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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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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고을 광주의 도서관'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계엄군이 집단 발포를 하자, 시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집단 발포에 분노한 시민은 5월 21일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를 확보해서 금남로로 몰고 나왔다. 화순과 강진, 나주, 담양에서 총기를 확보해 시민은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위'는 '교전'으로, '참여'는 '참전'으로 바뀌었다. 5월 21일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물리쳤다. 경무장에 가까운 시민들이 3개 여단 2천5백 명에 달하는 공수특전단을 물리친 것이다.

행정과 치안의 공백 상황에서 시민군은 전남도청을 장악하고 질서정연하게 치안을 유지했다. 1894년 6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장악한 이래 민중이 도청사를 장악한 건 80여 년만에 처음이었다. 광주 시민은 사재기를 자제하고 부상자를 위한 헌혈에 앞장섰다. 

약무광주 시무민주
 
조선대학교 대운동장과 중앙도서관 5.18 당시 조선대학교 대운동장은 7공수여단이 주둔했던 공간이다. 5월 19일부터 21일 사이에 계엄군에 끌려온 시민과 학생이 조선대 체육관에서 고문과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대운동장 뒤로 보이는 건물은 2003년 개관한 조선대학교 중앙도서관이다. 중앙도서관 뒤로 보이는 건물이 조선대학교 본관이다. 한때 본관 일부 공간이 ‘도서관’으로 쓰였다. 조선대학교 본관은 이길성이 설계했고, 1948년 건립한 박공지붕의 조적조 6층 건물이다. ⓒ 백창민
 
범죄도 거의 일어나지 않아 신군부가 주장한 폭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광주 시내 42개 은행에는 1500억 원이 넘는 현금이 있었고, 도청과 여러 회사 건물에도 많은 현금이 있었으나 누구도 이 돈을 훔치지 않았다. 이 시기 해방된 광주가 '절대공동체' 또는 '광주 코뮌'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을 차단하고 전화와 교통이 끊기면서 광주는 고립되었다. '해방'된 광주는 '고립'된 광주였다.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 시민은 광주가 어떤 상황인지 몰랐다. <봄날>을 쓴 임철우가 '그 시절 광주 시민에게 주님은, 유일한 구원은 광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광주 시민은 철저히 '고립'되었고 처절하게 '고독'했다. 

신군부는 광주의 투쟁이 광주 밖으로 퍼져 전국적 저항으로 이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광주에서 터진 참상은 6개월 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처럼 철저히 통제되고 봉인되었다.

외곽으로 물러난 계엄군은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5월 23일은 주남마을, 5월 24일에는 송암마을에서 학살이 이어졌다. 주남마을에서는 공수부대가 버스를 난사해서 18명 승객 중 17명이 죽었다. 송암마을에서 학살이 있던 5월 24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는 박정희를 저격해서 유신 체제를 끝낸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광주는 5.18 민주항쟁에 앞서 1960년 3.15 부정선거 때도 시민들이 분연히 일어난 곳이다. 3.15 부정선거 당시 광주 가톨릭센터 앞 거리에 시민 1천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하면서 광주 금남로에서만 시민 7명이 죽고 1백여 명이 부상 당했다. 마산과 함께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가장 빨리 일어난 곳이 광주 '금남로'다. 광주에 '4.19혁명기념관'이 있는 건 이 때문이다.

'금남로'는 이한열, 강경대, 박승희 같은 수많은 열사가 망월동 묘역에서 영면하기 전 노제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광주 금남로는 인조 때 이괄의 난을 진압하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진 충무공 정충신을 기려 붙인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한 또다른 '충무공' 이순신은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를 지킬 수 없었을 것'(若無湖南 是無國家)이라고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광주 항쟁이 없었다면 민주화된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若無光州 是無民主)이다. 

금남로는 임진왜란 때 맹활약한 의병장 김덕령의 시호를 딴 '충장로'와 함께 광주를 대표하는 거리다. 5.18 광주민주항쟁을 거치면서 '금남로'는 광주의 거리가 아닌 한국의 비극적인 현대사, 나아가 아시아 민주화를 상징하는 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왜 총을 놓지 않고 싸웠을까
 
전남도청 전일빌딩 245에서 바라본 전남도청 전경. 5월 21일 시민을 향한 집단 발포가 있었던 곳이며, 5월 27일 새벽 시민군이 계엄군에 맞서 최후 항전을 벌인 곳이다. 전남도청 본관은 일제 강점기 전남에서 조선인 건축가로 유일하게 활동한 김순하가 1925년 설계한 건물이다. 1975년 김태만에 의해 3층으로 증축 설계되었다. 본관 왼편에 있는 전남도청 회의실(옛 민원실) 역시 1930년 김순하가 설계했다. 도청 앞 분수대에서는 1980년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시민 궐기대회가 이어졌다. ⓒ 백창민
 
시민군에 의해 계엄군이 밀려난 후 전남도청은 시민군의 본부이자 중심이었다. 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수습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과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은 지지부진했지만 수습대책위원회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자는 이유로 총기 회수를 결정했다. 상당수 시민군은 계엄군과 협상이 진전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총기 회수에 동의하지 않았다. 총기 '회수'에 찬성하더라도 계엄군에 '반납'하는 건 반대했다.

수습대책위원회의 미온적인 활동이 시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재야 인사가 수습대책위원회에 새롭게 합류했다. 새로운 수습대책위원회는 김성용 신부가 제안한 4가지 사항을 채택하고 최규하 대통령 앞으로 호소문을 발표했다. 수습대책위원회가 밝힌 4가지 사항은 ▲ 이번 사태는 정부의 잘못임을 시인할 것 ▲ 사과하고 용서를 청할 것 ▲ 모든 피해는 정부가 보상할 것 ▲ 어떠한 보복 조치도 없을 것이었다.

