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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혜와 사회적 불평등, 기득권에 대해 치열한 사회적 토론이 오갔다. 점점 더 목소리가 작아지고 조그맣게 되어 묻히기만 했던 사회적 문제였다. 역사적 부끄러움을 모르며 온갖 특혜와 불법으로 차지한 기득권을 놓치 않으려는 세력의 필사적인 투쟁을 보기에는 하는 일이 없어도 시공이 아까웠다. 하루 이틀일인가. 한편 성찰 가능 부류의 가면을 벗기는 순간 같았다. 그러나 아직은 불투명하다. 성찰하고 책임지겠다는 개인 존재'들'이 과연 사회적 의무를 행할 수 있는 내려놓음으로 사회적 실천을 할 수 있는가. 개인 성찰이 사회 성찰이 되려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요구를 보면 된다. 1~2평짜리 방에 살고 좁은 공동 화장실을 쓰며, 일자리를 얻지 못하며, 일하다가 다치고 해고되며, 병과 생계 때문에 자살을 하며, 가족이 없거나 단절되었으며, 이웃이 없으며 젊은 나이에 큰 병을 얻었고, 몇 천만원이 없어서 재기를 못하며 희망을 잃는 사람들을 보면 된다. 그들은 왜 그럴까. 하나 하나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된다.
 
혹자는 가난을 도둑맞았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자랄 때는 80%가 가난했고, 이웃도 이웃의 아이도 가난했다. 그래서 방법은 달라도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데 동지적 공감대가 있었을 것 같다. 지금은 소득 하위 20%가 가난하지만 삶의 불안정성 때문에 80%가 가난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가난의 문제를 개인으로 돌리는 것은 호흡처럼 익숙해졌다. 성찰은 가난한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졌고 가난한 이들은 분열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이미 기회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한다. 그러니 사회적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실상은 가장 힘들다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재벌과 대기업의 사주고 우리는 그들이 면피하는 것을 봐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삶에 무책임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부류이고 재벌과 대기업은 힘드니 이해해줘야 하는 부류인 것이다. 공동체가 파괴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직사각형 아파트에 살게 돼서라기 보다 먹고 살기 위해 삶이 내몰려야 해서고 가난한 서로를 손가락질 하게 돼서이고 서로에게 차별받기 싫어서다. 삶의 억울함은 말할 곳도 없고 들어줄 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이 힘들었고 외로웠던 이유는 가난해서였고 어머니들이 힘들고 허망했던 이유는 그에 더해 참고 열심히 산 대가가 없어서다. 그 세월이 지독하고 잔인하다고 느낀다. 5~60년을 산 상위 5%가 5~60년을 산 하위 10%를 회복시킬 수 있는가. 상위 20%가 이끄는 우리 사회가 가난을 진정으로 기억해 낼 수 있는가.(그렇다고 상위 20%가 행복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나마 가난이 무엇인지 '알던' 오래된 미래로 돌아가기 위한 사회적 토론의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생애적으로 이어져온 국가와 사회의 폭력,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차별을 보상하려면 여타의 위인에 대한 위계화도 필요없이 가난한 이들의 삶의 기본권을 살만하게 보장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면 된다. 모든 정책이 그곳으로부터 나오면 우리 사회와 공동체는 건강성과 자생력을 회복할 것이다. 가난한 나와 나의 이웃은 행복과 의미를 찾아 살아갈 것이다. 그 간에도 가난한 이들의 삶은 계속 흘러가고 종종 불행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기득권 계층이 성찰했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금방 알 수 있다. 한바탕 사회적 토론이 무의미한 일시적 소동이 아니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