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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이라크군이 퇴각하면서 불을 지른 이라크 남부 루메일라 유전에서 미군병사가 쌍안경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다.
ⓒ 연합뉴스

이라크 원유법(Oil Law)을 놓고 미국과 이라크 정부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이 절대적인 힘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무의미해 보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라크 의원들의 저항도 만만찮아 미국의 뜻대로 원유법이 통과되기는 힘들 듯하다.

원유법은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세계에서 매장량이 가장 많은 이라크 원유의 생산, 판매, 수익 원칙을 규정하는 법이다. 이 법의 최종 초안은 지난 2월 26일 이라크 국무회의에서 의결됐고 3월 15일까지 법안 통과를 위해 이라크 의회에 상정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재 의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가운데 미국은 5월 31일까지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다국적기업에 유리하게 돼 있는 조건들

초안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다국적기업에게 지나치게 유리하게 돼 있는 투자와 계약 조건이다. 초안에 따르면 이라크 정부와 PSA(Production-sharing agreement)라 불리는 생산분배계약을 맺는 다국적기업들은 통상 10년 정도인 다른 경우와 다르게 최장 30년까지 이라크에서 원유를 채취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산유국에 대한 투자에서보다 월등하게 높은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

원유관련 문제 감시단체인 OCI(오일체인지인터네셔날/Oil Change International)는 PSA 방식은 투자자에게 특히 유리한 계약 방식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산유국들은 이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OCI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쿠웨이트 같은 이라크 이웃 산유국들은 국가가 철저하게 해외 투자를 통제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필요가 있을 때 특정 기간 동안만 외국기업을 고용하고 이들이 원유생산 이익에 직접적으로 간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지난 1월 초기 초안을 입수한 영국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원유법 초안이 다국적기업들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어 초안대로 법이 통과될 경우 BP(British Petroleum), 쉘, 엑슨, 쉐브론 등 영국과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이익을 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줄곧 이라크 전쟁과 원유가 무관함을 주장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의 진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최종 초안에서도 다국적기업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 핵심 조항은 수정되지 않았다.

OCI는 원유법은 초안 작성부터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라크 원유부(Ministry of Oil)는 미국이 고용한 베어링포인트사의 자문을 받아 초안을 마련했고 초기 초안은 작년 7월 제일 먼저 미국 정부와 다국적기업들에게 보내졌고, 9월엔 IMF에 보내졌다. 이런 과정에서 몇몇을 제외한 이라크 의원들은 내각이 초안을 통과시킨 2월까지도 초안 내용을 알지 못했다.

부시 대통령은 원유법은 이라크 내 모든 종족들이 원유생산에서 나오는 수익을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이라크 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 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 의회도 원유법 통과는 이라크 정부가 종족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고 화해로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며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대부분의 미 의원들은 이라크 정부가 원유법 통과를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것은 종족 사이의 공정한 수익분배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원유법은 이라크 정세 안정을 위한 시금석 중 하나며 원유법이 통과돼야만 이라크 정부가 원하는 미군 철수를 구체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원유법을 둘러싸고 미국과 이라크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미군 순찰대에 돌을 던지고 있는 이라크 어린이들.
ⓒ AP=연합뉴스

이라크 의원들 "원유법 통과돼도 저항 때문에 실행되기 힘들 것"

그러나 이라크 의원들은 수니, 시아, 쿠르드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현재의 원유법 초안에 강하게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초안이 장기적으로 이라크의 원유 생산과 분배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의원들이 강하게 저항하는 이유다.

이라크 의원들은 미국이 이라크의 주권을 이야기하면서 원유법 제정에 간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현재의 초안이 통과돼도 국민들의 저항 때문에 실행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각종 보고서들도 미국이 만든 현재의 초안은 이라크 내 종족들 사이의 수익분배에 대한 내용은 거의 포함하지 않고 다국적기업의 투자와 수익에 대한 것만 명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닝>은 지난 주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원유법과 관련된 문제를 인식하고 이라크에 원유법 통과를 재촉하지 않도록 동료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의원들은 원유법을 미군 철수와 연계하지 말아야 하며 이라크 국민들에게 공정한 법이 제정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라크 원유생산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다국적 기업들의 투자가 절실한 것이 사실이다. 오랜 세월 동안 투자가 되지 않아 낙후된 생산 시설을 현대화시키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살해, 납치, 무장 폭력이 난무하는 이라크에 선뜻 인력을 파견할 기업을 찾기는 힘든 상태다. 일부 원유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투자하는 기업들에게 다른 산유국에 대한 투자보다 후한 수익을 보장해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라크 의원들 또한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의원들은 원유법이 이라크 국가 재건에 너무나 중요한 법이기 때문에 이라크 국민들보다는 외국 투자자들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 법을 미국의 일정에 맞춰서 성급하게 처리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맞서고 있다. 나아가 미국이 이라크 국민들에게 공정하지 못한 원유법 통과를 재촉한다면 이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원유 때문이었다는 주장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라며 역공을 가하고 있다.

원유생산은 이라크 국내총생산의 70%, 이라크 정부 수익의 95%를 차지한다. 원유 생산 정상화는 현재로선 안정적인 재원이 거의 없는 이라크의 국가 재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한 종족 사이의 갈등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공정한 원유법이 필요하다.

▲ 2005년 석유는 엉망이 된 이라크 경제의 주수입원이며 에너지 인프라와 관계 종사자들이 이라크무장세력으로부터 빈번하게 공격목표가 되고있다. 사진은 이라크 바스라 남동부 15km의 알-슈 아에바유전에서 인부들이 장치를 점검하고있는 모습
ⓒ 연합뉴스 로이터

5월 31일까지 얼마남지 않았지만...

이런 맥락에서 국제시민단체들은 이라크 장래를 위해 중요한 원유생산에 대한 모든 권리는 이라크가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라크 의원들을 지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OCI는 지난 17일 하원의장인 민주당 펠로시 의원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미군 철수 문제를 원유법 통과와 연계한다면 비난을 면하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각종 국제문제와 관련된 캠페인을 벌이는 아바즈(AVAAZ/avaaz.org)는 10만명을 목표로 이라크 의원들을 지지하는 국제 온라인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바즈는 이라크 의회가 국민들에게 공정한 분배가 이뤄지도록 원유법을 결정해야 하며 미국과 다국적기업 등 모든 외부의 영향이 배제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미국이 원하는 시한인 5월 31일이 며칠 남지 않은 가운데 이라크의 장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원유법 문제는 이라크 내 무장폭력, 미국의 이라크 전쟁 예산과 철수 문제 등에 가려 언론의 조명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이라크 의원들이 종파 분열을 떠나 미국의 압력에 맞서 자국의 주권과 이익을 지켜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태그:#이라크, #원유법, #미국, #아바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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