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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에 조지 베스트가 트로피를 받고 찍은 사진.
ⓒ BBC 홈페이지
영국으로 유학을 온 지 얼마 안된 2005년 11월쯤이다. BBC에서는 하루 종일 한 사람의 장례식 장면 전체를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 방송해 주었다. 거리에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도열했고 흐느꼈다.

누구일까. 세계적인 BBC 방송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한 사람의 생애를 다큐멘터리로 집중 조명하는 것도 부족해 장례식이 끌날 때까지 일거수 일투족을 카메라가 쫓아다닐까. 궁금했다.

축구 신동 조지 베스트

조지 베스트. 영국에서 그의 이름은 '축구 전설'로 통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456경기에 나서 180골의 진기록을 기록했고, 1968년에 맨체스터에게 유러피언컵을 선사한 축구의 신동. 방송에서 본 그는 수비수들을 우습게 가지고 노는 듯 신기에 가까운 골을 넣곤 했다.

잘 생긴 외모의 그는 60-70년대 영국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BBC의 계속되는 보도는 떠나는 축구 영웅의 죽음을 못내 아쉬워하는 영국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것이었으리라.

이에 뒤질세라, 북아일랜드 얼스터 은행은 그를 기려 5파운드 화폐에 조지 베스트의 초상을 그려 넣었고, 북아일랜드 수도에 있는 벨파스트 공항은 아예 '조지 베스트 공항'으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했다.

조지 베스트의 조국 북아일랜드

조지 베스트가 북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지 베스트가 선수로 활약할 당시인 1960년대에 그의 조국은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의 치열한 분쟁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특히 1969년에 영국군의 폭압적인 통치에 맞서 IRA(아일랜드 공화군, Irish Republican Army)가 조직적인 테러 등으로 맞서면서 양측간의 갈등은 극단적인 무장폭력으로 확대됐다. 신교도는 영국의 지속적인 통치를 요구한 반면, 구교도인 가톨릭계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동시에 아일랜드로의 통합을 요구하면서 저항했다.

그러던 양측이 지난 26일 공동 자치정부를 구성하는 데 극적으로 합의했다. 이제 길고 긴 터널을 벗어나는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는가. 세계의 귀와 눈이 모아지고 있다.

수백년 갈등의 시작... 식민지와 저항

양측간 갈등의 시작은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1세기 무렵부터 주변 섬 지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잉글랜드는 점차 세력을 확대해 14세기에 아일랜드를 반자치의 상태로 복속시켰다.

그러다, 1579년에 아일랜드의 한 지역에서 스페인의 도움을 받은 귀족들의 반란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지금의 북아일랜드의 일부 지역인 '얼스터'에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파 주민들을 이주시켜 본격적인 식민지 작업에 착수했다.

이에 반발한 토착 구교도 주민들이 1641년에 이들을 상대로 '대학살'을 자행했고, 이를 계기로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전지역으로 점차 식민지를 확산시켰다. 토착민인 아일랜드 구교도인들의 땅은 몰수되어 신교도들에게 넘겨졌고, 이후 1801년 아일랜드는 완전히 영국의 속국이 되었다.

▲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소재로 다룬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한 장면.
남북으로 갈린 아일랜드

그러나 1845년부터 시작된 장기간의 대기근과 약 200만명의 대대적인 해외 이주, 심각한 남북격차 등의 문제는 영국 정부로 하여금 1920년 아일랜드를 독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다.

캔 로치 감독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1920년대 초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한 피어린 투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지속적인 통치를 요구하는 신교도 중심의 얼스터 지역 등 6개주, 지금의 북아일랜드는 수십 년 간의 논의 끝에 1949년 결국 영국령으로 남게 되었다. 한국의 38선처럼 아일랜드가 남북으로 갈리게 된 것.