광주 수습대책위원회의 꾸준한 무기 회수 작업으로 4천5백여 정의 총과 1천개 이상의 수류탄이 회수되었다. 5월 24일 당시 수천 명 수준이었던 시민군은 5월 25일 거의 '무장해제' 상태가 되었다.

전남도청 앞에서는 시민 궐기대회가 계속 열렸다. 거리는 행방불명된 가족과 친지의 행방을 찾는 사람으로 넘쳐 났다. 시신이 안치된 도청 앞 상무관에서는 유족과 사람을 찾는 이의 눈물과 탄식이 흘렀다. 김남주 시인이 '학살 1'이라는 시에서 울부짖은 것처럼, "하늘은 핏빛"이었고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다.

한편 계엄군의 무력 진압을 앞두고 도청 안 지도부 안에서 투항하자는 의견이 커졌다. 무기 반납과 투항을 얘기하는 온건파 대신 25일부터 '민주시민투쟁위원회'라는 이름의 항쟁 지도부가 다시 꾸려졌다. 항쟁 지도부는 '투항' 대신 '투쟁'을, '항복' 대신 '항쟁'을 선택했다. 

5월 26일 아침에는 계엄군의 진입을 막기 위해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수습대책위원 17명과 시민들이 전남도청에서 농성동까지 '죽음의 행진'을 했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과 교섭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그날 밤 광주 외곽에서 계엄군이 이동한다는 무전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도청 진압이 임박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한홍구 교수는 진압을 하루 앞둔 1980년 5월 26일 밤 전남도청을 상상해보라고 했다.

'계엄군의 진압을 앞둔 그 시간 그 자리에 있다면 나는 총을 잡고 도청에 남을까, 아니면 총을 버리고 도청을 떠날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한홍구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산 사람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내려놓자고 했고, 죽은 이들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놓을 수 없었다". 자신의 선택과 판단으로 300여 명의 시민이 도청과 그 주변에 남았다.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는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시민의 '최후 항전'이 있었다. 최후 항전 직전인 새벽 3시 50분, 도청에서 스물 한 살 여대생 박영순의 마지막 방송이 울려퍼졌다.

"광주 시민 여러분,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문재학의 영정 한강의 작품 <소년이 온다>에는 학생으로 최후 항전에 참여한 ‘동호’라는 인물이 나온다. 문재학은 ‘동호’의 실제 모델이다. 문재학은 당시 15세로 광주상업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앳된 나이의 수많은 ‘동호’가 광주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켰다. 문재학은 망월동 구 묘역을 거쳐 국립 5.18민주묘역에 묻혀 있다. 묘지 번호는 2-34다. 그의 앞줄에 윤상원과 박기순이 묻혀 있다. ⓒ 백창민
 
한홍구 교수의 표현처럼 '반만년에서 가장 긴 새벽'인 그날 새벽 4시 계엄군은 시민군이 경계하던 도청 정면이 아닌 측면과 후면을 통해 기습적으로 밀고 들어왔다. 계엄군의 일제 사격 후 도청에 진입한 공수부대는 시민군을 향해 총알을 난사했다. 시민군을 이끌던 윤상원은 2층 민원실에서 사망했다. 민원실 건물 지하에는 무기고가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 

시민군 중에는 꽃다운 10대 학생도 여럿 있었다. 광주상고(지금의 광주동성고등학교) 1학년 문재학도 그중 한 명이다. 먼저 간 친구를 생각해 도청에 남은 그는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교련복을 입은 '막내'는 싸늘한 시신으로 가족에게 돌아왔다. 작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동호'는 바로 문재학이다. 문재학의 가족은 막내의 묘비명을 이렇게 새겼다. 

"우리의 마음에 눈물을 주고 너의 가슴엔 한을 남긴 이승의 못 다 이룬 서러운 인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다시 만나리."

계엄군의 진압 작전은 1시간 10분 만에 종료되었다. 계엄군은 투항한 시민군 8명을 도청 앞에서 확인사살하기까지 했다. 계엄군은 도청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이 약 25명, 체포된 사람이 약 200명이라고 발표했다. 최후의 항전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5.18유족회 집계에 의하면 광주민주항쟁 과정에서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된 사람은 65명이다. 부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400명이 넘는다. 

최후 항전을 앞두고 총을 든 사람은 도청에 남고, 총을 놓은 사람은 도청을 빠져나갔다. 총을 들고 싸운 자는 다시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뉘었다. 죽은 자는 죽어서 원통했고, 산 자는 살아서 부끄러웠다. 죽은 자의 원통함과 산 자의 부끄러움은 모두 살아남은 자의 몫으로 남았다.

막강한 무력을 지닌 계엄군에 맞서 시민들이 도청에 남아서 싸운 이유는 뭘까. 계엄군을 상대로 이길 거라고 생각했을까. 최후 항쟁을 이끈 윤상원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후 항전을 앞둔 마지막 회의에서 윤상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뭉쳐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불의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남깁시다. 이 새벽을 넘기면 기필코 새벽이 옵니다."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했을 때 도청을 지키던 시민들이 모두 도망 갔다면, 광주에서의 항쟁은 '폭동'으로, 계엄군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은 '폭도'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5월 26일 오후 5시 광주에서 취재 중인 외신 기자를 대상으로 최초이자 마지막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차분하지만 죽음을 예견한 눈빛의' 윤상원은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입니다"(We will fight until the last man)라고 말했다. 먼저 희생된 사람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300여 시민은 도청에 남아서 '끝까지' 싸웠다. 그렇게 광주는 자신의 피로 '항쟁'의 역사를 썼다.

