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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시청률은 바닥을 헤매고 있지만 한국 드라마를 깨나 본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단연 화제가 되고 있는 작품이 <마왕>이다. 재미있는 것은 요즘 인기인 미국드라마, 즉 <미드>에 빠진 사람들 중에서도 <마왕>의 흡입력에 놀라고 거기에 기꺼이 빠져드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사랑타령이 대부분인 한국 드라마에서 드문 소재인 추리극이라는 점과 <미드>의 치밀한 구성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이 열광하는 이유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소재와 줄거리라면 충분히 한국 드라마도 요즘 인기가 치솟고 있는 <미드>의 공략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며 상기된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인일 수밖에 없는 시청자들이 <마왕>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마왕>의 기본 줄거리는 물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역시 제대로 '한국적'이기 때문이다. 고도의 산업화에 따라 변화된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치중하는 다른 드라마들과 달리 <마왕>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문제와 한국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소통 방식에 기대고 있다.

선과 악의 모호한 구분

<마왕>은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한 인간 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과 관계를 고려한 대응에 따라 선 또는 악이 표출된다는 한국적인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마왕>은 두 명의 주인공인 오승하(주지훈 분)와 강오수(엄태웅 분) 모두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이며, 내면에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라고 끊임없이 시청자들을 설득한다. 한 명은 현재의 악이고 다른 한 명은 과거의 악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어느 한 주인공도 선 또는 악으로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과거에 악했거나 또는 현재에 악하지만 두 인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선과 악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에도 의문을 던지게 된다.

시청자들이 선과 악을 분명하게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남자조차 외면하기 어려운 두 남자 주인공의 매력과 때때로 보이는 그들의 가련하고 연약한 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마왕>이 한국인들에 내재해 있는 선과 악에 대한 모호한 구분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C. 프레드 알포드(C. Fred Alford)는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Think No Evil)>란 책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서양사회에 존재하는 절대적 도덕 개념으로서의 '악(evil)'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절대적 악의 개념이 없는 한국인들은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며 한 인간이 처한 상황과 그를 판단하는 자신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한다. 즉 한국인들은 절대 선이나 악은 존재한다고 보지 않으며 한 인간이 선 또는 악을 행하게 만드는 상황을 고려해 선과 악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과 악에 대한 다면적 접근은 상대가 자신과 특별한 관계에 있을 때 더욱 두드러진다. 즉 선 또는 악을 행한 당사자가 내 가족이나 집단에 속했을 때는 판단하는데 더욱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마왕>의 시청자들이 살인자에게조차 연민을 느끼고 지지를 보내는 것은 이러한 한국적 정서와 맞닿아 있고, 마왕은 주인공들에 대한 끊임없는 인간적 접근을 통해 시청자들의 그런 한국적 정서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의 핵심인 가족

ⓒ KBS
<마왕>의 주인공인 오승하는 형과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 때문에 12년간 복수만을 생각하며 살았고 복수를 위해 변호사가 되었다. 복수가 자신의 삶 전체를 파괴하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그는 잔인한 복수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설정이 시청자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것이 억울하게 죽은 가족을 위한 복수이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주인공 강오수는 아버지의 어긋난 사랑과 명예 때문에 사고로 친구를 죽인 책임을 지고 용서를 받을 기회를 잃었다. 강오수의 회피가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가족인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고 죄를 고백하는 것은 아버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가족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외부와 소통하는 방식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집단이다. 가족을 거부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기에 한국인들은 가끔은 맹목적일 정도로 가족사에 철저하게 주관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 이런 주관적인 접근은 죄의식을 부추기지도 않으며 비록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평을 들을지언정 타인으로부터 심한 지탄을 받지도 않는다. <마왕>에서 주인공들의 행동을 정당하게 만드는 것은 정체성 핵심으로서 가족을 이해하는 한국적 정서가 시청자들에게 설득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배려 그리고 이중적 소통 방식

<마왕>은 사랑을 풀어가는 방식에서 탁월하게 한국적이다. 쉽게 시작되고 끝나는 사랑이야기가 수두룩하고 이제는 영화 같은 진한 키스 장면조차 쉽게 볼 수 있는 한국 드라마에서 <마왕>은 순간적으로 스치는 손길과 교차하는 눈빛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전달한다. 한국 시청자들에게 이런 간접적인 표현방식은 전혀 낯설지 않고 그 의미를 읽어내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가슴시린 사랑의 감정을 보다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그러나 전혀 노골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이 <마왕>에서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소극적인 사랑의 표현은 '사랑하기 때문에 다가갈 수 없는' 한국적 정서를 반영한다. 두 남자 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를 망설이는 이유는 각각 과거와 현재의 악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자신으로 인해 상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배려에서다. 한국인이 아니고는 그리고 한국적 정서를 가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표현이다.

<마왕>은 고맥락 소통방식(high-context communication)을 통해 시청자들과 소통한다. 이것은 저맥락 소통방식(low-context communication)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 용어들은 에드워드 T. 홀(Edward T. Hall)이 <문화를 넘어서(Beyond Culture)>라는 책에서 처음 고안해냈다.

저맥락 소통방식은 주로 언어를 통해 의도하는 의미를 모두 전달하지만 고맥락 소통방식에서는 언어가 모든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말로 표현되지 않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때론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한국처럼 집단주의 문화에서 주로 나타나는 의사소통 방식이다.

<마왕>은 추리극이라는 특성과 한국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완벽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시청자들은 고맥락 의사소통 문화에서 단련된 해석능력을 총동원한다. 이러한 이중적 의사소통은 언어를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눈빛, 손짓, 표정, 몸놀림, 심지어는 부수적인 조명이나 화면 구성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배우들과 시청자들과의 의사소통이 이뤄진다.

물론 이런 의사소통 방식은 다른 드라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왕>은 한국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의사소통 방식을 최대한 복잡하게 활용하고 있고, 시청자들은 자신들의 해석능력을 백퍼센트 이상 발휘해 배우들과 소통하는 '짜릿한 감동'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현실을 반영하는 사회구조

<마왕>이 열성 시청자들을 자극하는 이유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살인과 복수라는 극단적인 소재를 통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승하는 누구보다 법을 준수해야 하는 변호사지만 법의 약점을 이용해 복수를 한다. 그리고 인권을 옹호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국회의원인 강오수의 아버지는 약자를 짓밟고 아들의 살인을 덮는 모순이 일어난다.

시청자들은 이들을 극중 인물이 아니라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인물들로 이해한다. 오승하는 또 사회적 약자였던 자신의 가족이 당했던 일을 복수하기 위해 사회적 기득권층에 합류했다. 현 사회구조 내에서는 약자의 입장으로 기득권층에 속한 가해자와 대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마왕>이 지적하는 사회구조 문제에 공감하는 이유는 그것이 한국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복수를 감행하는 오승하란 인물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비난도 할 수 없는 심리적 딜레마에 빠진 것은 이러한 사회구조 내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권력자에 대항하는 것이 약자에게는 여전히 버거운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마왕>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한국사회가 수십 년은 더 씨름해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를 보게 되고 그래서 더욱 열광하게 되는 것이다.

태그:#마왕, #한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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