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전주 고사동 영화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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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가 이렇듯 빛났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예전에도 몇 번 와보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딴판이다. 그 곳이 맞나 싶다. 지금 지프거리는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전주 고사동 영화의 거리(지프거리)를 걷고 있으면 이 거리가 내뿜는 열정과 아름다움에 그만 취하고 만다. 불가항력이다. 이곳에서는 나이·성별·국적·직업 등 일상의 사소한 명찰들은 그저 던져버릴 수밖에 없다. 그저 온몸을 내던져 자연스럽게 동화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누구나 젊은이가 된다. 그리고 친구가 된다. 아, 아름답다, 도무지 저항할 수 없다 지난 목요일 개막 이래 점점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 이 거리는 금요일 오후를 기점으로 토요일 오후, 최절정에 이르고 있다.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지기 일보 직전과 같은 아슬아슬함이 가득하다. 스릴 만점이다. 그러나 이 긴장과 스릴이 흥미진진하다. 오히려 이 거리의 사람들은 이 밀도 만점의 팽팽한 분위기를 퍽 즐기고 있는 듯하다. 참 다양하기도 한 사람들이 이 거리를 찾는다. 얼굴도 다양하고 나이도 다양하고 패션도 다양하고 피부색도 다양하다. 그러나 약속이나 한 듯 한 손에는 영화의 거리의 지도를 쥐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 커피나 휴대폰. 어디서 무슨 영화를 볼까 나름, 행복한 고민 중이다.
 <font color=a77a2>[왼쪽]185편의 작품 중 몇 편을 고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듯. <font color=a77a2>[가운데] 잠시 영화도 접고 책에 시선을 묻어본다. <font color=a77a2>[오른쪽] 기사 송고 전까지 황금주말도 기자들에게 그림의 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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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영화를 볼까, 아니면 디지털 삼인삼색을 시도해 볼까. 그게 꽤 난해하다던데…. 가만, 오늘 저녁 임상수 감독과 대화가 있다는데 거기나 가볼까, 아니 야외상영도 괜찮은데. 오늘은 고 이수현의 삶을 그린 <너를 잊지 않을 거야>를 한다고 그랬지. 에라!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길거리 공연도 괜찮다. 벤치에 앉아 사람구경하는 것도 영화만큼이나 재밌는 걸!' 조금만 관심을 두고 돌아보면 이 거리에는 톡톡 튀는 재미있는 이벤트들이 숨어있다. 영화 한편이라도 더 보려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이 바쁜 와중에 100m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영화 티켓팅도 아닌데 뭘까나. 알고 모니 모치킨회사에서 제공하는 무료 치킨을 먹기 위한 실속족들의 집념어린 기다림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위성회사에서는 영화표를 준다고 손님들을 호객하고 있다. 실속족들에게는 이것도 놓칠 수 없는 호재다.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 이것저것 다 귀찮은 '귀차니스트'들은 지프거리 도서관에 앉아 잠시 책 속에 시선을 묻기도 한다. 신간도서 1000권이 구비되어 있다. 빨리 읽으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몇 시까지 반납하라는 조건도 없으니 신간 편하다. 그러다 정 답답하면 활력충전소에서 대여해주는 자전거 타고 지프거리 한바퀴 도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래저래 축제는 즐기는 자의 몫이다. 치킨 시식, 자전거 대여, 영화티켓 선물... 실속파들 모여라!