목사인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5월 26일 도청으로 향한 신학대생도 있었다. 한신대 류동운은 붙잡는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도청으로 돌아가 '산화'했다. 

"다른 집 자녀는 다 희생당하고 있는데, 왜 저만 보호하려고 하십니까?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먄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스파르타의 300'은 알지만 도청을 지킨 '광주의 300'을 모른다면, 당신은 '무지'한 것이 아니라 '무심'한 것이다. 당신이 광주민주항쟁이 간첩에 놀아난 폭도의 폭동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무지막지'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런 '생각없는 삶'(life without thinking)과 '무지막지'가 쌓여 악은 자라난다. 나아가 한 사회를 집어 삼키는 '광기'가 된다. 광주민주항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작가 한강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수곡동 묘역은 왜 '망월동 묘역'이라 불렸을까
 
옛 망월동 묘역 망월시립묘지 ‘제3묘원’이 바로 ‘민주열사묘역’이다. 국립 5.18민주묘역이 새롭게 조성되었지만 이곳을 찾는 이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묘역 참배를 막는 정권 때문에, 한때는 이곳을 찾는 것 자체가 ‘투쟁’이던 시대가 있었다. 묘역 입구에는 사람들이 밟고 지날 수 있도록 학살자 전두환, 이순자 부부의 명패를 묻어 두었다. ⓒ 백창민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의 정재호 소장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계엄군이 도청에 들이닥쳤는데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역사가 1980년 광주를 어떻게 기록했겠습니까. 상원이 형을 비롯해 도청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 때문에 5.18이 폭동이 아니라 민중항쟁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겁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 말입니다."

탁영호는 5.18 광주민중항쟁을 <도바리>라는 만화로 그렸다. <도바리>에서 그는 5월 27일 새벽 도청에 남은 시민군에게 그곳은 "자유의 종착역이고 저승행 출발역"이라고 묘사했다. 도청을 사수하고 '떠난' 그들 덕분에 광주는 '남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의 출발역"이 되었다.

계엄군 발포로 인한 최초의 부상자도 학생이었지만,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진 마지막 희생자 역시 학생이었다. 도청 진압 작전이 종료된 5월 27일 저녁 7시 40분, 전남대 근처에 살던 서광여중 3학년 김명숙은 친구 집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계엄군의 M16에 맞아 숨졌다. 진압 작전이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 검거 선풍이 일어나면서 1980년 5월 17일부터 7월말까지 2699명이 계엄당국에 체포되었다. 

시민을 죽여서라도 권력을 잡겠다고 날뛴 신군부는 광주가 아니더라도 어딘가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 희생양은 부산이나 대구, 대전, 청주, 춘천이었을 수도 있다. 광주는 우리 누군가가 겪었을, 어쩌면 대한민국이 모두 겪었어야 할 희생을 대신했다.

김준태가 피를 토하듯 절규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에 우리가 전율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광주의 희생을 '뒤늦게' 안 우리가 광주와 광주 시민에게 하염없는 미안함과 부끄러움, 깊은 슬픔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5.18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 쓰러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남도청 앞 상무관에 있던 5.18 희생자의 시신은 5월 29일 오전 관을 10개씩 쌓은 '쓰레기차'에 실려 광주시립공원묘지 제3묘원으로 옮겨졌다.

이날 '운구차'도 아닌 '청소차'에 쓰레기처럼 실려 이곳으로 옮겨진 126구의 시신은 연고자가 없거나 27일 도청에서 계엄군에 의해 숨진 사람들이다. 이외에도 공수부대에게 무참히 살해된 시신을 가족이 직접 수레에 싣고 이곳으로 옮겨온 경우도 많았다.

당시 광주시는 사망자 1명당 가족 5명만 장례에 참석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희생자 가족은 울음조차 참으면서 공포 속에 장례를 치러야했다. 전두환 정권은 한동안 이곳에서 가족의 추모행사와 '제사'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묘역이 성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족을 회유해서 이장(移葬)을 추진하기도 했다.

망월동 구 묘역에는 37명의 민주열사와 2명의 5.18 희생자가 남아 있다. 구 묘역 4시 방향에 조성된 국립 5.18민주묘역은 832명의 5.18 희생자와 행방불명자를 모신 곳이다.

행정구역상 광주시 북구 수곡동 산 29-2번지인 망월동 구 묘역이 '수곡동 묘지'가 아닌 '망월동 묘지'라고 불린 이유는 왜일까. 망월삼거리를 지나 가족을 묻고 돌아온 이들이 수십년 동안 어두운 밤 달만 바라보고 한을 토해 냈던 심정을 '망월동'이라는 이름이 대변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2017년 시점에 광주시가 확인한 광주민주항쟁 사망자는 155명, 부상 후 사망자는 110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 3378명, 기타 910명이다. 총 피해자는 4634명이다.

5월 20일이 '기자의 날'인 이유
 
전일빌딩 근처를 비행하는 헬기 광주민주항쟁 당시 헬기가 총격을 가했다는 증언은 여러 차례 나왔다. 조비오 신부 뿐 아니라 이광영 씨, 아놀드 A. 피터슨 목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헬기 기총 사격을 증언했다. 전일빌딩 내부와 외벽에는 헬기 총격을 받은 흔적이 수백 군데 발견되었다. ⓒ 백창민
 
광주의 '도서관'에는 광주민주항쟁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5월 17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교내에 진입해서,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구금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은 학생 시위의 주요 무대였다.

조선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대운동장은 계엄군이 진주했던 장소다. 계엄군은 5월 19일부터 21일 사이에 시민과 학생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해서 체육관 야전 막사에서 폭행과 고문을 가했다.

