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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했어요

[나를 위한 마법의 주문③] 내가 다 해결할 순 없어
20.01.17 10:53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우울증 치료를 하다보며 나에 대해서 많이 알아갈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이 꼭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남 앞에 내놓기 부끄러운 나, 상처받고 쭈구리가 되어 있는 나를 바라보고 인정하고 더욱이 사랑해야하는 과정은 쉽지 않고 괴로운 일이다. 그렇지만 또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게 방치되었던 나의 감정들을 들여다보다 보면 끝난 일이고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현재의 나에게 여전히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사건을 발견하게 된다. 김지운 감독의 한국 공포영화의 몇 안되는 수작 <장화, 홍련>을 생각해보면 된다. 자기로 인해 동생이 죽었다는 죄책감은 환영을 만들어내고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를 구속한다. 요즘 가장 핫한 드라마 <스토브리그>도 남궁민의 과거의 상처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과거는 쉽게 묻어지지 않는다. 잊은줄 알았다가도 유사한 사건에서 재발한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하지 않았나.
 
지난 1월 12일 광화문에서 열린 문종원 기수 추모 미사회는 나의 오래된 상처와 죄책감을 다시 끄집어냈다.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는 지난 10년간 모두 4명의 기수와 2명의 관리사가 잇달아 목숨을 끊었고 작년 11월 문종원 기수가 경마장의 비리와 부정을 언급한 3장짜리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이날 미사에서 문종원 기수의 부인은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미리 준비할만큼 자녀를 끔직히 사랑했던 남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지.. 하루 하루 조금씩 죽어갔던 것일지 모릅니다. 유서의 내용을 밝혀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며 호소했다. 두 달이 지나도록 아직 장례를 치루지 못한 유가족의 애끓는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이날 미사에서 함께 읽은 "과연, 의인이 열매를 맺는구나! 과연, 이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구나!"라는 말은 내게 더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2015년 4월 8일 공익단체 바로세우기 시민사회 대책위원회(바로)를 통해 내 생애 처음으로 해본 1인 시위. 대학교 교직원때 비겁하게 지켜주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에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함께 하려 노력했다.
ⓒ 주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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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내게 다가온 질문

그러니깐 8년 전인 2012년 1월의 어느 날의 일이였다. 대학 졸업하고 뒤늦게 사법시험 준비를 했다 1차는 2년 만에 붙었지만 2차 시험에서 떨어지고 그 다음해 다시 1차 시험이 떨어져 서른 살이 다 되다보니 미련없이 취업시장에 나서 다행히도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던 대학교 교직원으로서 근무를 했을 때였다. 법학과라서인지 로스쿨 행정실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학생지원, 입학, 교무, 보고서 작업 등 다양한 업무를 하게 되었는데 일도 재미있었고 선배들에게도 사랑받는 직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너는 공부 빼고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고 사회성도 없으니 꼭 공무원이나 가정법원 판사가 되어야 한단다"라고 하도 들어서 공부 빼고는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가 여러 일들을 척척 해내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인정받으니 신났다.
 
그렇게 그날도 룰루랄라 즐겁게 일하고 있을 때였다. "잠깐 시간 내서 인터뷰 좀 해주실래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전임자 선배가 서 있었다. 3년차 신입한테 근무경력 20년이 넘은 선배가 무슨 물어볼게 있다는거지 싶었는데 그 다음 말이 충격이었다. "아니, 제가 일을 좀 못 했잖아요. 어떤 점에서 못했는지 얘기 좀 해주세요"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싶었다.
 
알고보니 모법인이 삼성이였던 대학교는 대학 행정 서비스 개선을 위해 직원들에게 6시그마 과제를 주었는데 내 전임자는 '왜 나는 일을 못 하는가'를 과제로 부여받았고 첫 번째 단계로 voice of customer라고 해서 고객의 목소리를 들으러 온 것이였다. 그 고객이 바로 후임자인 나였기에 쭈삣거리면서 저런 황당한 질문을 한 것이였다. 6시그마는 원래 기업에서 전략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고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정립된 품질경영 기법으로 제너럴 일렉트릭 등 여러 기업에서 도입되어 발전하였고 국내에서도 2000년대 초반까지 활발히 적용되었다. 내가 있던 대학에서도 초기 6시그마는 선택받은 인재들만 하는 과제였다. 현업에서 반 년 동안 빠져 대학 내의 문제를 탐색하고 해결방안을 도출해 현업에도 적용해 성과를 냈기 때문이였다.
 
엘리트 코스였던 6시그마가 어쩌다 이런 이상한 과제로 바뀌었을까. 원인은 대학의 점진적인 구조조정이였다. 출생율은 낮아지고 초등학교 입학생 수가 줄어드는 시점에서 2010년부터 대학의 위기는 예견되었다. 하지만 '신의직장'이라 불릴만큼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교직원 사회에서 구조조정은 어려운 일이였다. 2010년 입사했을 때 총무처장이 신입직원들에게 "횡령만 하지 않으면 정년이 보장되는 몇 십년을 같이하는 가족"이라고 얘기했고 전산시스템에도 2040년으로 정년이 찍혀있었다. 동기들끼리 맙소사 2040년이 오기는 할까, 그 전에 지구가 멸망하지는 않을까 농담할 정도였다.

