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실시간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가 정식기사로 채택하지 않은 글(또는 검토 전 글)입니다.
  • 오마이뉴스 에디터가 검토하지 않았거나, 채택되지 않은 글에 대한 책임은 글쓴이에 있습니다.
영화 : 파이란
주연 : 최민식(강재), 장백지(파이란)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 -강재의 고백
 
1. 추방된 실존의 치유는 사랑이다
 
제목「파이란」은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강백란(康白蘭)의 이름으로 중국식으로는 '칸 파이란'이다. 이름에 '실패'란 뜻도 있지만, '하얀 난초꽃'이라는 뜻도 있다.
 
철학자 에릭 프롬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 따르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체로부터 분리감을 경험하는데, 이 분리감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숙명으로서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실존은 분리이다'라는 프롬의 외침은 사람들은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고 소외 상태를 초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실존은 라틴어 '엑시스테레(exsistere)'에서 유래했다. 접두사 'ex-'는 '밖으로(out)'의 의미를, 동사 '시스테레(siste-re)'는 '서다(to stand)'의 의미다. 실존은 '밖에-서있는(to stand outside)' 또는 '바깥으로 나가 서 있는'을 뜻한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바깥에 서 있음' 즉, 실존은 '고향에서 내쫓겨난 추방'이고, 모든 가치와 의미의 근원이었던 '신'에게 버림받았음을 뜻한다.
 
프롬은, 사람은 고향과 타향에서 추방되었다. 이때의 추방은 사람이 자신을 살갑게 돌봐주던 어버이 집에서 갑자기 내쫓긴 채,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고립무원의 상황을 말한다. 이것은 어떠한 지배나 통치 또는 보호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라는 뜻에서는 긍정적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자유는 추방과 분리의 고통을 떠맡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형벌과도 같다.
 
카뮈나 사르트르가 '바깥에 홀로 서 있는 실존'을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조건으로 보았다면, 프롬은 자연과 신의 바깥으로 내쫓긴 사람의 상황을 '불안과 고통의 원천'으로 보았다. 프롬은 이러한 분리 상태로부터 오는 불안과 고독 그리고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합일의 방법이 바로 사랑이라고 한다.
 
2. 1970-80년대 무작정 상경한 "파이란"과 같은 우리의 누나들
 
파이란은 7, 80년대 돈을 벌기위해서, 맨몸으로 보따리 하나 들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우리의 누나들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고 나서는 소녀의 중압감은, 어김없이 다가서는 인신매매단의 덧에 걸려든다. 꿈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일생을 좌절하고 포기하며 살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누나들. 그 시궁창 속에서도 꿋꿋하게 현실을 헤쳐가지만 살아갈수록 빚쟁이가 되고,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누나들, 죽지 못해 사는 현실 속에서 보고프고 만나고픈 고향의 가족들을 가슴에 새기며, 수많은 밤들을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산화되었을 우리의 누나들,
이런 누나들을 낚아채어 사창가로, 술집으로, 가정부(식모)로 팔아먹는 용식과 강재 같은 산업화의 폐자재들도 성공이란 꿈을 안고 서울로 몰려든 이방인들이다. 그런 '파이란'과 같은 우리 누나들의 아프고도 슬픈 절망의 모습들이 2001년 우리에게 찾아온 연변 조선족 처녀 파이란을 통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집집마다 누비며 걷어온 인간 오물이 가득한 세탁물을 발로 밟아 땟물을 빼는 파이란, 그녀의 영혼을 담아 수줍게 하늘 가득히 빨랫줄에 널어 말린다. 맥없이 살다가 말없이 죽어가는 파이란이 찾은 도시는 미세 먼지가 가득한 세상이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착취와 폭력은 수많은 '파이란'들에게는 저주의 사자들이다.
 
가난에서 튕겨나와 도시로 몰려든 삼류인생들의 무기인 폭력은 생계라는 최면으로 인간들을 길들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파이란' 의 폭력은 영화 '친구' 의 폭력보다 더 잔인하고 모질다. 손쉬운 먹잇감인 수많은 파이란이나 강재는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정글의 먹이감들이다.
 
가야할 곳이 어딘지 알지만, 갈 수 없는 이 땅의 수많은 '파이란과 강재들에게, 죽음은 그렇게 코 앞에 다가와 있고, 사랑은 늘 너무 늦게 찾아온다. 심지어 파이란의 유골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방바닥에 흩어져 인천이란 도시의 먼지 속에 스며든다. 그 순간 구원은 사치가 되고 잔인한 세상은 어두운 적막에서 또 다른 파이란을 생산하고 있다. 도시 속의 이방인들은, 흥청이는 도시문화 속에서는 잉여물이자 초과 생산품이다. 언어권 밖도 안도 아닌 곳에 있는 자이자, 국가의 영토 밖도 안도 아닌 곳에 있는 자, 그가 바로 경계선상에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멋하는 이방인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하다는 이유로 쾌락의 소모품으로 전락한 수많은 파이란들에게 국가와 사회의 통치 질서는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최 말단에서는 '용식'과 같은 이들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충들이 무리수였다는 것을 말이다.
 
휘영찬란한 네온싸인으로 둘러쌓인 환락의 도시를 떠나, 고향으로 금의환양하겠다는 강재의 소박한 꿈도,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파이란은 마지막 편지의 끝부분에서 말합니다. '당신에게 죄송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