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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이고, 도수네 밭에 깨가 안 나서 내가 요새 얼매나 속이 탔는지 몰라. 혹시 풀 안 난 약 찌클고 밭 갈았어? 동네 사람들은 풀 안 난 약 찌클었응게 안 난다고 허던디…. 혹시 내가 깨 씨를 잘 못 줘서 안 나는지 참말로 애타 죽겄고만. 그런다고 요로케도 한 개가 안 날수가 있을까?"

"맥없이 깨 씨 바꿔주고 애가 타부렀네요. 괜찮아요. 다시 심은먼 되제. 사람도 죽고 사는디 깨 씨 좀 안 났다고 그리 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미안해 할 것 없어요."

▲ "이번에는 꼭 나야 헐턴디..."
ⓒ 김도수
"아, 우리 집 밭에 심은 깨 씨는 조르륵 잘도 났는디 어쩌서 도수네 참깨 씨는 날 생각을 안 헌가 몰라. 요 아래 경숙이네 밭에는 도수네보다 하루 뒤에 심었는디도 아주 잘 났는디 말여."

"깨 씨는 났다허먼 수확하는 데는 지장이 없는디 나는 게 힘들잖아요. 깨 씨는 잘 안 낭게 함께 웅성거리면서 나부러라고 여러 개 씨앗을 뿌리잖아요. 내일 아침에 다시 심을라고 헝게 너무 걱정 마세요."

"두번씩이나 심응게 얼매나 힘들어. 호랭 무러갈, 어쩌서 안 낭가 모르겄어. 하도 안 나서 날마다 파 봤당게. 들판에 있는 밭 같으먼 새들이 꼬순게 씨를 다 빼 묵어부렀다고 허겄는디 집 앞에라 그럴 리도 없고. 하여간 깨가 안 낭게 동네 사람들이 몇 번씩 파 보더랑게. 그 때마다 '누구네 깨 씨로 심었가디 안 난데아' 할 때마다 내가 속이 얼매나 타부렀겄소. 오직에야 저 건데 우리 밭에 똑 같은 깨 씨로 심어 놓은 밭에 택수네 어메 불러서 보여줬당게. 우리 것은 아주 잘 났어."

▲ 새벽부터 참깨 씨를 심었다
ⓒ 김도수
고향 텃밭에 참깨 농사를 지으려고 아랫집 점순이네 집에서 깨 씨를 바꿔서 심었다. 그런데 2주일이 되어도 발아되지 않아 점순이네 어머니는 애가 타고 있었다. 주말이면 고향에 돌아가 밭농사 지은 지 8년째. 하지만 그 동안 고추농사 빼고는 어떤 작물을 재배해도 늘 마을 사람들 농사보다 잘 되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주말에만 농사짓는 나에게 전업농사꾼보다 훨씬 낫다고 칭찬했다.

그런데 올 참깨 농사는 발아가 되지 않아 마을 사람들까지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2주일만에 고향에 갔더니 텃밭에 심어놓은 깨 씨는 전혀 발아가 되지 않아 텃밭을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자네 깨 씨 안 나서 어쩐데아. 참말로 이상 허네. 왜 안 날까?"라며 모두들 걱정을 하고 있었다.

지지난해 수확한 참깨 씨로 파종하면 발아가 되지 않아 작년에 수확한 아랫집 점순이네 깨 씨로 바꿔서 비 내린 다음날 땅이 촉촉할 때 누나와 매형 둘이 심었다. 그런데 깨 씨가 하나도 발아되지 않은 것이다. 매형은 씨가 나지 않았다는 소식에 매우 심란해하며 "깨 씨 심고 와서 몸살이 나부렀는디 이젠 둘이 못 심으니 식구들 모두 동원해서 일요일 새벽에 심자"라고 한다.

모든 것이 때를 놓치면 안 되듯 농작물 파종도 다 때 가 있는 법인데 너무 늦어버렸다. 깨 씨가 잘 발아되려면 비 내린 후 흙이 촉촉할 때 파종을 해야 하는데 때맞춰 비가 내린다는 보장도 없고 이러다 파종을 못 할 것 같아 토요일 오후 물 조리개로 파종할 비닐 구멍에 물을 뿌려댔다.

강 건너 논에 다녀오던 큰 집 형님께서 물 조리개로 비닐구멍에 물주는 모습을 보고 "야, 고로케 쬐께씩 뿌려갖고 물이 들어가겄냐. 우게 껍데기만 촉촉하게 젖지 안에는 푸석푸석 혀. 잘 날라먼 비 온 뒤에 심어야 헐 턴디 걱정이다."

▲ 사랑채 쓰러진 빈 집
ⓒ 김도수
밤에 윗것테 사시는 당숙모님 집에 참깨 씨를 얻으러 갔다. 당숙모 집 골목에 들어서려 하니 컴컴하기만 하다. 올 봄, 종옥이네 어머니 돌아가시고 불이 꺼져 빈 집이 나타나더니 옆 집 현복이네 어머니도 서울로 올라가버려 다시 빈 집 생겼다. 또 골목에 들어서자 올 봄 경기도 어디로 떠나가신 송기형님 집 불 꺼져버려 빈 집 나타났고, 옆 집 현호네 어머니 오래 전에 전주로 올라가셔서 불 꺼진 지 오래고, 겨우 골목 끝에 홀로 남은 소지당숙모네 집에서 푸르무레하게 불빛이 새어 나온다.