조선대학교 본관 뒷산은 5월 21일 시민군의 반격에 따라 공수부대가 퇴각한 경로인 동시에, 5월 27일 도청을 점령한 3공수여단이 진입한 루트였다. 조선대학교 도서관은 1950년 6월 10일 본관 2층에 좌석 200석, 장서 2만 권 규모로 출발했다. 지금의 중앙도서관은 2003년 2월 10일 개관했다. 

1968년 동구 황금동에 개관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은 광주광역시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이 화정동으로 이전하면서 '광주청소년삶디자인센터'가 들어섰다. 지하 1층, 지상 6층 철근콘크리트조로 지은 이 건물은 서범식이 설계했다. 

5.18 당시 학생들은 '학생회관'이라 불린 이곳을 집결지로 삼아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특히 5월 18일 오후 3시 흩어졌던 시위대가 다시 모여,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에 있던 경찰의 차량과 장비를 부순 일은 첫 날 시위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전남도청 앞에 있는 전일빌딩은 헬기 총격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이다. <전남일보> 사옥이었던 이곳에서 계엄군 헬기가 발사한 총탄 자국이 수백 군데 발견되었다. 1968년 세워진 전일빌딩은 금남로에 들어선 최초의 10층 건물로 광주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온 건물이다. 조동희와 오무송이 함께 설계했다.

5월 21일  낮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 때 전일빌딩 옥상에는 공수부대 저격수가 배치되어 시민을 조준 사격했다. 5월 27일 최후 항전 때는 시민군 10여 명이 전일빌딩에 남아서 싸웠다. 

1980년 5월 20일부터 27일까지 많은 기자와 언론인은 신군부의 광주 시민 학살에 항의하며 검열 거부와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2006년 2월 한국기자협회가 5월 20일을 '기자의 날'로 정한 것은 기자 정신을 잊지 않고 저항한 역사적인 날을 기리기 위함이다. 

1980년 여름 신군부는 제작 거부에 참여한 707명의 언론인을 강제로 내쫓고, 40여 개 언론사를 통폐합했다. <전남일보>에서도 많은 언론인이 제작 거부에 참여했고, 15명이 강제해직 당했다. 논설위원 양동균도 제작거부로 <전남일보>를 떠난 언론인 중 한 사람이다. 

'전일도서관' 건물에 날아든 기관총탄 
 
전일빌딩 245 전일빌딩은 광주 금남로에 세워진 최초의 10층 건물이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실시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현장감식을 통해 245개 헬기 총격 흔적을 발견했다(그후 25개 흔적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245는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245개의 탄흔을 의미한다. 전일빌딩의 주소 역시 금남로 245번지다. 전남도청 바로 앞에 있던 전일빌딩은 당시 <전남일보> 사옥이기도 했다. ⓒ 백창민
 
5.18 당시 전일빌딩 6층에는 사립 공공도서관인 '전일도서관'이 있었다. 전일도서관은 <전남일보>와 전일방송을 세운 남봉 김남중 회장이 사재를 들여 만든 도서관이다. 1970년 4월 25일 개관한 전일도서관은 광주에서 두 번째로 문을 연 공공도서관이다. 5천여 평의 면적에 좌석수 725석, 장서 5만 권으로 개관했다. 광주에 도서관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새벽부터 전일도서관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전남도청 앞까지 줄을 서곤 했다. 

1980년 시점에 광주시 도서관 좌석수를 살펴보면,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이 1019석, 전일도서관이 1023석이었다. 5.18 당시 전일도서관은 좌석수를 기준으로 광주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었다. 전일도서관은 1971년 7월 지방 최초로 이동문고 차량을 운영하기도 했다. 

<전남일보>에서 오랫동안 언론인으로 일한 양동균은 1973년 무렵 전일도서관 관장이었다. 1973년 한국도서관협회 총회에서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광주 5.18로 수백 명의 언론인이 언론사를 떠나야 했지만, 양동균은 광주민주항쟁과 관련하여 해직 당한 드문 '도서관인'이 아닐까. 그는 1968년 <신동아> 11월호에 기고한 '호남 푸대접의 진상은 어떤가?'라는 글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호남 차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전일도서관은 김남중 회장 타계 후 '남봉도서관'으로 바뀌었다가 신문사가 매각되는 과정에서 문을 닫았다. 향토자료와 족보자료가 많았던 전일도서관 장서는 전남대와 조선대 도서관에 기증되었다. 5.18 당시 헬기의 총탄이 전일빌딩에 쏟아지던 그 때 전일도서관은 그 건물 6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1986년 전두환은 10.28 건대항쟁 과정에서 헬기를 동원해 도서관에 있던 시위대를 진압했다. 이보다 6년 앞선 광주에서 전두환 신군부는 헬기를 통해 도서관이 있는 건물에 기관총탄을 퍼부었다. 군대와 경찰이 헬기를 동원해서 도서관 건물을 진압하고 총격을 가한 흔치 않은 사례다. 

도서관 건물이 겪은 일련의 사태만으로 전두환 정권 시기가 얼마나 폭압적인 시대였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전두환 신군부가 준비한 전투기를 이용한 '광주 폭격'이 실행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5.18 당시 수원과 경남 사천 군용 비행장에서는 전투기가 폭탄을 장착하고 출격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신군부의 '광주 폭격' 계획은 미국 UCLA 동아시아 도서관 소장 자료를 통해 밝혀졌다. 

전일빌딩에 자리한 <전남일보>는 광주민주항쟁 직후 1980년 6월 2일 발행이 재개된 신문 1면에 헤드라인을 이렇게 뽑았다.

