한 입 베어 먹는다. 기차 안인지, 시장골목인지 모를 정도이다.

 

십년만의 상봉이라도 한 듯 열차 안은 제각각 자기 일행들과 모여앉아 쉴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낯익은 풍경 속에서 우리는 이방인의 상념에 젖어 한참 서 있었다. 우리가 예매한 좌석은 이미 알 수 없는 만담꾼들의 놀이터가 된 지 오래이다.

 

몇 시간이 지났다. 더 이상 이렇게 서서 가기에는 무리. 박 선생님께서 알려준 비법을 동원해보기로 했다. 발 디딜 틈 없는 3등 객실, 잉쭤 칸을 다섯 개 지나니 식당 칸이 있었다. 우리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흥정할 것도 없이 바로 식당 좌석 하나를 사겠다고 했다. 이런 일이 종종 생기는지, 안내원은 흔쾌히 허락하였다. 우리는 한 사람당 50위안(7천원)에 좌석을 사고 가장 싼 저녁 음식을 주문했다.

 

“아. 저 아저씨 뭐야. 제복은 입어 가지구. 되게 깡패같이 보이네.”
“진짜 저 뚱땡이같이 생긴 놈 끈질기게 붙어 있구만!”


일행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식당좌석을 구매하고 저녁식사까지 주문했는데, 우리가 돈을 주고 산 좌석에 아까부터 제복을 입은 일행들이 식사를 해야 한다며 앉는다. 그리곤 식사가 끝난 한참 후에까지도 자리를 비울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었다.


식당 종업원에게 따져 물으니, 열차 공안이라며 이제 곧 자리를 비울 테니 기다려달라고만 한다. 공안이란 말에 우리는 약간 긴장했다. 혹시나 우리말을 알아들을지도 모르니 불평도 하지 말아야 한다며 우리는 눈빛으로만 잔뜩 불만을 표출했다. 일행 모두가 다 자리를 떴는데도 유독 한 명만이 남아서 담배를 연신 피워대고 신문을 보며 거드름을 피운다.


“제가 짐작컨대, 저 아저씨 아마 우리 골탕 먹이려고 하려는 게 분명해요. 돈으로 좌석 사는 놈들 한번 고생해봐라. 뭐 이런 뜻이 아닐까요?”


나는 일행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 후, 무슨 묘안이 없겠는지 일행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중국 공안들은 잘못 건들기만 하면 무조건 말도 안되는 꼬투리를 잡고 벌금을 부과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접했기에 일행들은 매우 조심하게 행동하자고 했다. 그러는 사이 일행 중 둘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옆 식탁에 양해를 구해 잠시 의자에 앉은 다음 억지로 새우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래 좋다. 벌금 부과하라면 하라지.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공직자인데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갈 리가 있겠어?”


나는 장난기와 객기가 적당히 발동했다. 뭐 이국땅에 와서 불미스런 사건 하나 만들고 가도 나중에 다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공안에게 다가갔다. 그 공안은 잠시 나를 흘낏 쳐다보더니 다시 무척 건방진 자세로 담배를 물고는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여기요. 칭따오 피져우 하나 주세요.”

 

나는 종업원에게 맥주 한 병을 시켰다. 그리곤 맥주컵 세 개를 주문한 후 아직 잠이 들지 않은 일행 한 명을 테이블로 불렀다. 이윽고 맥주가 도착했다. 나는 얼른 맥주병을 따고 맥주를 따랐다.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이 신문을 읽고 있자 나는 테이블을 톡톡 두 번을 쳤다. 공안이 쳐다보자 나는 얼른 맥주 한 잔을 건넸다. 공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약간 민망한 듯 맥주를 받았다. 나는 나머지 두 잔에 맥주를 채운 후에 공안을 보며 조금 높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치얼스!”

 

공안이 어이가 없는지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원곡동 중국인 노동자들이 커베이(컵째로 나오는 술) 술을 마시며 늘 외치는 건배 제의, ‘치얼스!’ 그 한마디에 공안은 박장대소를 하면서 피고 있던 담배를 얼른 잿털이에 털어냈다. 이제 좀 뭔가 되겠구나 싶어서 나는 잠을 자고 있던 일행 한 명을 깨우고 통역을 부탁했다. 공안은 겨우 맥주 한 잔의 뇌물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무려 심양에 도착하기까지 다섯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공안은 업무를 완전히 접은 듯했다. 맥주를 한잔 받아 마시고는, 근무중이라 맥주는 더 마시면 안 된다고 하면서 종업원에게 계속해서 안주를 주문했다. 그의 한 마디에 새로운 안주가 끊임없이 나오기 시작했다. 땅콩을 우리 일행에게 먹기 좋게 까주기 시작했다. 땅콩이 떨어질라치면 왜 서비스가 이렇게 오늘따라 더디냐며 손님들 대접 좀 제대로 못하겠느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선양시로 가는 내내 현대자동차 이야기(일행 중 한 명이 현대 직원이었다), 디지털 카메라 이야기, 대장금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공안의 부인이 대장금 프로에 열광하는 한류팬이어서 한국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꽤 많았다.

 

열차가 선양역으로 다가갈 무렵, 공안이 우리에게 제안했다. 공안은 장춘에서 상하이까지 운행하는 열차에서 근무하는데 살고 있는 곳은 장춘시이다. 우리의 여정이 연길에까지 가는 것이라 가는 도중에 심양에 꼭 들르라 했다. 특별히 ‘개고기’를 사주겠다고 했다. 일행 모두 다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렸는데도, 그는 장춘에 개고기가 아주 유명하니 꼭 개고기를 사주겠다고 한다. 한국친구들을 사귀게 되어 너무 기쁘다며, 꼭 장춘에서 개고기를 먹고가라고 강권했다. 우리는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부르면서 헤어졌다.


“잘 가세요. 쉬거(허 형)”
“장춘에서 봅시다. 처띠(차 동생).”


낯선 땅에서 새롭게 사귄, 우리 일행의 두 번째 친구다.

 

난 수첩을 꺼내들고 허형의 전화번호 밑에 이렇게 적었다.

 

'태초부터 이방인이란 없었던 거다!'


태그:#천진, #제유진,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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