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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지극히 주관적인

지극히 주관적인 1월의 기대작 세 편

2015년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2014년에 보지 못한 영화들은 어찌하라고 벌써 새해가 이렇게 밝아서, 해는 또 일곱 번이나 떴다 졌다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수없이 뒤로한 영화들만큼 올해에도 수많은 영화가 개봉될 테니까. 아쉬운 건 아쉬운 대로 남겨두고, 다가올 영화들에 기대나 한번 해보는 편도 나쁘진 않겠다. 그렇다고 (나 같은 경우는 게으름 때문에) 미처 보지 못한 수많은 2014년도의 영화들에 대한 죄책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안하다!

이번 1월에도 어김없이 여러 편의 영화들이 개봉될 예정이다. 개중에는 벌써 볼 생각이 눈곱만큼도 안 드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개봉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영화도 있다. 물론 둘을 나누는 기준점은 주관적인 기대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 그러니 뭔가 객관적인 분석에 기반을 둔 기대 평을 보고 싶었던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누르셔도 좋다. 나는 누구처럼 그런 분들에게 복수하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없으니. 혹시나 그것은 걱정 안 하셔도 좋다. 심지어 나는 아래 소개할 영화들에 대한 줄거리조차 제대로 모르는 상태다. 이런 무대뽀가 다 있냐고? 미안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 글은 전적으로 영화에 대한 나의 피상적이고 편파적인 ‘기대’에 충실할 것이다. <허삼관>, <강남 1970>, <미스터 터너>. 그럼, <허삼관>부터. 


<허삼관> (1월 15일 개봉) - ‘감독’ 하정우에 대한 첫 번째 기대

 


작년 여름. 얼마 먹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이 제한’ 때문에 마지막으로 내일로를 이용했다. 순천에선 편리하게 도시를 한 바퀴 돌 심산으로 만 원어치 시티투어를 신청했다. 순천만 등 명소들을 들린 뒤, 버스는 어느 영화 세트장에 정차했다. 지금도 이 세트장에서 영화를 찍고 있다며 가이드는 말문을 뗐다. 반색하며 무슨 영화냐 물었다. “무슨 영환지는 모르겠고. 그 누구냐, 하정우가 감독하는 영화던데.”


 아니, 감독 하정우라면 그 <롤러코스터>의 감독 하정우? <롤러코스터>가 감독으로서 하정우의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가 될 줄 알았건만, 영화를 또 찍는 것인가. 하정우가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는 얘길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이러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 잡았다. 나는 누군가 ‘실망했다’라는 말을 하더라도 좀처럼 믿지 않는 편이다. 실망했다는 것은 애초에 어떤 기대를 품고 있었다는 것인데, 기대라는 게 그렇게 쉽사리 품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하정우에 대한 충만한 기대를 품고 <롤러코스터>를 보았고, 영화가 끝난 뒤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무함과 절망감을 느꼈지만, 그것을 ‘실망’이라고 표현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분명 하정우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었을지라도, ‘감독’ 하정우에 대해서라면 아무 것도 알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지금 내게 ‘감독’ 하정우에 대한 기대가 바닥을 찍었다는 점이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감독’ 하정우가 맡은 단 하나의 모든 작품은 꽝이었고, 앞으로 무슨 영화를 만들든 그것보다 못하진 않으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감독’ 하정우의 차기작에 대해서 나는 털끝만치도 기대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허삼관>은 왠지 기대가 된다. 위화 원작 『허삼관 매혈기』가 워낙 잘 쓰인 소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감독’ 이전에 배우 ‘하정우’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배우와 감독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그렇지만 나는 ‘배우’ 하정우의 초점이 흐릿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 아무 생각 없는 와중에 골똘히 몰입하는 듯한 표정, 무심하면서도 깊은 내면연기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만의 페이소스가 충분히 그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에서도 발휘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혹시 <허삼관>을 보고 난 뒤, <롤러코스터> 때와 유사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분명 실망감일 것이다. 다시는 하정우가 감독한 영화를 안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더 기대해보려고 한다. 배우 하정우의 페이소스가 그의 영화 속에 묻어 나오기를. 역시 누구나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겪을수 밖에 없다는 것을 멋지게 보여주기를. 하정우에 대해 처음으로 실망하게 되지 않기를. 


<강남 1970> (1월 21일 개봉) - 이번마저 나를 실망시킬 건가요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어떤 영화에 대해 실망감을 느낀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두 번의 중요한 예외가 있었다. 하나는 <비열한 거리>이고, 다른 하나는 <쌍화점>이었다. 아시다시피 둘 다 유하 감독의 작품들이다. 그런데 <비열한 거리>와 <쌍화점>에서 느꼈던 실망감은 각각 다르다. <쌍화점>에서의 실망감이야  <비열한 거리>를 본 이후에 외면하지 못하고 다시 찾은 유하에 대한 기대감이 꺾였기 때문이었지만, <비열한 거리>는 내가 접했던 유하 감독의 첫 작품이었다. <비열한 거리>를 보기 전, 나는 ‘감독’ 유하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유하의 첫 작품부터 단언컨대, 실망했다.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운다

 