"무등산은 알고 있다"

같은 날 <전남매일신문> 1면에는 김준태 시인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여러 구절 삭제된 채 실렸다. 109행에 달하는 시가 검열에 의해 잘리고 33행만이 실렸다.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 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전남매일신문>은 곧 폐간 당했다. 전남고등학교 교사였던 김준태는 고문을 당한 후 교직에서 쫓겨 났다. 전일빌딩은 광주민주항쟁 40주년을 맞은 2020년 '전일빌딩 245'로 다시 문을 열었다. 245는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총탄 245개를 의미한다. '전일도서관'은 사라졌지만, 새롭게 단장한 '전일빌딩 245' 2층과 3층에는 '디지털정보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도서관'에 남은 항쟁의 흔적
 
무등도서관 1981년 문을 연 무등도서관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도서관, 전일도서관에 이어 광주에서 세 번째로 문을 연 공공도서관이다. 35만 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으로 광주광역시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자랑한다. 좌석수는 1,004석이며 2019년 기준으로 도서관 예산도 광주 도서관 중 가장 많다. ⓒ 백창민
 
'천주교 광주대교구청 본관'은 1961년 대건신학교로 지어져 광주 가톨릭대학교와 광주 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 광주 가톨릭 평생교육원으로 쓰인 건물이다. 대건신학교 시절 본관으로 쓰인 이 건물은 사무실, 교실 용도 외에 '도서관'으로 쓰였다. 2018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계엄군의 헬기 기총 사격을 처음으로 증언한 조비오 신부는 광주 가톨릭 평생교육원의 초대 원장을 지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청 근처에는 계엄군의 지휘본부 역할을 한 옛 '505보안부대' 터가 있다. 

광주광역시 북구 면앙로에 자리한 '무등도서관'은 정주영 현대 회장이 5.18 민주화운동으로 고통받은 광주 시민을 위로하기 위해 1981년 지하 2층, 지상 3층의 도서관을 지어 광주시에 기부한 곳이다. 무등도서관 건립에 관여한 이종일 전 광주광역시 남구 문화원장의 회고에 의하면, 1981년 영광원전 시찰을 위해 전남에 온 전두환이 광주를 방문했다(전두환은 실제로 1981년 2월 19일 영광원전 1, 2호기 기공식에 참석했다). 

전남도청 도지사실에서 환담이 이어질 때 김양배 광주시장은 도서관 건립 요청을 했다고 한다. 당시 이 자리에는 영광원전을 건설 중이던 현대 정주영 회장이 함께 배석했다. 김양배 시장의 요청을 들은 전두환이 정주영 회장에게 도서관 건립을 떠넘겼다. 현대는 총사업비 44억 원을 들여 무등도서관을 건립해서 기부했다.

1981년 12월 15일 무등도서관은 문을 열었다. '관'이 지어야 할 공공도서관을 민간기업에게 떠밀어 지은 곳이 무등도서관이다. 무등도서관이 세워진 곳은 1980년 5월 22일 계엄군의 총격으로 시민 한 명이 사망한 자리이기도 하다. 무등도서관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시민이 숨진 자리에 건립된 드문 도서관이다.

SK가 지어 기부한 '수원선경도서관', 대우가 기부한 '우당도서관'이 도서관에 기업 이름(선경)이나 김우중 총수의 부친 호(우당)를 명명한 것과 달리, 현대는 무등도서관에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무등도서관 건립 시점에 현대건설 대표는 이명박이다. 35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무등도서관은 장서량을 기준으로 광주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다. 

도서관은 아니지만 '녹두서점'은 5.18 당시 들불야학을 이끈 윤상원이 들불야학 강학, 노동자와 함께 <투사회보>를 만든 곳이다. 광주민주항쟁 당시 녹두서점은 <투사회보>를 통해 시민의 눈과 귀, 지도부 역할을 담당했다. 신문과 방송이 관제 언론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투사회보>는 광주에서 유일하게 언론 역할을 했다. 1980년 6월 녹두서점은 없어지고 그 터에 표지석만 남았다.

5.18 당시 항쟁홍보팀의 본부 역할을 한 'YWCA회관' 2층에는 광주양서협동조합이 자리했다. 광주 여성운동의 산실이자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공간이었던 YWCA회관은 건축가 김한섭이 설계한 건물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30여 명의 시민군이 이곳에서 싸우다가 죽고 체포되었다. 5월 20일 택시와 버스 운전사가 집결해 차량 시위를 시작한 무등경기장도 김한섭이 설계했다. 

금남로4가역 근처에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있다. 광주 가톨릭센터를 리모델링해서 기록관으로 만들었다. 1975년 지은 광주 가톨릭센터는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지하 1층, 지상 7층 건물로 박강평이 설계했다. 해방 전에는 전남재판소와 광주법원이 이 자리에 있었다. 2011년 5월 25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5.18 광주민주항쟁 기록물이 소장되어 있고 다양한 전시도 이뤄진다. 이 건물 4층에는 인권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자료, 교양도서를 3만 권 가까이 소장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도서관'이 있다.

5.18 과정에서 시민군은 전남대학교 부속 병원 옥상에 경기관총(LMG) 2대를 설치했다. 시민군이 옥상을 지킨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은 계엄군의 총격과 폭력에 부상 당한 시민을 헌신적으로 치료한 곳이다. 계엄군은 환자가 몰린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에 총격을 가했다. 총알이 날아와 수술실 유리창을 뚫고 천장에 박히기도 했다. 1층 응급실, 3층 원장실, 11층 입원실에도 총알이 날아왔다. 전남대학교 병원 의료진은 야전병원이나 다름없는 병원을 지키며 환자와 시민을 돌봤다. 

당시 12층이었던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은 광주에서 손꼽히는 고층 건물이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주인공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를 비롯한 여러 외국인 기자가 전남대학교 병원 옥상에 머물며 취재를 했다. 병원 옥상 바로 아래 12층에는 전남대학교 부속병원 '도서실'이 자리했다.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은 광주 최초의 근대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있던 자리다. 전남대 부속병원은 한때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쓰인 남산 어린이회관을 설계한 이광노의 작품이다.

