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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통가의 고위 정부 관료들이 뉴질랜드 비자를 신청할 때 임신 검사를 요청받은 사실이 연일 보도되면서, 통가뿐만 아니라 뉴질랜드의 통가 커뮤니티에서도 거센 항의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가장 최근에 보도된 사례로는 통가의 중앙은행 총재 시오시 코커 마피(Sioci Cocker Mafi, 41)의 건. 6월 18일자 <도미니온 포스트(The Dominion Post)>지는, 남태평양 섬나라들을 통틀어 여성으로는 최초로 중앙은행 총재에 오른 마피 총재가 지난 5월, 뉴질랜드 비자를 신청했을 때, 통가의 수도 누쿠알로파에 소재한 뉴질랜드 이민성 지부의 관리로부터 임신 검사와 함께 인터뷰를 요청받았다고 보도했다.

당시 한국의 제주에서 개최되는 제37차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 총회에 참석하기 위한 출장을 앞두고 있던 그녀는, 통가에서 한국으로 가는 직항이 없기에 뉴질랜드를 경유해서 여행하기 위하여 뉴질랜드 비자 신청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뉴질랜드 이민성의 임신 검사 요구에 모욕감을 느꼈지만, 마침 오는 10월이 출산 예정이었기에 임신 검사에는 응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 뉴질랜드를 경유하지 않는 항공편으로 조정해서 한국 출장을 다녀왔다고 밝혔다.

현재 오클랜드를 경유해야만 하는 해외 출장을 다시 앞두고 있는 그녀는, 당시 받았던 한 달짜리 뉴질랜드 방문 비자의 유효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새로 비자를 신청해야 될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때의 불쾌한 경험을 다시 반복하기 싫다면서 이번에는 방문 비자가 아닌 통과 비자(transit visa)를 신청할 생각임을 분명히 했다.

이 사건이 보도되기 바로 하루 전인 6월 17일에는 통가 재정부의 고급 관료인 멜레세니 로무(Meleseni Lomu, 49)의 사례가 뉴질랜드의 양대 일간지인 <도미니온 포스트>지와 <뉴질랜드 헤럴드(The New Zealand Herald)>지에 함께 보도되었다.

그녀 역시, 2주 전 뉴질랜드의 로터루아(Rotorua)에서 개최된 남태평양 섬나라 경제 장관들의 회의인 퍼시픽 포럼에 참석하려고 했을 때, 뉴질랜드 이민성 관리로부터 임신 검사를 요구받았다는 것. 심한 모욕감을 느낀 그녀는 결국 회의 참석을 포기하고 이를 폭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뉴질랜드의 이민부 장관 폴 스웨인(Paul Swain)은 로무의 이러한 주장을 즉각 부인하고 나섰다. 그녀가 올해 4월에 발급받은 뉴질랜드 입국 복수 비자가 아직 유효하기 때문에 뉴질랜드 입국을 위하여 별도로 비자 신청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4월에 발급받은 그 비자로 벌써 두 차례나 아무 문제 없이 뉴질랜드를 다녀갔기에, 비자 신청시 임신 검사를 요구받았다는 그녀의 주장이 사실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가 중앙은행 총재 마피의 건에 대해서는, 그녀가 비자 신청을 한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에 즉시 진상 조사를 명령하고 이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공식 사과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서둘러 진화에 나서고 있다.

이번 두 사건의 당사자들이 통가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라는 점에서 최근 언론의 주목을 받긴 했지만, 비자 신청시 임신 검사를 요구하는 뉴질랜드 이민성의 정책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 정책은 지난 해 10월에 새로 도입된 것으로,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는 원정출산 패키지 상품까지 등장할 정도로 폭증하고 있는 외국인들의 원정출산을 막기 위한 조치로 취해졌다.

당시, 뉴질랜드에서 출산을 하면 무료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태어난 아기에게는 자동으로 뉴질랜드 시민권이 부여되기에, 이런 혜택을 노린 외국인 산모들의 원정출산이 줄을 이었던 것이다.

뉴질랜드의 의료 재정을 잠식하는 외국인들의 이러한 원정출산이 큰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뉴질랜드 정부는 뉴질랜드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산모가 뉴질랜드에서 출산을 할 경우 산모에게 그 의료서비스 비용을 청구하도록 하는 것으로 제도를 바꾸었다.

