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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피로 지킨 NLL, 더이상 피를 흘리지 않는 게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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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신동엽(1930~1969)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

 

나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발 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 리의

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

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는

평화로운 논밭.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참

재미난 꿈을 꾸었어.

 

그 중립지대가

요술을 부리데.

 

너구리새끼 사람새끼 곰새끼 노루새끼들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 리의 중립지대가

점점 팽창되는데

그 평화지대 양쪽에서

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 도 뒤로 돌데.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

물방개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총칼들 내던져버리데.

 

꽃피는 반도는

남에서 북쪽 끝까지

완충지대,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히 씻겨가고

사랑 뜨는 반도,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면서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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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대한민국 국회

 

역시나 우리나라 정치는 삼류였다. 아니 삼류 정치마저 너무도 후한 평가이지 싶다. 산적한 민생은 외면한 채 정쟁으로 허송세월 하다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2일 국회는 여야 국회의원들의 압도적 찬성으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를 의결했다. 국가 기밀을 담보로 나 살자고 덤벼드는 국회의원들이 지구상 그 어디에도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보정의당, 통합진보당 소속 국회의원들과 박지원 의원 등 민주당 소속 몇몇 국회의원, 무소속 안철수 의원 등은 소신껏 반대표를 행사했다는 점이다. 진보정의당 노회찬 대표는 이번 국회의 결정을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신사의 품격을 지닌 노회찬 의원이기에 이 정도지 국가기밀 유출이 어디 초가삼간 태우는 것에 비하겠는가!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로 야기될 외교적 위축이 고작 썩어가는 도끼자루에 불과할까! 소탐대실이다.

 

 

그렇다면 외교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하겠다는 여야의 결정으로 NLL 논란은 완전히 정리될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아니다. 오히려 새누리당의 전략에 민주당이 놀아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미 국민들은 국정원이 공개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은 '사실상 포기'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 이번 국가기록원의 원본 공개에도 불구하고 NLL 논란이 결코 정리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이 만장일치로 이번 원본 공개를 찬성한 것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고도의 전략이라고 봐야한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대로 자신들 입맛대로 해석해서 '사실상 포기'로 결론냄으로써 두고두고 선거에 활용하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최근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국정원의 조직적 선거개입 사건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정략적 의도가 깔린 결정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신으로써 NLL 논란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문재인 의원의 억울한 심정은 십분 이해하지만 정치 생명을 걸고 제안한 이번 국가기록원 원본 공개는 아쉽지만 두고두고 정치적 발목을 잡을 게 뻔하다. 이명박 정부 이후 국민들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흡입할 수 있는 창구인 언론이 이미 권력에 장악당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지했어야 했다. 

 

대통령의 앞뒤 안맞는 DMZ 평화공원 조성

 

NLL 논란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국정원의 왜곡된 남북정상회담 발췌본으로 보수 유권자들을 결집하는 데 이용했고, 새누리당과 국정원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조직적으로 선거에 이용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은 '피로 지킨 NLL' 운운하면서 NLL 논란에 불을 지핀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발언이다. NLL로 인해 더이상 국민들이 피를 흘리지 않을 해법을 찾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소모적 논쟁만 더 키우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성공적 추진을 위한 DMZ 평화공원 조성' 구상을 '노무현의 서해평화지대가 NLL 포기면 박근혜 대통령의 세계평화공원은 DMZ 포기냐'라고 비아냥대는 것이다.

 

 

시인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너구리새끼, 사람새끼, 곰새끼, 노루새끼들이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 리의 중립지대인 DMZ 양쪽에서 총부리를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 도 뒤로 돌고, 서귀포 밖과 두만강 밖으로 총칼들을 내던져버리는 꿈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순간인가! 그러나 허망하다. 꽃피는 반도, 사랑 뜨는 반도가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잔 탓에 꾼 우스운 꿈이었다니.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냉전의 가장 지독한 참상을 목도했고, 그 냉전이 사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시대를 살았으니 시인에게 사람과 동물이 더불어 평화롭게 뛰노는 DMZ가 꼭 이루어져야 할 꿈이면서 동시에 좌절된 꿈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반세기가 지나 전세계가 탈냉전을 뛰어넘었지만 이 조그만 반도에서 냉전은 여전히 모든 것을 잡아먹는 잡식 괴물이면서 피 흘리지 않는 평화보다는 피 흘리는 대결을 강요받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국가 기밀마저도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권력은 그런 국가 기밀을 권력 연장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번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원본이 공개되고 나면 국민들은 이명박 전대통령이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언급했을 독도와 일본군 위안부 관련 대화록도 보자고 할 것이고, 박근혜 대통령이 2002년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회담에서 언급했던 내용들도 보자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시인이 살아있다면 하루하루 술을 마시지 않고는 온전히 버텨내기 힘든 요즘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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