오월길과 오월도서관길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은 광주광역시에서 부지와 건물 면적이 가장 큰 도서관이다. 건물 면적에 비해 좌석수는 530석으로 많지 않은 편이다. 2001년 문을 열었고, 장서량은 19만 권이다.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 옆에는 5.18민주화운동학생기념탑이 서 있다. 5.18기념공원은 옛 상무대 자리에 조성되었다. ⓒ 백창민
 
2002년 국립묘지로 승격된 5.18민주묘지에는 '5.18추모관'이 있다. 추모관에는 시민의 시신을 감쌌던 비닐과 태극기, 유품, 계엄군의 진압장비가 전시되어 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5.18추모관은 김인호가 설계했다. 추모관 3층에는 5.18 관련 서적을 비치한 '자료실'이 있다.

전남도청이 광주에서 무안군 신청사로 이전하면서 2015년 9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 asian culture complex)이 조성되었다.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로 광주를 자리매김할 문화발전소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건립한 것이다. 2003년부터 건립 계획에 착수했으나 햇수로 13년 만에 문을 열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14만 제곱미터 면적에 지하 4층, 지상 1층으로 조성했다. 지상보다 지하 공간이 더 큰 이유는 금남로에서 무등산을 조망할 수 있도록 하고, 옛 전남도청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광주민주항쟁의 현장인 전남도청은 아시아문화전당의 일부가 되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건립 과정에서 지역 사회의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광주의 새로운 '랜드마크'의 탄생을 기대했던 시민들은 대부분의 시설물이 지하에 들어서는 당선작의 컨셉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선작에 대해 46차례의 공공 프레젠테이션이 실시되었지만, 완공 후에도 큰 논란을 일으켰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문화 콘텐츠를 보존하고 활용하는 문화정보원, 기획과 창작 시설을 갖춘 문화창조원, 아시아 공연 예술을 선보이는 예술극장, 어린이 놀이와 체험 시설을 갖춘 어린이문화원, 5.18 민주화운동의 가치를 알리고 공유하는 민주평화교류원 5개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빛의 숲'(forest of light)이라는 주제로 건립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설계자는 재미 건축가 우규승이다. 환기미술관과 하버드대학 대학원 기숙사, 다트머스 의과대학이 그의 작품이다. 

자신의 건축물이 '빛고을의 숲'으로 자리매김하길 원했던 건축가는 '비건축화'라는 시도를 통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구현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특정한 외관이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파사드(façade)가 없는 건축물인 이유다. 지상에 조경을 하고 건물은 지중화했기 때문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일반 건물에 비해 40% 정도 에너지 절감 효과가 있다. 

도청 앞에는 5.18민주광장을 두어 도시와 연결하고, 건축물 안에는 중정 개념의 문화 광장을 반지하 형태로 배치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정보원에는 '라이브러리 파크'(library park)가, 어린이문화원에는 '어린이도서관'이 있다. 

광주광역시 동구 장동에는 인권에 관한 장서를 2천여 권 소장한 '알암인권작은도서관'이 있다. 민간에서 문을 연 최초의 인권도서관으로 고 알암 명노근 교수를 기념하여 도서관 이름을 지었다. 명노근 교수는 5.18 과정에서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5.18 당시 시위대의 집결지로 계엄군과 공방이 오갔던 산수오거리 근처 산수공원에는 1997년 '산수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산수오거리는 작가 임철우가 1997년 다섯 권으로 발간한 장편소설 <봄날>의 첫 번째 에피소드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이다. 

도청에서 최후 항전이 있던 5월 27일 새벽, 도청 외곽에도 경계를 선 시민군이 있었다. 10여 명의 시민군이 있던 사직공원은 그런 곳 중 하나다. 사직공원은 풍년을 기원하던 사직단이 있던 곳이다. 시민군 6명이 계엄군에 체포된 사직공원엔 1989년 '사직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사직도서관은 23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광주공원은 5.18 당시 시민군이 무기를 배분하고 훈련을 하던 곳으로 5월 27일 계엄군이 점령한 주요 거점 중 하나다. 광주공원 빛고을시민문화관에는 '문화예술작은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옛 구동공원인 '광주공원'은 광주 최초의 근대 공원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광주신사가 자리했다. 광주공원에 있는 광주향교는 1929년 '광주도서관'을 열기도 했다. 

'금호평생교육관'이 있는 월산동 주변은 5월 27일 새벽 시민군과 7공수여단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교전 과정에서 시민군이 1명, 7공수여단의 장교 1명이 사망했다. 상무대 자리에 조성된 5.18기념공원에는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이 있다.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 옆에는 5.18민주화운동학생기념탑이 있다. 1980년 5월 26일 수습대책위원과 시민이 줄지어 걸어가 '죽음의 행진'을 했던 농성광장 주변에는 2015년 '상록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계엄군에 부상당한 시민을 헌신적으로 진료한 광주기독병원 옆에는 수피아(Speer)여학교 커티스메모리얼홀(The Bell memorial chapel)이 있다. 조적조와 목조 트러스로 지은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1층 짜리 건물이다. 1925년 완공된 이 건물은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근대 문화유산이다. 커티스메모리얼홀 지하에는 '도서실'이 있다.

5.18 시기 광주 시위대는 참상을 알리고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전남 곳곳으로 내달렸다. 1973년 개관한 나주공공도서관 근처에는 옛 금성파출소 예비군 무기고 터가 있다. 이곳에서 시위대는 소총과 다량의 수류탄을 입수해서 무장했다. 나주 시민군이 거점으로 활용한 남고문 광장도 근처에 있다.