 ▲ 군산에서 영어교사를 하는 애쉴리(25·캐나다)와 다나(24·캐나다) ▲23살 동갑내기 커플 김성환·석지양씨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는 김인홍(51)씨 부부 ▲아들 은찬이와 함께 나온 소병직(34) 김소형(34)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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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영어교사를 하는 애쉴리(25·캐나다)와 다나(24·캐나다)는 올해 처음으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다. 방금 터키 영화 <신부>를 보고 나온 참이다. 그리고 오후 5시에 상영예정인 <바람피기 좋은 날> 상영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영화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란다. 기대된단다. "전주는 가끔 쇼핑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기 위해 오곤 했는데 국제영화제는 처음이에요. 와보니 너무 활기차고 재미있어요. 내년에 또 올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베리 굿(very good)!"이라고 외쳤다. <바람피기 좋은 날> 상영 후 일정이 어떻게 되느냐고 했더니 저녁을 먹고 군산에 다시 갈 예정.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떡볶이와 김치볶음밥이란다. 맵긴 하지만 매우 맛있다고. 강원도 원주의 한라대학교 디지털방송학과 2·3학년으로 구성된 젊은이 한 팀이 거리 한복판을 들썩이고 있다. 3박4일 일정으로 오늘 전주를 찾은 이들은 개막식날 이영아를 못 본 게 가장 유감이라고 토로했다. "이영아, 어제도 바로 요 무대에서 인사도 했는데 어쩌나… 정말 이쁘던데…." 기자가 한 마디 슬쩍 던지자 학생들 쓰러진다. "으악~ 정말 보고 싶었는데. 좀 일찍 올 걸 그랬잖아! 아깝다, 아까워!" 이들이 작년에 이어 올해 연이어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이유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색다른 영화를 많이 감상하고 싶기 때문이란다. 이 학교에 재학중인 김지형(26)씨는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다. 마이클 아리아스 감독의 <철콘 근크리트>를 예매해놓은 상태. 곽기범(26)씨는 비주얼이 강하고 스펙터클한 영화를 보길 기대하고 있다. 오늘은 야외상영으로 만족하고 내일부터 본격적인 '영화사냥'에 들어갈 예정이다.
 한라대학교 디지털방송학과 2·3학년들. 개막식날 이영아를 못 본 게 가장 유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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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한국영화, 떡볶기처럼 '베리 굿'일까 분홍 커플티를 입고 나란히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남녀 한쌍을 보니 얼핏 직감으로도 이 곳 친구들이 아닌 것을 알겠다. 스물세살 동갑내기인 김성환·석지양씨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더니 서울에서 예까지 행차하셨단다. "영화 좋아하세요?" "네. 뭐 조금." "오늘 무슨 영화 볼 예정이에요?" "음…, 뭐였더라, (카탈로그를 뒤적이더니) 순수라던가?" 아! 제키 데미르쿠부즈 감독의 터키영화 <순수>를 일컫는 것이렸다. 이 젊은 친구들 그러고보니 터키영화 마니아들이던가? "아뇨. 다른 영화는 다 매진되었더라구요. 이것만 표가 있길래…." 하긴 아무렴 어떤가. 그렇게 해서 새로운 세계를 또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 영화제에 꼭 영화 좋아하는 사람만 오라는 법은 없다. 영화도 보고 데이트도 하고 얼마나 좋은가. 젊은 연인들에게는 데이트가 우선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부럽다. 영화제에 젊은 친구들만 오면 참 싱겁고 재미없을 것이다. 돋보기 안경을 쓰고 카탈로그를 뒤적이는 한 쌍의 중년부부를 보는 순간 '참! 재미있고 유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김인홍(51·전주)씨 부부는 그중에서도 특히 인디영화를 좋아한단다. 평소 접하기 어려운 인디영화나 독립영화 등 독특한 색깔의 영화를 볼 수 있기에 해마다 전주국제영화제를 찾는다고. "아내가 이런 영화들을 무척 좋아해요. 나는 그동안 소홀했던 남편 노릇 하느라 따라온 거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카탈로그에 소개된 영화를 골라내는 안목을 보니 보통 마니아가 아니다. 해마다 전주국제영화제를 찾는다 하니 전주국제영화제의 산증인인 셈이다. "해마다 행사 진행도 더욱 조직적이고 프로그램 내용도 알차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거리나 무대 디자인도 퍽 세련되어졌구요." 명쾌한 대답에서 전주국제영화제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영화를 볼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구러시아 분위기가 풍기는 영화"라고 대답한다. 다른 때 같으면 애매한 웃음으로 넘겼을 터이지만 마침 내가 어제 본 영화가 러시아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구동유럽 체코 영화가 아니었던가. <거지의 오페라>를 '강추'하고 헤어졌다.