대학에서 전공 진입을 한 뒤, 학교를 어슬렁거리다 문학과 관련된 학회에 가입했던 적이 있었다. 첫 세미나를 마친 뒤 가진 술자리에서, 오늘 처음 만나 별로 친하지도 않은 선배가 주야장천 술을 마시더니 내게 말을 건넸다. “내가 좋아하는 시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유하의 ‘사랑의 지옥’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 좀처럼 나질 않는다. 나는 그때까지 시를 좋아한다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 시는 윤동주, 이육사, 김소월, 황지우 등의 시들이 전부였고, 시를 감상하기 위해선 교과서적 암기가 선행되어야 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시란 오히려 나의 정서를 메마르게 하는 골치 아픈 대상일 뿐이었다. 술자리 내내 ‘사랑의 지옥’, 그리고 유하라는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혹시 잊어버릴 경우를 대비해 선배의 전화번호도 저장해 두었다. 그리고 집에 가자마자 ‘사랑의 지옥’을 찾아 몇 번이고 읽었다.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그 선배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이 구절을 남몰래 훔쳐내었다. 이후로 나는 어딜 가든 저 구절을 품속에 조심스레 감쳐두었다가, 누구라도 만나게 되면 생애 첫 전리품을 의기양양 보여주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시야.” 이 말을 덧붙이는 걸 절대 잊지 않았다. 당시 내 싸이월드 홈피 제목이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이었음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까 유하라는 이름은 내게 감정의 해방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 선배를 거쳐) 유하를 통해 처음으로 시에 대한 교과서적 족쇄를 풀어헤칠 수 있었다. 나는 유하를 통해 비로소 시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분석과 암기가 선행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그런 번잡한 것들이 시를 옭아매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유하를, 그의 시를 접하고 나서야 어떻게 보면 나는 비로소 내 속에서 들끓는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비열한 거리>를 처음 봤을 땐 감독이 유하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때 <비열한 거리>는 꽤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조폭 영화였다. ‘뭐, 봐줄 만하네.’ 정도. 그런데 감독이 유하였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이 복받쳐 올라왔다. 나에게 해방이나 다름없는 유하라는 이름이 ‘그럴듯한 조폭’ 영화에 올라가 있다니. 물론 처음 접한 ‘감독’ 유하에 대한 기대는 일절 없었다. 다만 ‘유하’라는 이름 자체에 대해 기대가 있었다. 그가 던져놓은 감성적 해방의 그물에서 나는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결코 ‘조폭’이라는 소재가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비열한 거리>에서 유하의 시편들에서 느꼈던 감정적 동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유하의 시편처럼 서정적인 감성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시편들을 통해 느꼈던 감성적 풍부함이 좀처럼 영화 속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혹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게 유하는 해방의 이름이다. 감성의 솔직한 분출구 그 자체다. 실망감을 안고, 하지만, 나는 여지없이 유하의 차기작을 보러 가겠다. <강남 1970>은 내가 보는 감독 유하의 세 번째 영화가 될 것이다. 내가 ‘감독’이라는 타이틀 이전에 ‘유하’라는 이름에 걸고 있는 기대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줬으면 한다.


<미스터 터너> (1월 22일 개봉) – 영화는 영화다

 


윌러엄 터너를 잘 안다곤 할 수 없지만, 관심은 지속해서 가져왔다. 터너의 회화를 멀리서 보노라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상파 회화 특유의 질감이나 조악한 듯 세련된 아름다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터너의 진수는 회화를 가까이 볼 때야 비로소 드러난다. 가까이서 본 터너의 회화는 멀리서 봤을 때와 전혀 다르다. 멀리서 봤을 때 얼핏 다가왔던 회화의 전체적인 이미지들이 가까이에서는 그저 ‘붓질’에 불과해진다. 터너의 진정한 뛰어남은 회화 자체가 아니라 이 둘의 간극에 있다. 정갈함과 혼란통의 공존.


터너에 대한 내 짧은 소견은 이렇다. 그렇지만 이건 영화에 대한 글이니까. 사실 <미스터 터너>에서 나의 관심사는 터너의 삶, 행적을 얼마나 잘(제대로) 그려냈느냐가 아니다. 또한, 이 영화가 터너의 작품들을 여럿 볼 기회가 되리라 생각지도 않는다. 터너의 삶이 왜곡되더라도, 터너의 작품들이 단 하나도 안 나온다 해도 상관없다. 다만 얼마나 영화가 영화로서 아름다울지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다.

 


일례로, 화가를 다룬 대한 영화 중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피터 웨버, 2003)가 있었다. 동명의 회화로 잘 알려진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콜린 퍼스 분)를 다룬 영화다. 나는 베르메르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영화를 보았지만, 막상 본 영화에서 베르메르는 사실상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 영화에서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던 까닭은 다른 게 아니라 그리트(스칼렛 요한슨 분)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사실상 스칼렛 요한슨을 영화에서 처음 접했다. 몸매가 아니라 얼굴의 곡선도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물론 영화의 밝으면서도 어딘지 음울한 분위기, 베르메르의 회화가 그러하듯 영화 속 명암의 대비 등도 훌륭했다. 어쨌든 영화가 끝날 때 처음 마음과 달리 내게 베르메르는 지워져 있었다.


하여간 <미스터 터너>에서 내가 기대하고 있는 점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번에도 사실상 터너에 대한 관심 때문에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겠지만, 극장을 나오면서는 영화 자체에 매료되어 벅차 있기를. 왜냐하면, 당연한 소리지만 <미스터 터너>는 영화니까. 그리고 영화는 영화니까.

 

* 사진 출처: 다음영화,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