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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놀이'가 될 순 없을까? 놀이의 핵심은 참여와 즐거움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정치가 '코미디'나 '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참여는 없고 쓴웃음과 냉소만 횡행한다. 정치가 술자리의 안주가 되었을 땐 그나마 희망이 있었다. 하여 이번 연재물의 목표는 정치의 술안주화(化)다. 결코 코미디나 쇼처럼 일회성으로 끝날 수 없는 대통령 선거를 여러분의 술자리 안주로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요리사'가 되겠다. 독자 손님들의 적극적인 주문도 기대한다. <편집자주>

10일 오후 4시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 입구.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경선의 마지막 순회투표지 수도권(서울·경기·인천)의 개봉을 앞둔 직전이었다.

 

심상정 노회찬 권영길 3명 후보의 연설이 끝나고 축하공연이 이어질 즈음, 당원들은 속속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피워물거나 커피를 마시며 삼삼오오 모여 결과를 예측했다. "권영길이 된다"는 전제로 이뤄지는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권영길 캠프의 박용진 대변인은 일정을 잡느라 분주했다. 당선자 발표 직후 10분 간격으로 잡혀있는 방송사 인터뷰 일정, 논평 발송, 이튿날 후보 동선을 체크하느라 바빴다. 권영길의 과반 득표에 이변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오후 4시 20분경. 심상정 캠프의 이지안 공보특보가 뛰어나오며 외쳤다. "결선 간다!" 거의 외마디 비명에 가까웠다. 공식적인 발표 전, 중앙선관위로부터 확인했다며 속보를 전했다. 권영길 당선을 전제로 미리 기사를 작성해 둔 기자들도 일대 혼란이었다.

 

[심상정] 거세진 바람, 충북에서 태풍으로

 

그랬다. 이변이었다. 제주에서 시작된 11개 권역 순회투표가 진행되면서 권영길 후보의 누적득표율은 늘 50%를 넘겼다. 곧장 대선 티켓을 딸 것이라는 전망이 압도적이었다. 권 후보는 보다 압도적인 지지를 호소하며 결선 없이 1차에서 끝낸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했지만 불안감은 남았다. 선거가 막판으로 갈수록 '아슬아슬한 과반'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심상정 후보가 그 '대세론'에 제동을 걸었다. 수도권에서다. 앞서 강원지역까지 권영길 후보의 누적득표율은 50.2%. 과반 벽은 서울에서 깨졌다. 인천·경기에서 권 후보는 56%를 상회하는 성적을 올렸지만 서울에서 37.5%에 그쳤다. 심상정은 인천과 경기에서 노회찬 후보를 누르며 선전했고, 서울에선 31.6%를 따냈다. 그 결과 전국 총 누적득표율은 ▲권영길 49.37 ▲심상정 26.08% ▲노회찬 24.56%로 나타났다. 권영길-심상정의 결선투표가 결정됐다.

 

불과 1%로 안 되는 과반 미달. 하지만 의미는 적지 않다. 언론들이 '권영길의 과반 득표 실패'를 제목으로 뽑는 건 그 때문이다. 권영길은 1등을 하고서도, 그것도 2위의 두 배에 달하는 승리였지만 사실상 패배로 비춰진 것이다. 개표결과 발표 직후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권영길이 이름값을 못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권 후보는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이번이 세 번째 도전인 권영길은 민주노동당의 간판 얼굴이다. 지난 두 번의 대선을 거치면서 국민들은 '민주노동당 하면 권영길'로 등치되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다져진 내부 조직력도 상당했다. 당내 과반을 차지하는 자주파(NL)도 권영길 지지를 선언했다. 당의 여성의원들(이영순·최순영·현애자)도 권 후보를 밀 정도로 대세론은 균열을 보이지 않았다. 힘 있는 후보였다.

 

그런데 바람이 불었다. '심바람'이다. 첫 번째 경선지역인 제주에서 2위에게 1표 뒤지는 결과로 3위를 하더니, 몇 차례 노회찬 후보를 제치고 2위를 차지하며 북상했다. 오진아 보좌관은 "2·3등을 하면서도 환장하는 캠프는 우리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늘 예상 목표치를 넘어서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풍은 충북에서 불었다. 1위였다. 충북의 유권자 수는 제주 다음으로 적었지만 43% 득표율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한미FTA'를 자신의 브랜드로 만든 심 후보가 농민 표를 자극한 결과다. 그 때부터 심상정 캠프의 목표는 결선행으로 굳어졌다.

 

심 후보의 선전은 과연 '바람'이라 할 만 했다.

 

작년 11월 당 싱크탱크인 진보정치연구소에서 당원을 상대로 한 지지도 조사에서 ▲권영길 49% ▲노회찬 28.6%, ▲심상정 7.4%로 나왔었다. 또 올해 초 1월, 당 기관지인 <진보정치>의 ‘대선후보 적합도’ 조사에선 ▲노회찬 38.7% ▲권영길 36.8% ▲심상정 10.8% 순으로 나타났다. 심상정은 늘 꼴찌였고, 그 격차도 컸다.

 

경선에 돌입하기 전, 권영길-노회찬 캠프 사이에서 벌어진 '네거티브 공방'이 위험수위까지 갔던 건 그 때문이다. 권영길 캠프는 '노풍(노회찬 바람)'을 견제했다. 심상정 후보는 물러서 있었다. 매주 꾸준히 정책공약을 발표했고,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를 상대로 정책논평을 발송했다. 