광주를 빠져나온 또 다른 시위대는 강진에 도착해서 강진읍 교회에 거점을 두고 활동했다. 강진읍교회 근처에는 1965년 문을 연 '강진군도서관'이 있다. 함평공원은 5월 22일 함평군민 궐기대회가 일어난 곳이다. 1988년 함평공원 근처에 함평공공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1973년 개관한 화순공공도서관 근처 화순경찰서에서 시위대는 총기와 수류탄을 확보했다. 화순공공도서관 옆 화순경찰서 사거리는 화순광업소에서 반출한 다이너마이트를 시위대가 차량에 싣고 광주로 출발한 곳이다. 

1980년 5월 21일 해남군민에게 광주 소식을 처음 알린 곳은 해남군청 군민광장이다. ​군청 군민관장에는 2002년 '해남군립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1974년부터 목포시립도서관으로 쓰인 목포근대역사관 옆에는 옛 목포3해역 사령부 헌병대 터가 있다. 이곳은 5.18 당시 목포 지역 민주인사를 폭행하고 구금한 곳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과 광주중앙도서관까지 생각하면, 광주 도서관 곳곳이 항일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 사적이나 다름없다. 광주는 5.18 사적지를 연결하여 '오월길'이라는 답사코스로 소개하고 있다. '오월 도서관길'과 '학생독립운동 도서관길'을 따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광주의 도서관은 5.18과 광주학생독립운동 사적지가 많다.

민주주의의 횃불로 타오른 빛고을
 
다양한 판본으로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2020년 서울기록원에서 “넘어 넘어 : 진실을 말하는 용기”라는 주제로 여러 가지 판본으로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전시했다. 1985년 5월 제본도 안 된 상태에서 책은 모두 압수당하고, 작가와 출판사 대표는 체포되었다. 이 책은 1987년이 되어서야 시중 서점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책제목은 문병란 시인의 <부활의 노래> 시 구절에서 따왔다. ⓒ 백창민
 
5.18 광주민주항쟁 후 오랫동안 광주에서 일어난 진실을 알리는 일 자체가 신군부에 의해 봉쇄되었다. 광주민주항쟁이 끝난 1980년 6월 23일 무장군인 다섯 명이 광주 미문화원 '도서관'에 난입했다. <타임>이나 <뉴스위크>에 실린 계엄군 기사를 찾아내 시민이 열람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이 사건을 비밀문서로 작성해 본국에 보고했다.

광주민주항쟁 이야기는 노래와 책, 그림과 영상.영화로 만들어져 퍼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최후 항쟁을 주도한 윤상원과 들불야학 강학으로 일하다 숨진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을 다룬 노래굿 넋풀이를 통해 발표된 곡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세계로 퍼져 '사랑의 행진곡', '노동 투쟁가', '연대의 노래'로 불리고 있다. 친일파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국가로 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광주의 진실을 담은 책도 여럿 발간되어 퍼져 나갔다. 소준섭이 7개월에 걸쳐 정리한 <광주백서>는 책자 형태로 광주의 진실을 처음 알린 책이다. 소준섭은 국회도서관에서 조사관으로 일하고 있다. '넘어 넘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5.18을 알린 가장 대표적인 책 중 하나다. 1985년 책이 출간되자마자 2만 권이 압수당했다. 대표 작가로 이름을 올린 황석영과 책을 출간한 풀빛출판사 대표 나병식도 곧바로 연행 당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초판이 표지 디자인도 제대로 작업하지 못한 채, 출간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 책을 출간한 나병식은 광주제일고등학교 출신으로 1973년 서울대 문리대 도서관에서 터진 10.2 시위를 주도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학생운동가로 출판문화운동가로 세상에 파란을 일으키던 '만파'(萬波) 나병식은 2013년 세상을 떠났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김상진은 양심선언을 낭독하고 할복했다. 같은 해 5월 13일 박정희 유신 정권은 긴급 조치 9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지 열흘이 되지 않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에서 5.22 시위가 터졌다. 이 시위에서 김상진의 넋을 기리는 <지노귀굿>에 참여한 멤버 중에 장만철이 있다. 장만철은 영화감독 장선우다. 장선우는 <꽃잎>(1996)이라는 제목으로 광주민주항쟁을 스크린에 옮겼다. 

영화 <박하사탕>(1999)에서 계엄군으로 상처를 그린 영화 감독 이창동은 2003년부터 1년여 동안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도서관' 정책을 이끌었다. '학교도서관'을 귀신이 등장하는 공간으로 그린 영화 <여고괴담>(1998)에 연출부로 참여한 김지훈은 5.18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2007)를 찍었다. 영화 <음란서생>(2006)에서 조선의 책대여점 '세책점'을 묘사한 조근현 감독은 강풀의 웹툰을 같은 이름의 영화 <26년>(2012)으로 연출했다. 

1981년 5월 26일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4학년 김태훈은 중앙도서관 6층에서 "전두환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친 후 투신 사망했다. 5.18 5주년을 맞은 1985년 5월에는 미 문화원 '도서관' 점거 농성 사건이 터졌다. 5.18 이후 전국의 대학도서관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는 투쟁과 유인물 배포의 공간이 되었다. 

1988년부터 다음해까지 이어진 '광주 사태 진상 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열린 청문회다. TV를 통해 중계된 청문회는 40% 넘는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온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광주의 진실을 향한 노력은 이어져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내란 및 내란 목적을 위한 살인 행위'로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노태우에게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1997년 12월 김영삼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특별사면'했다.

5.18 이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통해 6월 항쟁이 일어나고, 1987년 개헌을 통해 1991년 지방자치제가 부활했다. 이를 통해 전국 곳곳에 수많은 공공도서관이 세워졌다. 민주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도서관 수가 양적으로 크게 '확대'된 것이다. 

