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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산악열차는 라우터브룬넨(Lauterbrunnen)을 출발해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로 향하고 있었다. 기차는 라우터브룬넨이 자리한 협곡에서 우뚝 솟아오른 산 능선 쪽으로 가파르게 올라갔다. 기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방금 하이킹을 한 라우터브룬넨의 아름다운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스모그 없이 짙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고, 내 마음도 두둥실 흘러간다. 초록색 잔디밭의 향연 위로 참으로 목가적인 나무집들이 이어진다. 경사가 아주 심한데도 푸른 초원 위 곳곳에는 알프스의 소들이 방목되어 있다. 그리고 알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꼽히는 곳이 한눈에 들어왔다.

알프스 융프라우를 오르는 중간 기착지이다.
▲ 벵겐 입구. 알프스 융프라우를 오르는 중간 기착지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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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의 해발 1274m에 자리한 벵겐(Wengen). 라우터브룬넨에서 출발한 열차가 정차하는 다음 역인 벵겐은 융프라우를 향한 열차들의 중간 기착지이다. 차창 밖으로 눈을 올려 보니, 아이거(Eiger)의 북벽과 베터호른(Wetterhorn)의 장엄한 기슭이 마주 보이고, 산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빙하들이 눈앞으로 파고든다.

나와 나의 가족은 일정이 없던 벵겐에서 내렸다. 융프라우를 오르는 다음 산악열차를 타려면 꽤 기다려야 되겠지만,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마을이 나의 가족을 부르고 있었다. 벵겐에 내려서 하룻밤을 청하는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기에 나의 마음을 더 잡아끌었다.

벵겐 마을에 들어서자, 운치 있는 마차와 작은 전기자동차가 운행되고 있다. 벵겐이 해발고도가 높은 알프스의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알프스의 이 작은 마을은 환경보호를 위해 휘발유 차량의 진입이 금지된 스위스 9개 지역 중의 한 곳이기 때문이다. 승용차를 가지고 이 마을까지 올라온 사람들도 마을 앞 대형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산악열차나 케이블카를 이용한다.

온통 나무색으로 어우러진 집들의 정경이 아름답다.
▲ 벵겐 마을. 온통 나무색으로 어우러진 집들의 정경이 아름답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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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겐은 이러한 친환경 정책 때문에 공기가 신선하고, 알프스의 무공해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고도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산기슭 아래의 라우터브룬넨보다 기온도 더 내려간다. 여름철, 살에 닿는 온도도 쾌적하다. 마을 자체도 이보다 더 조용할 수는 없다. 이 고요함을 느끼면 벵겐이 꼭 한번 방문해 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산 속에 자리 잡은 벵겐의 민가와 호텔, 상가의 샬레 집들은 온통 나무색이 잘 어우러진 정경을 연출하고 있다. 역 앞에는 큰 삼각형 지붕에 예쁜 분홍 꽃들로 장식된 호텔이 많고 호텔 뒤쪽 거리에 식당과 상가, 슈퍼마켓 등이 자리하고 있다. 산 속에 있는 이 상가들은 오후 6시만 지나면 모두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늦은 시간에 도착하면 아무 것도 살 수가 없다.

알프스의 산 위쪽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벵겐 호텔의 숙박비는 꽤 비싼 편이지만, 마을의 중심거리를 따라 위로 더 올라가면 오랜 전통을 가진 가정집 숙소들도 많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재충전을 하고 싶었지만, 미리 예약해 놓은 오늘의 일정상 마을만 한번 둘러보고 융프라우로 다시 올라가기로 했다. 벵겐에서의 숙박은 돈도 필요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알프스의 깊은 산속에 자리한 청정 마을이다.
▲ 벵겐 전경. 알프스의 깊은 산속에 자리한 청정 마을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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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과 민가 정원의 배경은 웅장한 알프스이고, 알프스의 능선은 급경사로 지붕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알프스 산기슭 위로는 푸른 산안개가 퍼지고 있었다. 구름사이로는 융프라우의 만년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벵겐의 모든 집들의 창밖으로는 이 거대한 알프스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다.

벵겐의 대자연에는 여름과 함께 겨울이 있다. 산 아래는 여름이지만 산이 높아지면 겨울이 나타난다. 북쪽을 보면 눈 쌓인 겨울이지만, 남쪽을 내려다보면 아직 여름이 남아 있다. 짙은 초록빛 전나무 숲 위로 더 이상 흴 수 없는 설산이 색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는 디지털 카메라의 액정화면으로 방금 찍은 사진을 보면서, 색상이 너무 다른 산의 모습이 마치 합성된 사진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의 딸도 콤팩트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벵겐의 사진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딸은 계속 웃으면서 “찍자!”라는 말을 반복했고, 나와 아내는 ‘찍자’를 딸의 별명으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유럽 여행을 오면서 나의 딸에게 디지털 카메라 한 개를 선물했다. 어린 녀석은 그 카메라를 가지고, 이렇게 아름다운 정경은 자신의 사진기에 꼭 남겨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녀석이 예상보다 너무 많은 사진을 찍어서 내 디지털 카메라의 메모리 카드 여분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웃겼다.

마을 주변에서는 알프스의 산하를 걸어서 섭렵하는 하이킹 족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등산 막대 한 개를 들고 등에는 작은 배낭 하나만을 메고 있었다. 여름 알프스의 환상적인 날씨가 수많은 사람들을 하이킹에 몰리게 하고 있었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융프라우행 산악열차에 다시 올랐다. 열차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열차 아래로 스키 리프트를 타는 곳이 지나간다. 세계 스키 월드컵 대회가 열렸던 이 스키 명소의 리프트에도 겨울이 오면 많은 스키어들의 인파가 몰리고, 이들은 아랫마을인 벵겐에 짐을 풀 것이다. 그리고 어떤 스키어들은 이 벵겐의 활강 레이스에서 공중 점프를 선보이기도 할 것이다.

햇볕이 차창을 통해 열차 안으로 들어오고 있지만, 날씨는 더욱 시원해지고 있었다. 자연과 함께 하는 철로 옆으로 줄기 곧은 전나무 숲이 계속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연두색 잔디밭 위에 길게 이어진 진녹색의 침엽수림의 조화가 기막히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나의 시야에 융프라우의 전면이 군더더기 없이 가득 들어왔다.

산악열차의 차창 밖으로 하나 둘씩 여행자들의 머리가 나와 있다. 열차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몸을 비틀어가며 알프스의 정경을 사진에 담는다. 푸른 공기를 만끽하고 융프라우의 설산을 더 가까이에서 보고자 하는 소망이다. 산악열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열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지만 나는 이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스위스, #벵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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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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