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육아일기를 씁니다.

외로움은 가장 늦게 가르쳐줄게.

오후 6. 초조하다.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도로는 꽉 막혀 있고, 내가 탄 차는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다.

오후 630. 도로가 막히지 않아도, 제 시간에 도착하기 빠듯한 시간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늦을 게 뻔하다.

오후 7. 늦었다. 어린이집이 문을 닫는 오후 730분까지 도저히 도착할 수 없다. 체념하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연신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아이를 잘 데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오세요라고 했다. 그 말에 괜히 더 미안하고 속상했다. 그리고 혼자 있을 아이를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앞섰다.

오후 740. 지하철에서 내린 뒤, 헐레벌떡 뛰어 어린이집에 닿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슬쩍 신발장을 보니, 아이 신발밖에 없다. 아이는 최소 30분 동안 친구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선생님과 단둘이 있었을 것이다.

곧 선생님이 나왔다. 아이는 선생님 품에 안겨 자고 있었다. 아이가 이 시간에 자는 건 처음 봤다. 아이는 왜 이렇게 빨리 잠들었을까. 그렇게 외로움을 달래려고 했을까. 아이를 안으니, 아이가 눈을 떴다. 아빠임을 확인하더니 잠에서 깨서 싱글벙글 웃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아이에게 미안해. 미안해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얼마 전 아내는 일을 구했다. 아내가 면접에서 눈물을 쏟던 날을 기억한다. 결국 아내는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 아내도 나도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곧 현실적인 고민 앞에 섰다. 아침 일찍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저녁에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내는 평일 이틀은 퇴근 후에 학교에 간다. 늦은 밤 일과 공부를 마무리한 뒤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는 내가 아이를 데려와야 한다. 기자라는 직업은 정시 퇴근이 쉽지 않다. 그날도 경기도 성남에 취재를 갔다가, 시간 맞춰 서울 서대문구로 돌아와야 했다. 급하게 일을 마무리했다. 그렇다보니, 만족스럽지 못한 기사를 썼다. 그렇다고 어린이집에 제 시간에 도착한 것도 아니다. 나와 아이 모두에게 참 미안한 하루였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가 갑자기 아프면 어쩌지?’ 아내는 새로 들어간 회사에 하루 쉬겠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도 급한 취재가 있다면, 취소하는 건 쉽지 않다. 아이를 대신 맡아줄 사람은 없다. 제발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 우리 부부는 진정한 육아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풀 수 없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사람처럼, 막막함이 앞선다.

어린이집에 홀로 남은 아이를 보면서, 아이에게 외로움은 최대한 늦게 가르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년 시절, 부모님은 항상 일하셨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왔 , 내겐 친구가 없었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직도 휑한 집안에 외롭게 앉아 있는 어린 내 모습이 생각난다. 아이가 기형도 시인의 <엄마생각>이라는 시를 이해하는 날이 안 왔으면 좋겠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시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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