권위적이고 천편일률적인 모습의 도서관 '건축'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도서관 '구조'는 폐가제에서 개가제로, '공간'은 이용자 친화적으로 바뀌었다. 검열되던 '장서'는 시민이 원하는 책으로 채워졌다. '서비스'도 도서관 이용자인 시민의 눈높이에 맞게 바뀌었다. 이를 생각하면 5.18 광주민주항쟁은 우리가 누리는 도서관을 일군 '전환점'이기도 하다. 

책을 매개로 한 독서회를 통해 학생독립운동을 일으키며 광주는 식민지 조선의 '빛'이 되었다. 들불야학과 녹두서점에서 책을 통해 시대의 어둠을 밝히려 했던 이들이 광주민주항쟁의 선두에 섰다. 그들의 고결한 희생 덕분에 우리는 한 걸음 전진했다. '빛고을'은 그 이름처럼 민주주의의 횃불로 타올랐다. 저항 정신으로 일어선 광주는 우리 시대의 '텍스트'이고, 그 자체로 시대정신을 담은 거대한 '도서관'이다.

우리에게 '광주'는 무엇인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라이브러리 파크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문화정보원에는 ‘라이브러리 파크’(Library park)가 있다. 라이브러리 파크는 도서관과 박물관, 아카이브, 상영관, 커뮤니티룸, 휴식공간이 결합된 새로운 문화 공간이다. ‘라비키움’을 지향하는 공간이며,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 자원을 만날 수 있다. 라이브러리 파크는 대나무 정원과 통하도록 설계됐다. ⓒ 백창민
 
작가 유시민의 말처럼 광주의 희생과 참혹한 패배는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모두 국지적 봉기였기에 성공할 수 없었다. 유시민은 광주항쟁을 이렇게 평했다.

"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87년 6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 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광주 시민들만 홀로 고립의 아픔을 겪게 만든 1980년 5월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대판이었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이렇게 말했다.

"광주는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실패한 무장봉기입니다. 처절하게 패배한 봉기였지요. 그러나 긴 역사에서 볼 때 광주만큼 성공한 운동도 찾기 어려울 겁니다. 광주는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 한 세대에 걸친 역사가 광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패배한 싸움이었던 광주가 새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잘 졌기 때문입니다. (중략) 광주에서의 죽음은, 광주의 장엄한 패배는 수많은 광주의 자식에 의해 위대하게 부활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한 한국의 민주화는 결국 광주로부터 비롯되었다. 다시 한홍구 교수의 글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이 말은 1980년대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후 6월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6월 항쟁을 가장 쉽게 설명하면, 1980년 5월 도청에서 도망갔던 사람들이 다시 모인 사건, 1980년 5월 26일 밤에 품었던 질문을 안고 살아온 이들이 다시 모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주의 희생을 통해, 우리는 시대의 어둠을 건넜다. 작가 한강이 2009년 '용산참사'를 바라보며 "저건 광주잖아"라고 혼잣말 한 것처럼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다. 용산과 세월호 같은 '참사'가 계속되는 한, 우리에게 광주는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광주중앙도서관]

-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장동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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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관일 : 매월 둘째, 넷째 월요일설·추석 당일/특별한 사유로 관장이 정한 날/개관기념일(7월 2일)
- 이용자격 : 광주시민/재외국민 국내거소신고증 또는 외국인등록증을 소지한 외국인
- 홈페이지 : http://lib.gen.go.kr/jungang/
- 전화 : 062-607-1300
- 운영기관 : 광주광역시교육청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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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시간 : 종합자료실 / 디지털자료실 / 어린이실 / 장애인실 / 북카페 (평일 09:00 - 18:00, 주말 09:00 - 17:00), 학습실 : 07:00 - 22:00
- 휴관일 : 매월 첫째, 셋째 월요일, 특별한 사유로 관장이 정한 날, 개관기념일(11월3일)
- 이용자격 : 이용자격 제한 없음, 무료
- 홈페이지 : http://lib.gen.go.kr/student/
- 전화 : 062-221-5500
- 운영기관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도서관]

-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21 5.18민주화운동기록관 3층
- 이용시간 : 평일(09:00 - 18:00), 토·일·공휴일(09:00 - 18:00)
- 휴관일 : 1월 1일, 설날, 추석, 매주 월요일
- 이용자격 : 이용자격 제한 없음, 무료
- 홈페이지 : http://www.518archives.go.kr/
- 전화 : 062-613-8204
- 운영기관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전일빌딩 245 디지털정보도서관]

-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45 전일빌딩 2-3층
- 이용시간 : 10:00 -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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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자격 : 이용자격 제한 없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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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 : 062-613-8294
- 운영기관 : 광주광역시

[무등도서관]

- 주소 : 광주광역시 북구 면앙로 130
- 이용시간 : 종합자료실(평일 09:00 - 22:00, 주말 09:00 - 17:00), 어린이실/디지털자료실/장애인실/다문화자료실/어메리칸코너(평일 09:00 - 18:00, 주말 09:00 - 17:00, 주말에는 어린이실과 디지털자료실만 개방), 열람실(평일 07:00 - 23:00, 주말 07:00 - 22:00)
- 휴관일 : 매월 둘째, 넷째 월요일, 법정공휴일
- 이용자격 : 이용자격 제한 없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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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 : 062-613-7753
- 운영기관 :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라이브러리파크]

-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정보원 지하 3층
- 이용시간 : 평일 10:00 - 22:00, 일요일 10:00 - 18:00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 이용자격 : 이용자격 제한 없음, 무료
- 홈페이지 : https://www.acc.go.kr/main/index.do
- 전화 : 1899-5566
- 운영기관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덧붙이는 글 | '빛고을 광주의 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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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