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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과학 기술, 어디까지인가?

20.11.20 16:21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우리나라 조선의 해시계 앙부일구가 귀환하면서 조선의 과학기술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조선의 과학기술은 현대에서 봐도 매우 놀라운 수준이다. 조선시대 전통 과학기술의 위엄은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와 수표 등을 통해 볼 수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세종대에 제작된 것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세종의 깊은 조예와 애민정신을 느낄 수 있다.
지난 8월 조선의 해시계 앙부일구는 국내로 귀화하였다. 국외소재문화재단은 지난 1월부터 앙부일구를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조사와 검토를 진행하였지만 코로나19사태로 여러 차례의 경매가 취소되면서 마침내 8월에 국내로 들여오는데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앙부일구가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해외로 반출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과학기술의 대표작을 무사히 돌려받은 것은 정말 유의미한 일이다. 세종의 애민정신이 깃든 앙부일구는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습을 한 해시계'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17~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과학자 장영실, 이천, 김 조와 함께 제작한 것으로 세종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앙부일구에는 시각을 나타내는 7개의 세로선과 절기를 나타내는 13개의 가로선이 표시되어있으며 글을 읽지 못하는 백성을 위해 12지신을 그림으로 그려 넣었다. 여기에서 항상 북쪽을 향해있는 '영침'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곳을 읽으면 해당 시각과 절기를 알 수 있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기 때문에 영침의 그림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인다. 7개의 세로줄로 6개의 칸이 만들어지므로 영침의 그림자가 한 칸 지날 때마다 2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할 수 있고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아날로그 시계와 굉장히 비슷하다. 여기에서 한 칸이 4시간이 아닌 2시간인 이유는 그림자가 생기는 시간에만 사용할 수 있으므로 태양이 떠있는 묘시에서 유시까지만 측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앙부일구는 계절마다 바뀌는 태양의 남중고도를 반영하여 절기를 파악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낮이 가장 긴 하지에는 태양의 남중고도가 높기 때문에 영침의 그림자가 짧아지고 밤이 긴 동지에는 태양의 남중고도가 높기 때문에 영침의 그림자가 길어진다. 영침의 그림자가 짧으면 그림자의 끝은 13개의 가로선으로 만들어진 12개의 칸들 중 아래칸에 위치게 되고 길면 위칸에 위치하게 되므로 12개의 절기를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현재 시간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형태도 다양하게 변화되어 휴대용으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앙부일구가 태양을 이용해 시간을 파악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면 자격루는 물로 시간을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이다. 앙부일구보다 3개월 빨리 만들어진 장치로 날씨가 흐리거나 밤같이 태양이 보이지 않으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앙부일구와 비교했을 때 날씨에 상관없이 하루 종일 시간을 알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초기 물시계는 1434년 장영실에 의해 처음으로 제작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장영실의 자격루가 아니고 1536년에 장인 박세룡에 의해 개량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일부만 보존되었다.
자격루는 크게 시간을 측정하는 물시계 부분과 시간을 직접 알려주는 자동 시보 장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물시계 부분은 파수호, 수수호, 살대로 구성되어있다. 큰 항아리인 파수호에 물이 차서 흘러내리면 긴 원통모양의 수수호로 물이 고이게 된다. 수수호에 있는 살대는 물이 일정량 이상 차게 되면 부력으로 살대가 떠오르고 살대는 작은 구슬을 건드리게 된다. 이렇게 작은 구슬은 자동 시보 장치로 이동해 큰 구슬을 굴러가게 한다.  큰 구슬이 굴러가면 인형의 팔과 연결된 부분에 자극을 주고 인형의 팔이 움직여 북, 징 등을 치면서 소리를 내어 시간을 알려준다.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수수호에 물이 일정한 속도로 채우는 것이 관건이다. 물이 가득 찬 항아리에 구멍을 뚫는다고 해도 남아있는 물의 양에 따라 흐르는 물의 양에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정교한 작업이 필요한데 장영실은 3개의 물통을 사용하여 이러한 맹점을 보완했다. 또한 종을 한 번 친 후에 수수호에 차있는 물이 빠지는 동안은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2개의 수수호를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하지만 자격루에는 해결하지 못한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세종은 자격루가 완성되자 경복궁의 경회루 서북쪽에 짓고 이곳에 자격루를 설치했다. 시간을 백성에게 알려주는 것은 임금의 중요한 의무였기 때문에 세종은 시보소리를 멀리 전달해주는 '전루소'와 같은 국가기관도 설치했다. 하지만 모든 백성들이 자격루의 시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조선시대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는 앞서 소개했던 앙부일구, 자격루와 비교했을 때 구조가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강우량을 정량적으로 측정한 최초의 사건으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섰다는 데에 역사적 의미가 있다. 측우기는 구리로 제작된 둥근 원통에 강우를 받아 양을 측정한다. 정량적으로 측정해야 하므로 원통은 지름 7촌(약 14cm) 높이는 1.5척(약 30cm)로 정해져 있다. 조선은 농업이 발달한 국가이고 농업은 강우량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강우량을 기록함으로써 날씨를 예측해 농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는 기후정보는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귀중한 기록이기 때문에 높은 가치를 지닌다.
측우기와 비슷하게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제작된 수표는 한강과 청계천에 설치되었다. 육각형 돌에 눈금을 새겨 넣는 수표는 측우기만큼 구조와 원리가 단순하다. 하지만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물의 수위를 보고 가뭄과 홍수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한 노력이었기 때문에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은 조선의 과학기술은 현대에서 봐도 놀랍고 역사적인 기록들이다. 이 외에도 하늘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혼천의, 독자적인 역법 체계인 칠정산 등 조선의 독보적인 과학기술이 다수 존재한다. 세계 과학사 암흑기에 조선의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종, 장영실 등 우수한 인재들이 많았고 이들의 과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선조들의 지혜가 밑거름이 되어 현대 과학으로 발전하고 우리가 편리하게 생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현대과학은 미래과학의 밑거름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후손들의 기술에 보탬이 되어야 할 것이다.
 

태그:#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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