이와 함께 원정출산을 목적으로 하는 외국인 여성들의 입국을 사전에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그러한 가능성이 엿보이는 여성들이 비자를 신청할 때에는 임신 검사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정책도 마련해서 시행해온 것이다.

그런데 뉴질랜드 이민성의 이러한 새로운 정책은 비자면제협정국가인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홍콩 등의 아시안 국가들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비자면제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은 남태평양 섬나라 국가들의 여성들이 주로 그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뉴질랜드는 비자면제협정이 체결되어 있는 키리바시(Kiribati), 나우루(Nauru), 투발루(Tuvalu) 등 세 나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남태평양 섬나라 국가들에게 뉴질랜드 입국시 비자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사모아, 통가, 피지 등 남태평양 섬나라 국가들의 많은 여성들이 뉴질랜드 비자 신청을 할 경우 임신 검사를 요구받았는데, 그 대상이 미혼여성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과 가임연령을 벗어난 40대 중년 여성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어서 많은 여성들로부터 불만을 야기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통가의 경우에는 그 빈도가 훨씬 많아, 비자 신청자의 약 20%에 해당되는 여성들이 임신 검사를 요구받았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지난 5월말부터 뉴질랜드 내 통가 커뮤니티의 지도자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통가 자문 위원회의 일원인 폴 뮬러(Paul Muller) 씨는 뉴질랜드 이민성의 임신 검사 요구가 문화적으로 온당치 않은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이 적대적인 정책은 인종차별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통가 국민들의 뉴질랜드 접근을 가로막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녹색당의 외교 및 인권 담당 대변인인 케이쓰 로크(Keith Locke) 의원도 이에 동조해서 뉴질랜드 이민성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임신 검사는 우리의 손님들에 대한 모욕이고 뉴질랜드의 좋은 이미지를 더럽히는 일이다. 또한 우리의 인권법에 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성별이나 임신여부에 기초해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 문제에 대한 단 하나의 해결방법은 이민부 장관이 즉시 임신 검사를 중지하도록 명령하는 것이다. 3주 전에 장관이 말했던 것처럼 단지 임신 검사를 덜 하도록 조치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에 대해 이민부에서는 대변인 발표를 통해, 통가의 수도에 있는 뉴질랜드 이민성의 관리들이 지나치게 임신 검사 요구를 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제 원정출산의 위험성이 명백할 경우에만 임신 검사를 요구하라고 훈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는 뉴질랜드 이민성이 지금 단계에서는 임신 검사를 중지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으로서, 통가를 비롯한 많은 남태평양 섬나라 국가들의 여성들이 임신 검사 없이 자유롭게 뉴질랜드를 드나들기 위해서는 최근 조심스럽게 논의가 되고 있는 뉴질랜드 시민권 획득 강화 조치의 시행 여부를 두고 보면서 좀더 기다려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뉴질랜드의 수상 헬렌 클락(Helen Clark)은 지난 6월 14일 주간국정브리핑에서 원정출산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아기에 대해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기존의 법안을 현재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국민당의 이민 담당 대변인 웨인 맵(Wayne Mapp) 의원은 최근 아일랜드에서도 국민투표 결과 외국인 부모의 아기가 자국에서 태어날 경우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유럽연합 내 다른 국가들도 이와 유사한 조치를 취하고 있음을 예로 들면서, 이번 정부의 조치를 환영했다.

그러나 아동 위원(Children's Commissioner)인 신디 키로 박사(Dr Cindy Kiro)는 이러한 정책 변화가 뉴질랜드 정부도 서명한 유엔의 어린이 인권 협정에 배치되는 것이라며 반대의 뜻을 밝혔다.

이와 관련, 시민권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내무부 장관 조지 호킨스(George Hawkins)는 아직 어떤 결정도 내려지지 않은 상태임을 강조하면서, 이번 달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시민권 및 여권법' 개정안에는 이 사안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따라서 원정출산을 사전에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현재 시행되고 있는 뉴질랜드 이민성의 임신 검사 정책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이고, 이에 따라 뉴질랜드 비자 신청을 하는 남태평양 섬나라 국가들의 많은 여성들과 뉴질랜드 이민성 관리들과의 충돌은 앞으로도 불가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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