텔레비전만 켜 놓아 어둠 컴컴한 당숙모님네 집 마당에 들어서서 "당숙모님! 당숙모님!"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텔레비전 보느라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 현관문을 쿵쿵 때리며 당숙모님을 불러 참깨 씨를 바꿨다.

"요 근방 집들 다 비어부렀네요 잉. 밤이면 집집마다 불 켜져 있다가 불빛이 안 보잉게 얼매나 쓸쓸해요. 이 근방 혼자 산 게 밤이면 겁나게 적적하시겠네요."

"긍게 맨날 문 잠그고 텔레비만 보다 자. 인자 진뫼도 사람들 다 떠나고 없어. 전에 맹키로 사람들이 많이 살아야 헌디 요새 누가 촌에서 살라고 허간디. 우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헝게 살고 있제. 우리 죽으먼 아마 빈 집만 남아불것이고만."

참깨 씨를 들고 마당을 나서는데 현관에 잠시 환하게 켜졌다 다시 꺼지는 백열전등. 컴컴한 골목길로 접어드려 하는데 푸르무레하게 비추는 텔레비전 불빛이 유리창을 뚫고 내 앞에 환하게 꽂힌다.

어둠을 뚫고 새어 나오는 저 불빛. 아! 내게 얼마나 따스하고 행복한 불빛인가.

이불을 펴고 드러누워 오늘 저녁 나와 함께 자는 마을 사람들 숫자를 세어본다. 빈 집, 쓰러져 가는 집, 집터만 남은 집. 한 집 건너뛰고, 두 집 건너뛰며 이름을 불러보고 얼굴을 떠올려보며 손가락을 구부려 한 사람 한 사람 세어본다.

두메산골 작은 강변마을에 터를 닦아 집을 짓고, 논밭을 일구고, 자식을 낳아 옹기종기 모여 살던 고향마을.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자라던 자식들, 이제 더 이상 고향에 머물지 못하고 늙은 노인네 몇 분만이 집을 지키고 사는 고향마을이 되어버려 쓸쓸하고 적막하기만 하다.

▲ 안개 낀 고향마을 풍경
ⓒ 김도수
폐가로 방치된 고향 집을 사서 주말이면 고향으로 돌아가 밭농사 짓고 산 지 벌써 8년째다. 세월 한번 참 빠르다. 큰 딸내미가 초등학교 입학기 전부터 토요일 오후면 가족들 데리고 고향 집으로 돌아갔는데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딸내미와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아들 녀석은 이제 다 컸다고 부모님 둘이서 고향에 다녀오라며 따라 나서질 않는다.

자식들 밥해준다며 아내마저 고향에 오지 않아 홀로 잠을 청하려 하니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눈만 말똥거리며 천장을 쳐다보는데 어릴 적 잠자리 넓게 차지하려고 서로 몸을 밀치며 싸우던 나보다 두 살 많은 형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옆, 고단한 몸을 누이며 눕자마자 주무시며 쉰내 풍기던 부모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쉬이 잠 못 이룬다.

새벽이다. 뒤란 숲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비몽사몽. 이제 일어나야지 하면서 다시 잠이 드는데 마당에서 누나와 조카들 목소리가 들린다.

"도수야! 언능 안 일어날래!"
"삼촌! 빨리 일어나요!"

마당이 시끄럽다.

누나는 지난번 매형과 둘이 뙤약볕 아래 참깨 씨 심느라 너무 힘들었다며 식구들 모두 데리고 왔다. 남원과 전주에서 출발한 누나네 식구들. 그 중 셋째 여 조카는 올 봄 결혼하여 전주에서 신혼의 단꿈에 젖어 사는데 가족들 '참깨심기 노력봉사'에 자원하여 남편과 함께 달려왔다.

식구들 모두가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송송 구멍 뚫린 곳에 참깨 씨를 넣고 흙을 살짝 덮는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달려온 탓에 하품을 계속 해대며 깨 씨를 심는 조카들과 해 뜨면 뜨거워서 심기 힘들다며 부지런히 심는 누나의 손놀림이 두 사람 몫은 거뜬히 하는 것 같다.

▲ 씨를 파종하고 나서 물을 살짝 뿌려줬다
ⓒ 김도수
텃밭이 바로 마을 회관 앞에 있어서 이번에 심은 참깨 씨가 잘 발아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그래야 아랫집 점순이네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 걱정을 덜어드릴 텐데 말이다.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나도 모르게 '깨 씨가 잘 났는지 모르겠네' 중얼거리며 고향마을 텃밭을 행해 아침 안부를 묻는다.

'깨 씨, 잘 났겠지.'

이번 주말, 고향에 가면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어따, 이참에 심은 깨 씨는 조르륵 야물지게도 잘 나부렀고만…."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마을 사람들, 빨리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김도수 기자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고향마을로 돌아가 밭농사를 짓고 있고 전라도닷컴(http://www.jeonlado.com/v2/)에서 고향 이야기를 모은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란 산문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전라도닷컴에도 송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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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정겹고 즐거워 가입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염증나는 정치 소식부터 시골에 염소새끼 몇 마리 낳았다는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두 다뤄줘 어떤 매체보다 매력이 철철 넘칩니다. 살아가는 제 주변 사람들 이야기 쓰려고 가입하게 되었고 앞으로 가슴 적시는 따스한 기사 띄우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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