그러나, 이 분할은 오히려 북아일랜드 내부에 갈등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양측은 직원을 채용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종교에 해당하는 사람만 뽑았고, 서로간의 혼인, 교육, 주거 등이 철저히 서로를 배제한 상태로 이뤄졌다. 이로 인해 양측간의 물리적 대립은 더욱 빈번해졌고, 1969년에 IRA의 조직적인 활동으로 영국 정부를 향한 대대적인 무장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피의 일요일... 무차별 총격 가한 영국 정부

그러나 강한 반발은 오히려 강한 핍박을 불러왔다. 1972년 북아일랜드 도시 테리에는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 벌어졌다. 독립을 요구하는 구교도의 비무장 시위대를 행해 영국군이 무차별적으로 발포한 것. 한치도 물러섬 없는 양측간의 계속되는 폭력과 갈등은 1969년부터 무려 3700여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갈등은 서로에게 고통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양측은 고조되는 세계의 비판과 함께 점차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지난 1998년에 양측간에는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그 이듬해 27년만에 영국에서 자치권이 이양됐다.

그러나, 양측간 깊은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총격, 테러 등이 계속되면서 평화의 불씨는 점차 꺼지고 갈등이 오히려 격화되었다. 영국 정부에 맞선 IRA도 지난 2001년에 무장해제를 선언했다가 철회했고, 불과 2년 전에 무장해제 및 무장투쟁 포기를 선언했다. 전진과 후퇴의 길고 긴 반목의 역사가 되풀이된 것이다.

이안 페이슬리 vs 제리 애덤스... 평생 원수로 산 두 사람

▲ 역사적인 북아일랜드의 자치정부 협상을 타결짓고 포즈를 취하는 이안 페이슬리(왼쪽)와 제리 애덤스의 모습을 보도한 <가디언>지 인터넷판.
이번 협상을 타결시킨 당사자들은 이같은 갈등의 역사를 잘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북아일랜드 제1당인 민주연합당(DUP)의 당수 이안 페이슬리와 신 페인의 당수인 제리 애덤스가 바로 그들이다.

평생을 상대를 위해 총을 겨누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신교도 장로 출신인 페이슬리는 "구교도와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당내 강경 노선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 그는 "나는 제리 애덤스의 옆에 절대 앉지 않을 것"이라며 "그는 누구와도 같이 앉곤 하는데 그는 주로 악마같은 사람하고 앉는다"고 말하곤 했다.

제리 애담스도 만만치 않은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16살 때부터 각종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해 IRA의 사령관까지 역임했다. 그는 "이안 페이슬리가 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며 자치정부를 구성하려면 그가 없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둘... 극적 합의

그러던 이들이 시한에 임박해 극적으로 자치정부 구성에 합의했다. 이로써 오는 5월 8일부터 정부 권력이 런던에서 북아일랜드 수도인 벨파스트로 이동한다. 이를 위해서 양 정당이 내각을 함께 구성하게 된다. 페이슬리는 제1장관이 되고, 신 페인당의 협상대표였던 마틴 맥기네스가 제1부장관이 되어 주요 현안을 논의하게 된다.

페이슬리는 협상 후 "북아일랜드의 제1당으로서 다른 당과 최대한 협력을 하겠다"며 "과거의 비극이 우리의 밝은 미래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리 애덤스도 "수세기 동안 지속된 갈등이 이 나라의 발전을 막아왔다"며 "그러나 신의 도움으로 이제 지금부터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고 강조했다.

이번 합의는 협상 기한까지 타결을 짓지 못할 경우엔 영국 정부가 앞으로 계속 직접 통치할 것이라는 등의 각국의 강한 압박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폭력적인 갈등으로는 북아일랜드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양측간의 현실적인 문제인식도 한 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끝내 나누지 않은 악수... 수백년 된 상처

평화의 서곡인가. 아니면 또 과거처럼 반전의 역사가 펼쳐질까. 영국과 세계 언론은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서 합의를 이룬 것 자체가 '역사적인 타결'이라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역사적인 타결을 하고서도 끝내 악수를 나누지 않았다. 웃고 있었지만 그들의 기억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을 것이다. 평화의 필요성을 동감했음에도, 그들의 가슴에는 아직도 수백 년간 응어리진 뼈아쁜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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