 영화제 거리 근처에서 열리고 있는 프리마켓에서 쇼핑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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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자녀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도 만날 수 있었다. 전주에 거주하는 소병직(34) 김소형(34) 부부. 세 살 난 아들 은찬이를 데리고 왔다. 이들 역시 해마다 국제영화제를 찾는다. 아이 때문에 비록 영화는 보지 못하지만 이 살아있는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서 왔다고 한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영화를 많이 봤는데 아이가 생긴 후로는 어쩔 수 없이 영화는 포기하게 됐죠. 그래도 이 분위기에 이렇게 동참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즐겁고 좋습니다." 소씨 부부는 전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전주국제영화제에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전주의 다른 시민들이 그러하듯. 20대 커플도 50대 부부도... 영화 보고 데이트도 하고 이날 야외공연으로 전주를 찾은 삼인조 혼성밴드 '더멜로디'도 이 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보컬 '타루'씨는 이번이 전주 초행이다. "느낌이 어때요? 전주?" "뭐랄까요. 해를 품고 있는 도시 같아요. 거리도 너무 아늑하고 예쁘고 사람들의 표정도 참 밝아요." 역시 예술하는 사람답게 시적인 대답이 나온다. 축제라 해서 어수선할 줄 알았더니 열정적인 분위기 가운데서도 질서정연함이 느껴져 좋다고. 타루씨는 공연 후 보게 될 <불면의 밤2> 시리즈 <존 워터스의 밤> 생각에 벌써 가슴이 뛴다고 했다. 공연보다는 영화에 더 관심이 쏠려있다. 그리고 전주의 먹을거리에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육회 비빔밥 꼭 먹고 말 거예요!" 기나긴 해가 시나브로 저물어감에 따라 이 거리는 먹물빛 어둠에 조금씩 잠겨가기 시작한다. 거리는 휘황찬란한 빛에 휩싸이고 거리 밴드의 음악소리는 귀가 찢어져라 폭음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축제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어디선가 브라질의 삼바 리듬이 흥겹게 울려퍼진다. 사람들이 둥글게 반원을 그린 그곳에 가보니 '어쩌다 우연히 마주친' 공연 행사중의 하나인 '에스꼴라 알레그리아'가 한창이다.
 흥겨운 퍼커션 리듬과 현란한 삼바 댄스에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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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짱을 끼고 얌전히 관전만 하던 사람들도 차츰 겨운 흥을 어쩌지 못하는지 뻘줌하게 손뼉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고개를 까닥이며 발로 박자를 맞추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남이야 보건말건 어깨 위로 손뼉을 치며 휘슬을 불어대는 것이 아닌가. 진작에 그럴 일지. 어느 순간 갑자기 여고생들의 오빠부대를 연상케 하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스타 한 분 납셨나 보다. 이 거리에서 스타를 만나는 것은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이번 국제영화제 홍보대상인 이태성씨가 출연한 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 전단지를 돌리며 홍보를 하고 있는 곳이 소란의 진원지였다. <너를…>은 오늘 야외상영으로 국내에선 최초로 소개될 예정. 그런데 아가씨들, 건네받은 전단지는 볼 생각도 않고 이태성 얼굴만 찍어대느라 정신없다. "자, 이젠 제가 여러분을 찍을게요." 이태성이 자신의 핸드폰으로 자신을 찍는 팬들의 모습을 찍자 모두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까지 총 다섯 번 이상은 가까이서 본 것 같다. 볼수록 정든다던가. 이태성, 볼수록 참 괜찮은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전주국제영화제와 맺은 각별한 인연 때문일까. 길거리 가득, 영화의 주인공들 밤이 깊어갈수록 인파는 더 늘어만 간다. 주말 밤을 즐기기 위해 쏟아져 나오는 시민들이다. 회식이 끝난 뒤 단체로 들른 듯한 샐러리맨들, 교복 입은 중고등학생들, 모임 끝나고 수다를 떠는 중년의 아줌마들, 유모차를 끌고 남편과 나란히 걷는 만삭의 임산부, 고단한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듯한 다소 투박한 옷차림의 노동자들…. 밤이 이슥해지자 이 거리의 색깔은 사뭇 달라진다. 낮이 젊은이들 일색이라면 주말 밤에는 더욱 다양하고 알록달록한 인간군상들로 이루어진다. 영화와는 거리가 있을 법한 사람들 같지만 그들이야말로 영화 속 다양한 삶의 주인공이 아닐까. 그들로 인해 이 거리는 더욱 풍요로워진다. 그리고 그 풍요로움은 이 거리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힘이 된다. 이 거리가 이렇게 빛난 적은 일찍이 없었던 듯하다.
 전주국제영화제 홍보대사 이태성이 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를 홍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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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 즐길 줄 아는 당신이 이 거리의 주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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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 지프거리 젊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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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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