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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용늪 7월 말에 방문하면 푸른색 늪에 희귀 야생화들이 피어있다고 한다. ⓒ CHUNG JONGIN

10월 초 용늪이 있는 대암산을 방문했다. 희귀 야생화 대신 소박한 상차림을 부끄러워 하는 단풍이 탐방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인제군 서화면에 있는 용늪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선 시각은 새벽 여섯 시.

늦은 무더위가 조금 물러가기는 했으나 여전히 반소매 셔츠 위에 걸치는 바람막이 재킷이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평지보다 십 도가량 낮다는 용늪에서의 추위에 대비하여 긴소매 셔츠와 스웨터도 배낭에 욱여넣었다.
 
대암산 단풍 아직 물들지 않은 푸른 숲 속에 빨간 단풍이 도드라져 보인다. ⓒ CHUNG JONGIN
 
오전 열 시 용늪 생태탐방센터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가늘어서 탐방을 취소할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색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대신 용늪의 전체적인 모습과 대암산 정상에서 보인다는 펀치볼과 금강산 전경은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비에 젖어 있는 깊은 산속의 공기는 막 빨랫줄에서 걷어낸 차가운 수건이 얼굴을 감싸주는 것처럼 상쾌하면서도 포근했다. 
 
대암산 출렁다리 용늪 위를 뛰면(금지된 행동) 마치 텀블링처럼 용늪 전체가 출렁거린다더니 대암산의 출렁다리는 유난히 출렁거린다. ⓒ CHUNG JONGIN

가는 빗줄기가 멈추었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숲길을 조금 걸으니 오른쪽으로 폭포가 나타나고 출렁다리도 보였다. 수량이 풍부한 계곡물은 용늪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란다.

해설사는 잠깐씩 멈추며 지금은 지고 없는 희귀 식물들을 설명하고 죽은 참나무에서 자라는 말굽버섯과 안장버섯들을 소개했다. 배고픈 민초에게 살아서는 도토리를, 죽어서는 다양한 버섯을 선사하는 참나무의 고마움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용늪으로 가는 길목 용늪으로 가는 탐방로가 뿌연 날씨 속에서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다. ⓒ CHUNG JONGIN
 
비에 젖어 미끄러운 산길을 두 시간가량 조심조심 올라가니 드디어 '용늪 전망대'가 보였다. 해발 1280m에 펼쳐져 있는 대암산 용늪은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국내 최초로 '람사르 협약 습지(Ramsar wetlands)'로 등재된 국내 유일의 고원 습지다. 침식에 취약한 편마암이 많은 대암산의 평평한 산등성이에 비와 눈이 내려 고인 수분이 고지대의 낮은 기온으로 다 증발하지 못하고 습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용늪에 서식하는 식물은 낮은 기온으로 완전히 분해되지 않음으로써 식물의 DNA가 그대로 보존된 채 잔해가 진흙과 섞여 이탄층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이탄층의 높이는 평균 1m로 최소 70cm에서 최대 1.8m에 이른다.

170일 이상이 안개에 싸여 있고 연 평균 기온이 4.4도라는 악조건 속에서 일 년에 쌓이는 퇴적물은 1mm에 불과하다. 최근 연구에서 용늪의 나이를 5200살로 추정하고 있으니, 한국의 반만년 역사는 용늪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안개에 싸여있는 용늪 안개 자옥한 날씨에 본 몽환적 분위기의 용늪 ⓒ CHUNG JONGIN
 
용늪 탐방로로 들어가려면 등산화에 묻어올 수 있는 외래종의 침입을 막기 위해 등산화의 흙을 털고 등산 스틱을 접어야 했다. 탐방로 데크 안으로 들어서니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길을 따라가느라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차츰 수풀 사이의 물웅덩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용늪에는 500여 종 이상의 다양한 희귀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는데, 이미 초겨울로 들어선 안개 자욱한 날씨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보아도 식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위안으로 삼으며 자연이 빚어내는 몽환적인 분위기만으로도 인간의 철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용늪이라는 이름은 햇볕이 강한 여름날, 늪에 고인 물이 수증기가 되어 올라가는 것을 보고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고 나름대로 생각했다. 

용늪을 돌고 나오니 다음은 대암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길옆에 색 바랜 '미확인 지뢰지대' 푯말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치열한 전쟁터였던가?

지금도 이곳은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민간인 통제선 안에 있는 곳이라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결국 용늪은 끔찍한 전쟁에서 상처를 입고 살아남아 그 상처 덕에 이 정도라도 보존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암산 정상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를 따라 올라가야 이를 수 있었다. 어찌어찌 오르고 보니 '대암산 정상'이라고 쓰인 작은 팻말이 큰 바위 밑에 귀엽게 놓여 있었다.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설악산도 금강산도 볼 수 있다는데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물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산등성이뿐이었다.  
   
대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경관 물안개가 시야를 가려 희미한 산등성이만 보인다. ⓒ CHUNG JONGIN
 
하산 길은 늘 그렇듯이 조금 지루하였고 비로 미끄러워진 진흙더미에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였다. 내려오면서 보니 숲은 상당히 깊고 계곡을 따라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아름다웠다. 

해설사 말에 따르면 오늘 같은 날씨가 있어야 단풍이 짙게 물들고 용늪의 생태계도 유지된단다. 이곳 역시 기후변화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최근에는 안개 낀 날이 줄어들고 갈변현상까지 나타난다고 했다.

지난 8월 용늪 탐방 기회를 놓치고 10월에 가기로 하면서 용늪의 희귀 식물을 보고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느니 차라리 예쁜 단풍을 보겠노라고 호기 있게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 와 지난 여름 용늪에 피어나는 꽃들과 날아다니는 이름 모를 곤충들을 상상하니 아쉬움이 컸다. 마음이 닿는다고 아무 때나 홀로 올 수 없으니, 내년에는 부지런을 떨어 더위가 무르익을 때 꼭 다시 와야겠다.

* 용늪은 매년 5월 16일부터 10월 31일 사이에 하루 250명 이내로 사전예약을 통해 정해진 시간에만 출입을 허용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서울시50플러스재단 중부캠퍼스 '평화 길벗' 커뮤니티 게시판

태그:##대암산, ##용늪, ##람사르 협약 습지, ##이탄층, ##갈변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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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반 동안 대한민국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다시 엘에이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서도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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