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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뽕', 아직도 에로영화로만 기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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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향의 <뽕>/1925년

사람의 기억이란 게 참 묘하다. 한 번 저장된 이미지는 쉬 변하지 않는다. 그 자리를 새로운 이미지로 덧칠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낙인찍기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도 이런 기억의 특성 때문이겠다. 나도향의 소설 『뽕』을 읽는 내내 야릇한 상상이 허공을 맴도는 것도 이런 이유일게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에로티시즘 영화가 바로 <>이다. 영화 <>의 원작이 나도향 소설이라는 사실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을 대표하는 단편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는 이가 얼마나 있었을까? 혹여 알고 있었다치더라도 자극적이고 매혹적인 영상에 매료되어 <>과 소설은 어색한 동거가 되고만다.

 

에로티시즘 영화에는 늘 예술이니 외설이니 하는 논란이 따라붙는다. 예술의 한 장르로서 영화를 바라보는 아주 유치한 논란인지도 모른다. 에로티시즘 영화는 그런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당사자의 고상함과 고매함 뒤에 숨은 가식과 허위를 발가벗기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은 그런 논란의 와중에 소설『뽕』의 주제의식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잠깐, ‘님도 보고 뽕도 딴다는 속담이 있다. 일석이조를 이르는 말일진대 소설이며 영화며 속담에 왜 뽕은 에로티시즘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일까? 누에가 뽕내를 맡고 달려드는 모습에서 사랑에 탐닉한 남녀관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자발적 매춘?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나도향의 소설 『뽕』은 20세기 초 식민지 조선에 불어닥친 자유연애의 바람을 당시 시대조류보다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 안협집은 다른 소설에서는 보기 어려운 설정으로 묘사된다. 요즘으로 치자면 안협집은 자발적 매춘전선에 뛰어든 여성이다. 그녀의 탁월한 외모는 동네 계집들을 모두 거울 앞으로 모이게 해 자기결함이 폭로되는 환멸을 느끼게 할 정도다. 그러나 촌구석에서 아무렇게나 자란 데다 먼저 안 것이 돈이다 보니 벌써 십오륙 세에 정조를 빼앗긴 그녀다. 이 동네에 시집와서도 돈푼이나 있고 얌전한 젊은 사람은 거의 다 후려내었을 정도다. 그녀는 그녀만의 굳은 신념이 있다.

 

돈만 있으면 서방도 있고 먹을 것, 입을 것이 다 있지.’

 

사회적이거나 환경적 요인에 의해 매춘에 빠지는 다른 소설 속 주인공들과 달리 안협집은 매춘녀로 타고난 것처럼 묘사된다. 그렇다면 안협집은 자발적으로 매춘을 선택했을까? 그녀의 천성이 본디 헤프다하지만 그녀를 부추기고 더 깊은 나락으로 몰아낸 장본인은 그녀 자신이라기보다 외부적 요인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얘기하는 것은 입아픈 일일테고 땅딸보’, ‘아편쟁이’, ‘오리궁둥이’, ‘노름꾼으로 묘사되는 남편 김삼보가 있다. 또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듯이 시시각각 그녀를 노리는 뒷집 머슴 삼돌이가 있다.

 

일상과 일탈의 묘한 어울림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 ‘뽕밭은 어떤 의미일까? 안협집에게 뽕은 한 달에 한 번 집에 들어올까 말까 하는 노름꾼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삶의 터전이다. 남편도 그녀의 행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뽕밭에서 나온 수입은 김상보의 노자돈이 되고 노름판 밑천이 되기 때문이다. 뽕밭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실현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뽕밭에는 늘 안협집을 노리는 삼돌이가 있다. 누에에게 먹일 뽕잎이 없어 안협집과 함께 이웃 뽕밭으로 도둑질간 삼돌이의 관심사는 뽕밭 이랑에 그녀를 눕힐 생각만 하고 있다. 그뿐이던가! 뽕지기에게  잡힌 안협집은 자기의 정조를 팔아 위기를 넘기게 된다.

 

안협집은 이 웃음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그 웃음은 안협집의 손아귀에 자기를 갖다쥐어준다는 웃음이다. 안협집은 따라서 방싯 웃었다. 그 웃음 한 번이 넉넉히 뽕지기의 마음을 반 이상이나 흰죽 풀어지게 하였다.”

 

삼돌이는 이 사건을 핑계삼아 안협집을 겁박하고 겁탈을 시도한다. 현장을 목격한 남편 김삼보의 태도에서 그릇된 욕망과 그 욕망에 기생하려는 인간의 또 다른 욕망이 씁쓸함을 더해준다.

 

김삼보는 분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계집의 소행을 짐작도 하려니와 삼돌이의 주먹도 아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계집이 먹여살리라는 말이 없고 이혼하자는 말만 없는 것이 다해애서 서방질을 해도 눈을 감아주고 무슨 짓을 하든지 그저 코대답만 하여주는 터이라 그런 소리가 귓전으로 들릴 뿐이다.”

 

김삼보는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 안협집은 기절했다. 김삼보는 기겁하여 약국으로 가 약을 사왔다. 집에 왔을 때 아내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다음날 이들 부부는 서로 말도 없이 앉아 밥도 먹고 옷도 주고받고 하루를 더 묵어 김삼보는 또 다시 노름판으로 향하였다. 각자의 욕망을 위해 일상과 일탈이 절묘하게 조화되는 순간이다.

 

매춘이 기원전 5천년 메소포타미아 신전을 지키는 수메르 여성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인류의 역사가 바로 매춘의 역사로 귀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우리 기록에도 조선시대 관기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유곽이라는 공창이 있었지 않은가! 현재도 매춘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얼마 전에는 여성의 10%가 매춘관련 직업에 종사한다는 충격적인 보도까지 있었다. 다들 혀를 찼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자 하는 흔적은 없었다.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폄하되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각기 다른 욕망은 수요와 공급의 경제원칙이 되어 암묵적으로 용인된다. 그러나 타인의 욕망은 헛된 욕망이 되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 나 자신도 그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 말이다.

 

안협집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으랴! 노름꾼 남편 김삼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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