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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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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서점가에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그의 이름과 저서를 거론하며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고 호기롭게 말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로마사의 재해석이라거나, <삼국지> 이후 가장 많이 읽힌 역사 교양서라는 찬사가 잇따랐다. 심지어 로마사를 필수 교양 과목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기도 했다. 강자와 영웅 중심의 역사관을 보여준다는 혹평이 쏟아지며 일순간에 바람이 잦아들긴 했어도 당시 <로마인 이야기>는 시대의 교양서였다.

저자 스스로도 밝혔듯이, <로마인 이야기>의 모티프는 로마의 도심 한가운데 널브러져 있는 육중한 돌무더기 폐허에서 비롯됐다. 이름 하여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영문명 Roman Forum). 우리말로 번역하면, 로마인의 광장, 곧 로마인이 모여 살던 곳쯤 되겠다.
 
로마제국의 시작점 콜로세오에서 바라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팔라티노 언덕의 모습. 포로 로마노의 시작이자, 로마가 시작된 역사적인 곳이다. ⓒ 서부원
 
로마를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지만, 꼼꼼한 사전 학습이나 전문 가이드의 도움 없이는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다. 무심히 서 있는 커다란 아치의 개선문과 무너진 신전의 기둥들, 그리고 무질서하게 뒹구는 주춧돌 등이 보이는 것의 전부다. 언뜻 무상한 세월의 더께만이 느껴질 뿐이다.

무너지고 부서진 조각에도 숫자인지 기호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당시의 문자가 촘촘히 박혀 있긴 하다. 현재 이탈리아어와는 사뭇 다른 고대 라틴 문자로, 만능이라는 스마트폰 번역기도 무용지물이다. 기존의 인터넷이나 여행 안내 책자에 수록된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포로 로마노의 경우엔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부러 빌린 오디오 가이드의 상세한 설명도 교과서의 서술마냥 사실의 나열에 불과해 귀에 들어왔다가 바로 튕겨져 나가는 느낌이다. 아무리 유서 깊은 유물일지라도 '영혼 없는' 설명은 박제처럼 기억되게 만드는 법이다.

시오노 나나미도 그랬을 것이다. 수백 년 단위를 오르내리는 연도는 무의미한 숫자처럼 여겨졌을 것이고, 빈터에 남겨진 역사적 사실에선 작위적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보고 읽기도 어려운 수많은 로마 황제의 이름들이 엮이기는커녕 허공을 맴돌았을 테고, 사실로서의 역사와 허구의 판타지가 폐허 위에서 춤을 췄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의 고수일수록 화려하고 볼거리 많은 곳보다는 스러진 폐사지의 황량함을 좋아한다고. 외양이 다 갖춰져 있으면 느낌이 엇비슷해서 보는 이의 상상이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여행에 자신만의 개성을 담으려면 '빈 틈'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남는 건 사진뿐'인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포로 로마노 전경 폐허에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부서진 수많은 잔해 뒤로 저 멀리 콜로세오의 모습이 보인다. ⓒ 서부원
 
포로 로마노는 '빈 틈'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도록 건네는, 차라리 '도화지'다. 성 베드로 성당과 광장, 산탄젤로 성, 콜로세오, 판테온, 트레비 분수, 스페인 계단 등 로마를 대표하는 관광지야 차고도 넘치지만, 관광객이 '주인'인 곳은 많지 않다. 포로 로마노는 유적이 답하기 전에 관광객이 먼저 질문을 던지는 곳이다.

모름지기 여행이란 '대상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을 찾으러' 가는 것이고, '배우러' 가는 게 아니라 '질문하기 위해' 가는 것이다. 유적이나 유물에 대해 보고 배우러 가는 거라면, 굳이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다. 집에서 손 안의 스마트폰 하나면, 빠르고 쉽게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비워져야 채워지듯, 무너지고 부서진 폐허에는 다시 쌓아올릴 무궁무진한 스토리가 잠재되어 있다. 여행은 유적이나 유물 앞에서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구축해가는 일이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뼈대 위에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라는 자신만의 살을 입히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여행은 '팩션(Faction)'이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포로 로마노의 시작점은 로마시대 검투사의 경기가 열렸다는 콜로세오다. 세계적 불가사의로 평가받는 콜로세오는 명실공히 로마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어쩌면 '모든 길은 콜로세오로 통한다'로 수정돼야 할지도 모른다.
 
