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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국비유학생이 떠돌이 약장수로 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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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박태원의 『최노인전 초록』/「문장」임시증간7호(1939.7)/창비사 펴냄

구한말 조선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던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다시 조선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다
. 김홍집, 박영효 등 친일파 내각은 홍범 14를 발표하는 등 대한제국의 개혁을 천명하고 나섰다. 이 때 주한일본공사의 제안으로 제1차 관비유학생이 파견된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침략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개화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관비 유학생의 대부분은 양반 자제들로 200명 가까운 이들 조선 관비유학생을 받아들인 곳이 바로 복택유길(福澤諭吉)의 경응의숙이었다. 그러나 1895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중도 탈락하는 유학생들이 생겨났고 아관파천사건으로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들고 급기야 1896년 대한제국 정부는 관비유학생 전원을 국내로 소환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박태원의 소설 『최노인전 초록』은 구한말 대한제국의 제1차 관비유학생 파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 『춘보』와 함께 박태원 역사소설의 단초가 된 소설이기도 하다. 『춘보』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민중 중심의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소설은 구한말 국비유학생이었던 최노인의 일제 말기에 이르는 인생역정을 통해 당시 처참했던 조선민중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박태원이 일제 당시 썼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민중들의 삶을 관조적 입장에서만 바라볼 뿐 작가 자신의 적극적인 휴머니즘이나 저항의식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최노인은 왜 떠돌이 약장수가 되었을까? 

 

『춘보』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박태원 소설의 주인공들은 약삭빠르지 못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무지하지만 세상을 소박하게 살아가는 민중들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민중들의 힘겨운 삶에 대한 투쟁은 다시 지배권력에 대한 분노로 연결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최노인전 초록』의 주인공 최노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삼십 년 이상을 매약행상(賣藥行商)으로 일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알코올 중독자다. 앞서 언급했던 제1차 관비유학생의 일원이었던 최노인이 굳이 떠돌이 약장수로 평생을 살아가도록 설정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관비유학생 파견이 유명무실해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정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노인은 이 때 중도 탈락한 관비유학생이었다. 1차 관비유학생 파견이 1895 5월이었고 대한제국의 유학생 파견 해지를 통보한 시점이 1896 12월이었는데 소설 속에서 유학생활이 1년이 지나지 못했다는 표현을 감안한다면 최노인은 을미정변때 중도 탈락한 유학생이 확실해 보인다. 최노인도 저자 박태원도 관비유학생 파견을 제안한 일본 제국주의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다. 결국 최노인이 관비유학생의 프리미엄을 포기한 것은 대한제국과 일제에 이르는 지배권력에 대한 작은 저항의지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반면 최노인처럼 관비유학생의 일원이었던 동창들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이후 중추원이나 실업계에서 일하는 등 일제의 부역에 앞장서는 역할을 하게 된다.

 

, 누가? 내가? 내가 그 사람들허구 상종을 헌다?..., 어림두 없는 말여보, 사람이 서루 상종을 헌다는 게, 그게 그렇습니다. 둘이 다아, 권세가 있으면 권세가 있다든지, 부자면 부자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한편은 돈이 있구 또 한편은 지위가 당당허든지어떻게 그렇게 서루 저울질을 해서 저울대가 평평해야만 상종이 되는 게지. 한편이 무엇으루든 너무 기울고 본죽슨 상대가 안되단 말이야. 가만히 두고 보구료. 세상형편이 꼭 그렇습니다.” -『최노인전 초록』 중에서-

 

봉건잔재와 세대간 갈등

 

최노인이 떠돌이 약장수가 된 데는 자식들과의 갈등이 한 몫 했다. 딸만 둘이었던 최노인은 큰딸의 남편으로 데릴사위를 구하게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유입은 군사부일체라는 봉건적 인습을 용납하지 않게 되고 최노인은 큰딸 부부와의 갈등으로 종로 양약국에 찾아들면서 평생 눌러앉게 된 것이다.

 

봉건적 인습은 최노인의 유학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최노인이 당시 인물로 꼽은 경응의숙의 총장 복택유길은 조선 유학생들을 면담하면서 장차 무슨 공부를 할 것인지 묻지만 관비유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정치만 들먹인다. 구미선진국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공업과 실업 방면으로도 역할을 해야 한다는 복택유길의 제안은 사농공상의 봉건적 인습에 젖어있던 조선유학생들을 끝내 설득하지 못한다. 한편 복택유길의 말에서 당시 일본이 관비유학생 파견을 추진했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래, 모조리 정치과에 학적을 두었으나, 명색이 대학생이지, 우선 아이우에오, 카키쿠케코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들에게 선생의 강의가 이해될 턱이 없었다. 그래 대부분의 학생은 학업에 흥미를 못 가진 채, 툭 하면 학교로 향할 발길을 공관으로 돌리고 그랬다. -『최노인전 초록』 중에서-

 

저자 박태원의 소극적 저항의지는 최노인이 윤치호옹보다 더 오래 살 것을 계획하고 있는 것에서 역설적으로 표현된다. 윤치호가 누군가! 독립운동가였던 윤치호는 3·1운동을 계기로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하는 인물이다. 일제 말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과 결의를 다지고 조선 청년들의 징병을 독려한 윤치호의 일본식 이름은 이토 지코(伊東致昊)’이다.

 

근대에 사회적 인물로는 내가 월남 이상재 선생을 추앙하였습니다. 월남선생 돌아가셨을 때는 내가 영구를 뫼시구 남문 밖까지 따라 갔었으니까월남 선생 돌아가신 후의 인물로는 윤치호 선생인데, 그분 돌아가시면 내 또 영구 따라 나서야지.” -『최노인전 초록』 중에서-

 

외상으로 약을 놓고 외상으로 술을 마시며 평생 떠돌이 약장수로 살고 있는 최노인의 일상은 당시 민중들의 삶이었고 대한제국에서 일제에 이르는 지배권력의 횡포에 대한 고발이다.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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