 

심상정 후보의 정책자문을 맡고 있는 정태인 박사(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는 선거가 제주-광주·전남-대구·경북-대전·충남을 돌았을 때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고 평가했다. 심상정은 3322, 노회찬은 2233(등수)으로 각각 상승-하강 곡선을 그릴 즈음이었다.  

 

"원래 예측은 노회찬이 1등을 할 수도 있다는 것 아니었나. 근데 안 떴다. 사실 초기에 심상정은 안될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어, 그게 아니네?' 정도의 반응은 이끌어냈다. (심상정) 바람이 확 분 것은 아니지만 바람의 조짐은 일고 있다. 결국 '실력'이 통하는 거다. 본선에서 여권과 이명박 후보와 싸울 상대로 누가 실력이 있냐는 것이다. 수도권으로 올라올수록 격차는 벌어질 것이라 본다."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권영길] 1% 부족한 과반, 그리고 무시 못할 '현재'

 

이날 개표 행사가 끝나고 주요 간부들에게 물어봤다. 결선을 선택한 당원들의 표심을 어떻게 보는가? 의원들은 특정 후보의 유불리를 의식해 말을 아꼈지만 '변화'를 바라는 '당심'이라는 점에선 큰 이견이 없었다.

 

"민주노동당의 대표주자를 진지하게 검증하려는 자세가 드러났다. 후보를 빨리 결정해 다른 당과의 경쟁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에선 아쉬움이 있지만, 결선 과정을 통해 국민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선 도움이 될 것이라 본다." (현애자 의원)

 

"당의 변화를 요구하는 결과다. 거기까지만 말하겠다." (단병호 의원)

 

"이대로 가면 안 된다. 새로운 변화를 보여라. 보다 젊고 역동적으로 분발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그것이 진보정당의 모습이다." (최순영 의원)

 

"결선은 당연한 결과다. 3자가 경쟁하는 구도에서 1차 과반을 얻는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이 열기로 진보진영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끌어내는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천영세 의원)
 
"획일적인 사고에 벗어나 당의 변화와 미래에 대해 열린 생각을 해야 한다는 주문으로 받아들인다. 당 지도부도 고민해야 할 문제다." (문성현 대표)

 

"과반에 육박한 권영길은 역시 무시 못할 현재라는 점을 보여줬다. 동시에 넘어야 할 산이라는 점도 보여줬다." (이상규 서울시당 사무처장) 

 

심상정 캠프의 상황실장 겸 대변인을 맡고 있는 손낙구 보좌관은 '분석'이 아닌 '속내'를 드러냈다. 올림픽경기장 인근에서 열린 지지자들과의 뒤풀이(메뉴는 감자탕)에서 소주 몇 잔을 받아마신 뒤끝이라서 일까? 

 

"내 나이 올해로 마흔 여섯이다. 아이들도 크고 있고 사실 경제적 어려움도 더 감당하기 힘들다. '내가 더 민주노동당에 있어야 하나' 나를 설득할 근거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번에 희망을 봤다. 당원들이 기가 막힌 결과를 만들어냈다. 아슬아슬하게 권영길에게 과반을 허락하지 않았고, 심상정과 노회찬도 경쟁하라는 수치를 만들어줬다. 진보는 변화에 가장 민감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그렇지 못했다. 진보정당의 성장을 기대하는 국민의 눈높이와 그 간격을 좁혀야 한다."

 

이 날 경기도 부천에 산다는 당원 송씨는 여기저기 술상을 돌며 "기적을 만들어 내자"고 목청을 높였다.

 

"나는 노회찬과 심상정 지지자였다. 그런데 심상정의 남편에게 전화를 받고 심상정을 선택했다. '심·노' 표를 합치니까 '권'을 넘어서더라. 두 가지의 기적이 필요하다. 첫째, 노회찬 지지표를 다 가져와야 한다. 둘째 투표율이 90%를 넘어야 한다."

 

맞다. 심상정의 결선 승리는 불가능 쪽에 가깝다. 심 후보는 "결선은 1차 투표의 연장선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강조하지만 "어차피 권영길이 될텐데"라는 당심을 뒤엎긴 역부족이다.

 

일그러진 얼굴... "운동권 정당, 친북당, 민주노총당"

 

한 심상정 캠프의 관계자는 "권영길 표를 흔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 전략이 뭐냐고 물으니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러면서 "내가 왜 민주노동당에 있어야 하는지, 그 실존적 고민을 던지는 수밖에…"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지난 연말 당원을 상대로 한 심층면접 조사에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와 부정적 이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 긍정적 이미지: 깨끗한 정당, 서민을 위한 정당, 할 말을 하는 정당
▼ 부정적 이미지: 운동권 정당, 친북당, 민주노총당

 

이번 경선 과정이 특정 후보의 당락을 떠나 국민 속에서 거듭 나는 진보정당이 됐으면 하는 바람은 민주노동당 당원 뿐만 아니라 선뜻 마음을 주지 못하며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밤 11시. 권영길·심상정 캠프 참모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회의 중이었다. 어떤 전략을 짜는 걸까?

 


태그:#심바람, #심상정, #권영길, #민주노동당,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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