포리 임페리알리 모습 무솔리니가 건설한 '제국의 길'이 포로 로마노를 가르고 있다.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인 이마누엘레 2세 기념관과 콜로세오를 연결하는 도로로, 파시즘의 대표적인 잔재다. ⓒ 서부원
 
웬만한 카메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콜로세오 곁이라 포로 로마노는 마치 건물의 부스러기마냥 초라하기만 하다. 포로 로마노의 전경을 어떻게 사진에 담든 배경처럼 뒤엔 콜로세오가 자리한다. 하지만 절반 가까이 부서진 콜로세오도 엄연히 포로 로마노의 일부다.

잔해일지언정 과거 화려했던 로마의 영광을 증명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기독교가 공인된 뒤 신전이 방치되고, 알프스 너머에서 고트족이 침입해 로마를 멸망시킨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후 신전이 성당으로 고쳐 세워지는 모습 또한 그대로 남아 있다.

로마 공화정을 이끈 원로원 건물과 난세의 영웅 카이사르의 화장터가 있고, 그의 후계자로 로마의 첫 번째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자취도 오롯하다. 콜로세오를 건설한 황제 티투스와 지금의 중동 지방을 복속시킨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공을 기린 개선문은 거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다. 두 개선문은 지금 포로 로마노를 수문장처럼 지키고 섰다.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정적 막센티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뒤 세운 개선문도 빼놓을 수 없다. 콜로세오 곁이어서 왜소해보일 뿐, 앞선 두 개선문을 합해놓은 규모다. 특히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옮겨가려다 실패한 걸작으로, 이후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세운 개선문의 모델이 됐다. 

콜로세오의 반대쪽 포로 로마노의 끝은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인 에마누엘레 2세의 기념관이다. 그 옆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과 계단이 있어, 대개 사람들은 이곳에서 포로 로마노 관광을 갈무리한다. 주지하다시피,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이자 화가다.

카이사르에서 미켈란젤로에 이르기까지, 폐허로 남은 포로 로마노는 최소 1500년이 넘는 로마의 역사를 일관된 스토리로 엮어낼 수 있는 곳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보다 귀로 듣는 이야기의 생명력이 훨씬 길다. 사실로서의 역사와 버무려진 이야기는 세월의 더께가 더해지면서 숙성되는 술처럼 재미와 의미를 더해가게 된다. <로마인 이야기>도 그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잔해만 남은 포로 로마노는 자동차 도로에 의해 둘로 쪼개져 있다. 콜로세오와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잇는 500m 남짓의 로마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왕복 4차선의 대로다. 수많은 고대 로마의 유물이 도로 아래에 깔린 형국이다. 길 이름은 '포리 임페리알리', 우리말로 '제국의 길'쯤 되겠다.

로마의 황제들이 오갔던 길을 부르는 말이지만, 지금의 도로는 '로마 진군'으로 권력을 잡은 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무솔리니가 건설한 것이다. 로마 시민들에게 군사 퍼레이드를 보여주기 위해 급조한 무대였던 셈이다. 그는 장갑차와 탱크 등을 앞세운 열병식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고, 수천 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캄피돌리오 광장에 오르는 계단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곳으로, 착시 효과를 고려한 위대한 건축으로 평가받고 있다. 위치 상 포로 로마노의 종착지라고 할 수 있다. ⓒ 서부원
 
포로 로마노가 품은 역사는 르네상스에서 마무리되지 못했다. 파시스트에 기꺼이 협력하거나 그들의 총칼에 주눅이 든 시민들은 자신의 조상들의 체취가 남아 있는 유적이 파괴되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서 포로 로마노는 전쟁의 참화를 또다시 겪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로마를 여행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포로 로마노를 걸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포로 로마노를 걸으며 장구한 로마와 이탈리아의 역사를 떠올려보는 사람과, 폐허로 변한 곳에 뭐 볼 게 있겠느냐며 심드렁해 하는 사람.

포로 로마노를 거닐다 보면, 질문할 거리가 넘쳐난다. 여행안내 책자는 말할 것도 없고, 로마의 역사를 다룬 교양서로도 채워지지 않는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 질문에 답을 검색하거나, 스스로 답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포로 로마노에는 역사를 기반으로 한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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