차마 그럴 수 없었던 나의 마음
 
그렇기에 부서에서 눈 밖에 났거나 총무처에서 단단히 찍힌 3명이 본보기로 '왜 나는 일을 못 하는가'라는 이상한 6시그마 과제를 부여받아 현업에서 나와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 정의감이 넘치지도 않고 불의를 보면 피해가려 노력하는 나이지만 전임자가 와서 '자신이 왜 일을 못하는지'를 물어보는 상황까지 넘어갈 수는 없었다. 퇴출하려는 직원을 화장실 앞에 두기도 하고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남궁민처럼 엉뚱한 부서로 보내는 경우는 들어봤지만 6개월 동안의 길고 긴 체계적인 자기 반성문을 쓰는 과제는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최근 들어 드러나고 있는 삼성의 체계적인 노조 파괴 행태를 보면 모법인에서 배워온 수법이였겠구나 싶기도 하다.
 
황당함도 잠시 내게 닥친 현실을 직면하고 우선 내가 존경한 부서 내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역시 나처럼 황당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해왔던 근무태만과 여러 일들로 눈 밖에 났던 사람이여서 '오죽 했으면 총무처에서 저렇게까지 했겠나'라는 시각도 있었다. 물론 나 역시도 전임자가 싫었다. 업무 인수인계를 받으면서도 황당한 부분도 많았고 일을 해가면서 계속 문제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총무처가 원한대로 voice of customer에 있어 최적의 인물일 수 있었다. 조목 조목 그 사람의 문제점을 5페이지 넘게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떤 대단한 양심이 있어서는 아니였고 그냥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부서장에게도 다시 부탁을 했고 부서장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주었다. 또 다행히도 내가 근무하던 대학교에는 노조가 있어서 노조위원장에게도 긴 메일을 써서 보내고 직접 만나서 간청을 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직장 내 여러 선배들을 만나며 이게 왜 잘못된 상황인지 알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상황은 악화되어갔다. voice of customer 단계를 지나 6시그마의 다음 과제를 밟아가며 3명은 정신과 상담도 받으며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인지하고 개선해갈 것을 요구받고 있었다. 노조 역시 총무처와 협의가 되어 3명을 내치는 조건으로 구조조정을 최소화하고 있었다. 조직 내에서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3명에 대한 동정표도 많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의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의 시처럼 처음에는 조직에서 미움받는 3명이지만 그 다음에는 우리의 일이 될 수 있다고 외쳐보았지만 3년차 신입 직원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니, 나도 조직에서 미움을 받을까 두려워서 목소리를 더 내기 힘들었다.

결국 그 사람도 나도 퇴사를 했다 

결국 3명 중 2명은 총무처에서 원했던대로 자진 퇴사를 했다. 그리고 내 전임자는 6개월간의 모욕적인 과정을 다 이겨내고(?) 과제 발표를 했다. 전 직원들 앞에서 '왜 나는 일을 못 하는가'를 개선한 해결책을 발표했다. 이 이상한 상황에서도 많은 이들이 "참 뻔뻔하다"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욕심 없고 성실하고 착한 교직원 선후배들이 말이다. 갑자기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그렇지만 그 해 결혼도 했고 몇 십년을 함께 지낼 선후배들과 난 잘 지내야했다. 그래도 알량하게 '난 동의하지 않고 문제제기를 했어'라고 핑계를 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전임자는 결국 다른 이슈로 결국 퇴사했다.
 
더 아이러니했던 건 나는 그동안의 업무 성과와 함께 직장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인정받아 교직원 엘리트코스인 전략기획팀으로 발령받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4년차 직원이 되었고 난 또 잘 적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더 큰 부당한 일을 겪게 되고 결국 '신의 직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이 지났고 정권도 바뀌었지만 여전히 얘기하기 힘든 일이였다. 내부고발자가 되기도 그렇다고 부당한 지시를 이행하기도 어려웠다. 다행히도 아내가 내 상황을 이해해주고 도움을 줘서 난 아내가 일하는 협동조합연구소로 이직을 했다. 일찍이 대학생 때 대학생협 학생위원을 하며 협동조합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스스로에게 떳떳한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컸다. 대학 교직원으로서도 로스쿨 보고서, BK21 플러스 보고서 작업 등을 했기에 노력하면 충분히 제 몫을 할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아내나 연구소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연봉은 얼마든 상관없다고 했고 교직원 때 비해 1500만원 깍인 금액에 계약을 했지만 즐거웠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했어요 


하지만 사회적가치를 추구하는 협동조합, 사회적경제에서도 교직원 때와 비슷한 노동이슈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교직원 때보다 더 가슴 아프기도 했다. 평소 존경해마지 않던 분들의 안좋은 모습을 알게되고 항의하고 때로는 미워하게 되는 일은 괴로운 일이였다. 그럼에도 힘이 닿는 한 그 분들의 옆에 서고 싶었다. 그렇게 함께일하는 재단 노조에, 마인드프리즘 노조에 함께 하려 노력했고 '공익단체 바로세우기 시민사회 대책위원회(바로)'도 함께 했다. 어떤 사람들은 '수원씨는 반골 기질이 강한가봐', '남의 일에 참 오지랖도 넓네'라고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실 '미안함'과 '죄책감'이였다. 2012년 1월 내게 왔던 전임자에게 한 번도 얘기 못했던 미안함이였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2012년 한 해 나를 매일 매일 괴롭혔던 과거에 대한 사죄였다. 그 미안한 마음을 덜고 싶었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문종원 기수의 부인이 얘기한 "남편은 하루 하루 조금씩 죽어갔던 것일지 모릅니다. 유서의 내용을 밝혀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는 호소에 또 미안하고 가슴 아팠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내가 다 해결할 순 없어
 
결국 지켜주지 못했던 책임감을 덜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의 몸과 마음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2012년의 나도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스토브리그>에서 동생과 아버지의 사고 등으로 죄책감에 계속 허우적대는 남궁민에게 동생이 "나는 이미 그 사고로부터 나왔으니 제발 이제 그만 나와"라고 얘기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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